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손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점원 한 명이 얼른 다가가 그를 공손하게 맞이했다. 점원이 그를 데리고 안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또 다른 점원이 엽연채가 앉은 탁자 앞으로 걸어와 간식거리를 내려놓았다. 그가 든 쟁반에는 떡류인 당증소락糖蒸酥酪과 계화당률분고桂花糖栗粉糕, 과자류 간식거리인 여의병如意餠, 길상과吉祥果가 놓여 있었다.
이 푸짐한 차림에 엽연채는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는 점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인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시게. 하지만 다 먹지 못하니 이렇게 많이 보내 줄 것 없네.”
그러자 점원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대꾸했다.
“저희 주인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자기 아들도 3년 후에 과거 시험을 볼 텐데 이번에 장원 급제자의 가족분들을 모실 수 있게 됐으니 이런 복이 따로 없다며, 저희 금옥루도 따라서 덕을 보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3년 후에 주인 어르신의 아드님도 좋은 성적을 거두겠지요.”
“하하하!”
이에 주 백야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고 온씨도 기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엽승덕은 짜증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곁의 장박원 역시 답답한 마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다. 뭣 하러 이곳에 와서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떠나면 분명 엽연채 일행에게 근성도 없는 놈이라고 비웃음당할 게 분명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조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주인에게 괜히 아까운 간식만 낭비하지 말라고 전하거라. 그런 불운은 안 가져가는 게 맞지. 안 그러면 용두사미의 결과를 맞이할 게다.”
목소리가 아주 크고 웃음소리도 쩌렁쩌렁해 2층 대당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엽연채, 온씨, 주 백야 등도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전 대당 안으로 들어왔던 귀한 옷차림에 살집이 좋은 그 사내였다.
“어, 저분은 오 나리가 아닌가?”
대당에 있던 손님들 중 몇몇이 그를 알아보았다.
“맞아, 오 나리네. 설마 방금 전에 궁에서 나온 걸까? 무슨 소식이라도 들고 왔으려나?”
엽승덕 일행과 장박원은 오 나리의 말에서 주운환을 깎아내리는 듯한 의도가 느껴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면, 엽연채는 두 눈을 가늘게 떴고 주 백야와 온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오 나리가 누구예요?”
엽미채가 엽연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몰라.”
엽연채가 고개를 가로젓자 묘씨가 작은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저분은 오 귀비貴妃 마마의 친오라버니시란다. 전에 너희 할아버지께서 오씨 가문에 선물을 몇 번 보내셨지. 나도 오씨 가문 주모主母의 생신 축하연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쪽 사람들이 우리를 냉대해서 그 이후로는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는단다.”
손님들이 오늘 이곳에 온 건 일갑一甲에 든 진사들이 거리 행진을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니, 당연히 모두가 전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오 나리가 그렇게 말을 하자 사람들은 잇달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오 나리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더니 더욱 의기양양해하며 ‘하하’ 크게 웃었다.
“오늘 열린 전시는 우리 대제의 성대한 의례 아닌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시험 감독을 하시는 자리이니, 문무백관들은 물론이고 후궁 마마들도 자리에 참석하셨다네.”
후궁들은 병풍을 사이에 두고 자리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아주 기가 막혀 금란전 안의 사람들은 병풍 뒤를 볼 수 없지만, 병풍 뒤에서는 금란전 안의 상황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나 같은 무식쟁이는 전시 같은 것에는 흥미를 못 느끼는데, 내 누이동생이 우리 가문 여식이 곧 성년식을 올리니 좋은 남편감을 골라야 한다고 말하더군. 마침 올해 춘시와 전시가 열려 인재들이 차고 넘치며 젊고 유능한 자제가 많을 테니, 내 누이동생이 나더러 가서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지. 요즘 다른 사람들이 하듯 합격자들 중에서 괜찮은 남편감을 고르는 게지.”
오 나리의 말에 대당 안의 손님들은 모두 폭소하고 말았다.
“오 나리, 마음에 드는 남편감은 찾으셨습니까?”
“반쯤 둘러봤는데 인재들이 하도 많아 눈앞이 다 어지럽더군. 남편감을 물색하는 건 여인들의 일이 아닌가? 너무 따분해서 바로 나와 버렸다네!”
오 나리가 말했다.
오 나리가 남편감을 찾아봤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자 장박원이 서둘러 이렇게 말했다.
“오 나리, 방금 전에 전시에서… 누군가가 용두사미의 결과를 얻었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오 나리는 ‘흥’ 소리를 내며 그 말을 받았다.
“그 인물이 제일 빼어난 소년이 장원 급제자라지? 내 누이동생에게 보고를 올리는 궁녀가 말하길 성이 주씨라고 하던데. 병풍 뒤에 앉아 있던 내 누이동생이 그자를 보자마자 마음에 딱 들어 했다. 그렇게 수려한 외모를 갖고 있으니 성적만 좋으면 사위로 삼아도 좋겠다고 했지.”
그 말에 엽연채는 말문이 턱 막혔고 온씨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화가 나 ‘흥’ 콧소리를 내며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누가 사위로 준대! 그 아이는 내 사위라고!”
