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주 백야만이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환이가 백지를 내려고 했다? 왜 그러려고 했을까…….’
온씨와 묘씨 등은 화가 나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것들……!”
화가 난 온씨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하나 그녀도 차마 욕설을 더 내뱉을 수는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어머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엽연채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부군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예요.”
말문이 막힌 온씨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꼬리를 잡았다.
“나쁜 버릇 중 하나라고? 그럼 다른 버릇은 무엇이냐? 아, 알겠다. 다른 사람과 한 침상에서 못 자는 거였지.”
난처해진 엽연채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쿡 찌르며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어쨌든 지금 조급해해 봤자 아무 소용없단다.”
묘씨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온씨를 다독였다. 이에 온씨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어렵사리 시련을 헤쳐 나왔는데 지금 또 이런 일을 겪게 되다니.
‘사위가 너무 긴장한 모양이다! 어쨌든 이제 겨우 열여덟 살 먹은 소년이니!’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몇 년 더 있다가 시험을 보는 편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치지 못했다. 차분한 마음을 갖고 다음번 전시에서 맘껏 실력을 발휘한다면 이갑 안에 들거나 혹은 삼갑에서 상위권에 들었을 것이다. 일갑만은 못해도 이 또한 좋은 성적이니 아무렴 괜찮았다.
그런데 지금 장원 급제라는 높은 성적을 얻어 놓고 막상 전시에서 답을 적지 못했으니, 백지를 내 버리면 ‘높이 오를수록 미끄러질 때 더 아프고 볼썽사나운 법’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셈 아니겠는가.
온씨는 생각하면 할수록 맥이 빠졌다. 그녀도 장박원 무리가 떠드는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았지만, 오 나리가 두 눈으로 직접 주운환이 답을 적지 못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니 이는 남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일 것이었다.
“이제 사시巳時가 지난 것 같아요!”
이때, 엽미채가 작은 목소리로 시간을 알려 왔다. 이 말에 온씨와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온씨의 안색이 더욱 좋지 않았다.
주 백야가 물었다.
“잠깐 사이에 벌써 사시가 지났다는 말이냐?”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이 시간이 참으로 빨리도 지나가 버렸다. 온씨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사위가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휙 지나가 버렸으니 정말로 백지를 냈을까 싶어 가슴이 다 오그라들었다.
온씨와 다른 사람들은 점점 더 가슴이 두근거리고 조마조마해졌다. 그렇게 또 한 시진이 거의 다 지나갔다. 그런데 이때 아래에 있던 백성들이 갑자기 소란스럽게 떠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장원 급제자가 나왔다!”
엽연채는 얼른 창가로 몸을 숙였고 장박원, 허서, 엽승덕과 은정랑도 바로 창가로 걸어오더니 흥분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대당에 있던 사람들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창가로 몰려들었다.
“어서 봅시다!”
모든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황색 깃발이 길을 열고 있었다. 주변이 떠나가게 음악이 울려 퍼지고, 선두의 세 사람이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맨 앞의 사람은 황금 꽃무늬가 들어간 오사모烏紗帽(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에 쓰던 모자)와 진홍색 도포 차림으로, 붉은 갈기가 돋보이는 용마龍馬를 타고 있었다. 금빛 안장 위에 앉은 그 사람이 바로 장원 급제자였다.
장원 급제자는 황궁을 나오자마자 고개를 돌려 금옥루를 올려다보았다. 엽연채는 저 멀리 화려한 용모에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는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부군!”
주운환은 식구들이 이쪽 자리를 예약했을 줄 알고 나오자마자 그 방향을 쳐다봤다. 과연 사람들로 그득한 창가에서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래에서는 궁인들이 북과 징을 울리며 길을 열었다. 장원, 방안, 탐화는 시위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행진했고 백성들은 앞다투어 그 뒤를 쫓아갔다.
어린아이들은 웃으며 뛰어다녔고 나중에 자신들도 장원이 되어 거리 행진을 하겠다고 외쳤다. 그야말로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였다.
“아! 우리 운환이가 붙었구나! 우리 운환이가 장원으로 붙었어!”
주 백야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라 화끈거렸고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다.
“저… 정말 붙었구나!”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보니 딸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딸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아이고, 저 소년은 춘시 장원 급제자가 아닌가! 전시 장원 급제도 차지했구먼!”
대당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엽승덕과 은정랑은 안색이 확 변했다. 허서와 장박원은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고 머릿속에선 윙윙 소리가 날 뿐이었다.
‘어떻게 붙었다는 말인가? 어째서 붙었다는 말인가? 못 붙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붙었다는 말인가?’
