제247화
정선제는 셋을 확정한 다음 장원, 방안, 탐화 자리를 두고 고민했다.
일반적으로 전시에서 일갑 안에 든 세 사람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황제는 대개 가장 젊고 외모가 뛰어난 자를 탐화로 골랐다.
그런데 주운환은 두 사람보다 훨씬 실력이 출중했고 또 진지항도 이십 대의 준수한 젊은이인데, 외모와 나이만 가지고 주운환을 탐화로 고르는 건 그에게 너무 억울한 처사 같았다.
이에 정선제는 주운환을 장원으로, 조범수를 방안, 진지항을 탐화로 정했다. 그런 후 이어서 이갑, 삼갑도 정하며 모두의 등수를 결정하고는 일갑에 든 세 사람에게 환복을 명해 거리 행진을 시작하도록 했다.
금옥루에 있던 오 나리의 시동이 전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오 나리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허허 웃으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백지를 낼 줄 알았는데 빛나는 재주에 뛰어난 글 솜씨를 가진, 재능이 흘러넘치는 자였구나. 내가 좁은 안목으로 허튼소리를 지껄인 거군.”
“나리, 나리는 급한 성미를 고치셔야 합니다.”
시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오 나리가 허허 웃어 보였다. 그는 의외로 도량이 넓은 사람이라 그리 말하며 엽연채 쪽을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엽연채 일행에게 그를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아래에 있는 주운환에게 손을 흔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장박원은 창백한 안색을 하고 얼뜨기처럼 멍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큰도련님, 큰도련님. 왜 그러세요? 어서 떠나시죠!”
상황을 지켜보던 그의 시동이 깜짝 놀라 얼른 장박원을 잡아당겼고, 이에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질질 끌려 밖으로 나갔다.
“서야…….”
엽승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서를 잡아당겼다.
은정랑은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꽉 물었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원망이 가득 찬 눈빛이 보였다.
‘내게 굴욕을 준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명도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허서는 이 상황을 정말로 견딜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는 창가로 몸을 숙인 채 바깥을 바라볼 뿐, 그에게는 조롱의 눈빛조차 보여 주지 않았다.
가슴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찬 허서는 돌아서서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서야!”
엽승덕이 그를 쫓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은정랑이 그를 붙잡아 세우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게 내버려 두세요! 가슴속에 억울함과 불만이 가득할 테니 밖으로 분출해야죠. 바깥바람을 쐬며 혼자서 냉정을 되찾을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 말에 엽승덕은 멍해졌다. 그는 눈물을 참고 있는 그녀를 보며 몹시도 마음 아파했다.
허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대로 거리를 내달렸다.
장원 급제자와 그 무리는 이미 떠난 후였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저마다 방금 전의 성대한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올해 일갑에 든 진사는 정말 젊더라! 젊은이가 두 명이던데!”
“장원 급제자가 나이가 가장 어리더라고. 춘시에서 장원 급제를 했던 사람 같던데! 열여덟이면 얼마나 젊은 나이야. 게다가 얼굴도 그리 잘생겼고 말이지.”
허서는 사람들의 칭찬 소리를 듣자 마음이 더욱 울적해져 머리 없는 파리처럼 마구잡이로 인파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려 하는지 몰랐고 가슴속에는 그저 분노와 억하심정뿐이었다.
허서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낯선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이내 ‘퍽’ 소리를 내며 누군가와 부딪혔고, 그 바람에 그의 몸은 뒤로 붕 뜨더니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허서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어 보니 비단옷 차림의 상대방도 그와 마찬가지로 넘어져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사내의 뒤에 있던 두 시동이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나리, 괜찮으세요?”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허서가 보니 그는 스물일곱쯤 되어 보이는 키가 작고 뚱뚱한 사내였다. 엽전 무늬가 들어간 초록색 비단옷은 그의 포동포동한 몸을 동과冬瓜(타원형의 초록빛 호박)처럼 보이게 했다.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의 얼굴이었는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는 몹시도 험상궂어 보였고 눈빛 역시 흉악했다. 턱에 붙은 것이 살이 아니라 심술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굵고 묵직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떤 쌍놈의 자식이 이 곽 나리와 부딪히는 것이냐?”
“둘째 나리, 바로 이놈입니다!”
곽 씨의 시동 중 하나가 허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째 나리, 나리의 금장군金將軍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동이 땅에서 녹색 구름 문양이 들어간 조그만 옥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러자 곽 씨는 깜짝 놀라며 격노했다.
“이 몸이 엄청난 노력을 들여 구해 온 금장군이……! 이 망할 놈, 내 너를 살려 두지 않겠다!”
허서는 자신이 무뢰한과 맞닥뜨리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놀라면서도 화가 났다. 그는 그들을 피하려 했지만, 곽 씨의 두 시동이 한발 빨리 그의 앞을 막아섰다.
놀라움과 노여움이 교차한 허서가 이렇게 말했다.
“저, 저희 아버지는 정안후부 세자이십니다.”
“흥! 정안후부 세자? 이름도 못 들어 본 사람이다. 감히 이 몸 앞에서 위세를 부리는 것이냐!”
곽 씨는 그 말에도 겁내지 않으며 그를 냅다 걷어찼고 그에게 걷어차인 허서는 땅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그는 문약한 서생에 불과했고, 거기다 요 몇 년 동안 호사를 부리며 지냈으니 어디 이렇게 얻어맞아 보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까무러치게 놀란 허서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뭣들 하는 짓이냐?”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노여움에 호통을 쳤다. 허서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엽균이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허서는 기뻐하며 말했다.