오 나리가 이어서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궁녀가 알아보니 그자가 장원 급제한 소년이긴 한데 이미 혼례식을 올렸다고 하더군. 말이 나온 김에 그자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겠네. 전시가 시작되자 춘시 합격자들은 모두 넘치는 재능을 발휘해 붓을 휘두르며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갔지. 신들린 듯이 붓을 놀렸어.
그런데 그 장원 급제한 소년은 먹만 갈고 있더군. 반 시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먹을 갈고 있었다네! 전시가 먹 가는 솜씨를 평가하는 시험이었던가?”
그 말에 사람들은 또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요? 우리 셋째가 그랬을 리 없소.”
주 백야는 화가 나 얼굴이 새파래졌다. 마음 같아선 탁자를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오 나리의 험상궂은 얼굴과 오 귀비의 오라비라는 그의 신분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어 자리를 지킨 채 성을 냈다.
“내가 뭣 하러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겠소?”
오 나리는 조금 언짢았는지 콧방귀를 뀌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 시험 문제는 복잡했소. 여러 분야에 관한 계책을 내놓고 정사에 대해서도 논해야 하며, 여기에 제목도 생각하고 글도 써야 하니 한 시진으론 빠듯했소.”
그는 스스로를 무식쟁이라고 칭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학식은 갖춘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장박원이 급히 그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되긴 뭘? 보다가 하도 지루하기에 밖으로 나와 버렸지! 안 그랬으면 이렇게 나와서 그대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겠는가?”
오 나리는 술잔에 술을 따른 후 흥에 겨워 술을 마셨고, 다른 손님들은 그가 던진 화두에 관심을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장박원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네요. 과연 오 나리께서 말씀하신 대로 용두사미군요. 장원 급제는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요. 8박 9일 동안 혼자서 답안을 작성할 때는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황제 폐하와 대신들 앞에선 한 자도 못 적었다니 말입니다.”
그는 주운환이 부정행위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은근히 그를 비꼬았다.
주 백야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온씨는 성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네가 못 붙었다고 지금 다른 사람을 폄훼하는 게냐?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나 본데, 비리가 있었다고 생각되면, 증거가 있으면 관아에 가서 고발하거라! 이미 춘시가 끝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안 가고 뭐 했느냐? 본인이 낙방했다고 괜히 남을 헐뜯다니. 그 정도 아량과 포용력마저도 없느냐?”
장박원은 그녀가 말끝마다 낙방했다는 소리를 하고 자신을 포용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비난하자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찌 됐든 간에 지금 장원 급제하신 분께서 답을 못 적고 계셨다는 거 아닙니까!”
장박원의 이 말에 허서는 ‘픽’ 하고 웃음을 짓더니 백자 찻잔을 집어 들며 비웃음 어린 미소를 지었다.
“쯧쯧, 이갑 안에는 들려나 모르겠네요?”
그러자 대당의 손님들도 또다시 소곤대기 시작했다. 이어 그중 한 사람이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백지를 내는데 어떻게 이갑 안에 들 수 있겠어? 삼갑 동진사만 되어도 체면은 살린 셈이지.”
“장원 급제자인데 어떻게 동진사가 되겠어?”
누군가 반론을 꺼내자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예 없었던 일도 아니라네. 십여 년 전에 장원 급제를 했던 사람이 있었네. 성이 류씨였나 유씨였나. 하여튼 간에 그 사람이 전시에서 꼴찌로 붙어 동진사가 되었고 9품 관리로 지방으로 파견되었다네.”
“아유, 나도 생각이 났구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지.”
그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노인이 이리 동조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자풍 옷차림에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어 딱 봐도 어느 서원의 선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런 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회시 채점관 몇 명이 황제 폐하께 꾸중을 들었지. 어떻게 그런 자를 장원 급제자로 평가했냐고 말이야!”
사람들은 잇달아 그 두 노인에게 당시의 상황을 캐묻고는 다시 지금 치러지는 전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장원 급제자도 설마 그렇게 재수가 없으려고?”
이 말에 여럿이 마치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한 양 떠들썩하게 웃어 댔다.
장박원은 그 말을 듣고는 일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자 즐거워하며 의기양양해했다. 심장이 쿵쿵 뛰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번에 장원 급제자가 꼴등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겠군요.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일인데 정말 운이 좋네요!”
허서도 이 말에 ‘킥’ 소리를 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한 그는 술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운환이 좋은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지금 상황이 다르게 돌아가자 마음속에서 활기가 넘쳐흘렀다.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체면이 한껏 살았던 사람이 이젠 웃음거리로 전락했네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떨어지는 편이 낫겠어요!”
장박원은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금방이라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박장대소할 기세였다.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던 속이 어느새 후련하고 통쾌해진 후였다.
‘떨어져라! 떨어져! 정말로 떨어져 버려라! 하하하, 찌꺼기 같은 놈이 그래도 싸지! 건방지게 날뛰어 대더니 지금은 온갖 창피를 다 당하는구나!’
엽승덕과 은정랑의 눈에도 조롱기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