방금 전 그들은 기를 쓰고 그를 폄훼했다. 주운환도 십 년 전 그 장원 급제자처럼 동진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깔보았는데, 일갑에 들 줄은, 그것도 장원으로 급제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그들은 누군가에게 연신 뺨을 후려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아픔이 느껴졌고, 수치심과 분노로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오 나리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리.”
이때, 계단 입구에서 한 시동이 뛰어 올라왔다.
“드디어 찾았네요! 전시를 잘 보고 계시다가 왜 슬그머니 사라지신 겁니까?”
이 사람은 오 나리의 시동이었다. 그러나 지금 오 나리는 그 질문에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장원 급제한 소년은 계속 먹만 갈고 있었는데 어떻게 전시에서 장원 급제를 했단 말이냐?”
그 말에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시동이 다소 밝은 얼굴로 답했다.
“예, 처음에는 모두들 그분이 백지를 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소년이 춘시에서 장원 급제를 했기에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모두 그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가 주어진 시험 시간의 절반 이상을 먹을 가는 데만 쓰고 있으니, 다들 대단히 의아해했다.
옥좌에 앉아 있던 정선제도 크게 실망해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응시생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시험 시간이 2각가량 남았을 때쯤, 그가 마침내 송연묵松煙墨(소나무를 태울 때 생기는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내려놓더니 붓을 휘갈기며 단숨에 글을 써 냈다.
그러나 정선제와 관리들은 그의 답안에 기대가 전혀 없었다. 그저 시간이 다 됐는데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자 되는대로 뭔가를 적어 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명월처럼 밝고 새하얀 얼굴에선 환한 빛이 흐르며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원래부터 그럴 계획이었다는 듯 그에게서는 당황스러움이나 초조함은 추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한 번도 손을 멈추지 않았고 정신이 흐려져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 또한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초안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희귀한 광경에 관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대부분 문관으로, 대부분 과거 시험 출신인 데다 뛰어난 학식과 정치적 경륜을 가져 평소 정치적 상황에 대해 글을 쓰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시험 문제들은 관점과 논증이 다양하기 때문에 쓰지 않으면 도저히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음을 말이다.
생각과 글은 별개의 것이라 때론 글을 써 보면 그 글이 생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마음속으로 정리한 바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이 소년은 단숨에 두 쪽에 이르는 글을 거침없이 척척, 참 빨리도 완성했다.
한 사람당 두 장밖에 받지 못하는 시험 답안지였다. 실수라도 하면 종이에 먹이 묻어 더러워지게 되는데, 그의 손동작은 흐르는 물과 흘러가는 구름처럼 막힘이 없었다.
그는 외모 또한 수려했다. 청수하면서도 화려한 외모를 가진 그가 그곳에 앉아 있으니 푸른 소나무처럼 점잖고 엄숙해 보였고 휘영청 밝은 달처럼 맑고 깨끗해 보였다. 홀로 빼어난 풍채를 뽐내고 있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꼭 그의 배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붓을 들고 글을 쓰고 있는 모습만 보아도 사람들은 눈이 호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곁눈질로 그를 힐끔댔다.
그는 글을 완성한 후 옅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가 붓을 놓자마자 밖에서 ‘쨍’ 하고 징 소리가 울렸다. 계단에 놓인 옥좌 옆에 서 있던 채결은 앞으로 한 발짝 내딛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시는 끝났소!”
어린 환관들은 아래로 내려가 모든 응시생들의 답안지를 하나하나 걷은 후 천자의 책상 앞에 올려 두었다.
정선제는 답안지를 들어 한 장씩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또 가로젓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간쯤에 있던 주운환의 답안지를 보더니 두 눈을 번쩍 떴다. 글의 요지부터 대책까지 시대의 폐단에 일침을 가하며 한 마디, 한 마디로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갔음에도 문장 사이에 어색한 느낌이나 뚝뚝 끊기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흐르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처럼 막힘없이 자연스러웠다.
화려한 문구로 수식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간결한 문장이 오히려 유창하고 사리에 통달한 느낌을 주어 좋은 글이었다.
이렇게 기승전결이 완벽한 글을 조금도 멈추지 않고 두 장을 써 내는 게 어려운 일임은 말할 것도 없고, 깊이 생각하고 꼼꼼히 따져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선제는 치세治世에 관한 그의 높은 식견에 놀랐고 타인을 능가하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 더더욱 놀라며 그의 답안지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답안지를 모두 확인한 정선제는 일등부터 삼등까지 뽑았는데 주운환, 진지항, 조범수였다. 정선제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젊은 인재들이 일갑 안에 들었구나!”
지난번 전시에서는 일갑 안에 젊은 인재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둘이나 나왔다. 주운환은 열여덟, 진지항은 스물셋이었고 조범수는 마흔여섯이었다. 대제는 정말로 인재가 차고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