“형님!”
“서야, 괜찮은 것이냐?”
엽균은 서둘러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넌 누구냐? 썩 꺼지거라!”
곽 씨가 엽균에게 삿대질을 하며 노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멍청한 놈아, 내가 왜 꺼져야 하느냐? 내가 설마 너희들에게 쥐어 터지라고 내 동생을 이곳에 놔두고 가겠느냐?
엽균은 허서의 앞을 막아서며 경고했다.
“감히 내 동생을 상하게 하는 자는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몸 앞에서 위세를 부리다니?”
그리 말하며 곽 씨는 또 발길질을 했다. 하나 엽균은 허서처럼 몸 쓰는 건 아무것도 못 하는 문약한 서생이 아니었다. 엽균은 곽 씨의 발이 닿기도 전에 그를 먼저 발로 차 땅바닥에 나뒹굴게 했다.
“아이고야!”
곽 씨가 바닥을 뒹굴며 소리쳤다.
“감히 날 발로 차다니! 저놈을 두들겨 패거라! 흠씬 두들겨 패!!”
그의 두 시동이 엽균에게 왁 달려들었으나 엽균은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부잣집 공자로 살아온 그는 놀고먹는 걸로는 최고가 아니었지만 싸움에서는 대단한 능력을 보였다.
잠시 후, 똥오줌을 질질 쌀 정도로 그에게 얻어맞은 두 시동은 바닥에 엎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이 개놈의 자식!”
곽 씨가 언제 이렇게 불리한 처지가 되어 본 적이 있겠는가?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엽균에게 달려들었다.
“그래도 덤비겠다는 거냐?”
엽균은 소리 내어 웃으며 앞으로 두 발자국 내딛더니 잽싸게 발을 내밀었다. 곽 나리는 그대로 엽균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고 이윽고 ‘쿵’ 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바위에 부딪힌 곽 씨는 그제야 구르기를 멈추었다.
“아이고, 내 다리야! 내 다리야!”
곽 씨가 다리를 움켜쥐고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얘들아, 어서 이리 오너라. 아이고, 내 다리야!”
그러나 엽균이 무엇 하러 그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신경 쓰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그의 두 시동도 이미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흥. 내 오늘은 허서를 봐서 네놈들을 놔주마.”
엽균은 ‘흥’ 콧방귀를 뀌고는 허서를 부축해 급히 그 자리를 떴다. 뒤에서는 다리가 부러졌다, 나 죽는다 등 울부짖는 곽 씨의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두 사람이 골목을 빠져나오니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로였다. 허서는 창백한 얼굴로 겨우 걸음을 내디뎠고, 뒤에서 걷던 엽균은 그런 그를 염려했다.
“서야,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없습니다.”
허서는 고개를 돌리더니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형님.”
“고맙긴 뭘.”
엽균은 허서가 시험에서 낙방한 일로 아직 상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우린 형제이니 내가 널 구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설마 곤경에 처한 널 보고도 내가 구하지 않겠느냐? 가자. 가서 술이나 마시자꾸나.”
엽균은 그리 말하며 허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길가에 있는 한 술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허서는 고개를 돌려 금옥루가 위치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음험하고 악랄한 기운이 가득했다.
‘오늘의 치욕을 반드시 배로 갚아줄 것이다! 낙방한 게 뭐 어떤가? 엽연채가 장원 급제자의 아내가 되면 또 뭐 하겠는가?’
자신은 곧 정안후부로 입적될 것이었다.
‘내가 엽씨 가문의 적자가 되면 너희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두고 볼 것이다! 그때도 미소 지을 수 있을지 지켜볼 것이다……!’
* * *
한편, 주씨 가문. 주운환이 장원 급제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집안으로 전해졌다. 탑상에 앉아 있던 진씨는 손에 든 손수건을 힘껏 비틀었고, 소식을 전한 녹엽은 하좌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천한 놈이, 기녀가 낳은 비천한 종자가!”
진씨는 더더욱 독한 말을 퍼붓고 싶었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욕설만 뱉고 또 뱉을 뿐이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좋은 물건이 아님을 내 알고 있었다. 그 여우 같은 년!”
주운환의 생모는 진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주씨 가문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주 백야는 명문가 주씨 가문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달려드는 여인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그 당시 그의 뒤뜰에는 이낭과 통방이 꽤 많았다.
한번은 주 백야가 고향에 돌아가 일을 처리했는데, 그는 집으로 돌아올 때 미인 한 명을 또 데려왔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맑고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 자꾸만 시선이 가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사주沙州 지역 한 기루의 간판 기녀였던 것이다.
‘기녀였다니!’
그녀의 출신을 알게 된 진씨는 배꼽을 잡고 웃었지만, 또 속으로 주 백야의 뻔뻔함에 노여워했다. 그런 여인마저 집안으로 들이다니.
그 여인이 빨리 죽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 이 서자 놈이 장원 급제를 했으니 얼마나 날뛰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분명 방법을 강구해 자신의 안주인 자리를 빼앗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 여인의 아들이 온갖 방법을 짜내 자기 아들의 세자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진씨는 분했고 가슴속에 원한과 미움이 가득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