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은정랑도 엽연채를 보더니 두려운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나 엽승덕은 무표정한 얼굴과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고, 허서는 얼굴에 냉소를 띠며 찻잔에 든 차를 마실 뿐이었다.
“서야, 신경 쓸 것 없다.”
엽승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승덕은 원래 이곳에 오는 걸 반대했었다. 엽연채는 뜻대로 일이 풀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득의양양한 순간을 맞이했으니, 그녀가 잘나가는 모습을 어디 보고 싶겠는가. 하지만 허서와 은정랑이 기어코 이곳에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은정랑도 목소리를 낮춰 허서에게 속삭였다.
“우리 모자는 그동안 늘 이런 순간들을 겪어 왔다. 그러니 서야, 오늘을 꼭 기억하거라.”
그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얼굴로 순간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강인한 의지를 드러냈다. 엽승덕을 만나기 전, 자신들 모자는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고 또 얼마나 모욕적인 일을 많이 겪었는가.
하지만 결국 다 버텨 냈다. 그러니 이번 일도 한 차례 시련에 불과할 것이었다. 고로 이 순간을 피해서는 안 되며 이를 계기로 마음을 한층 단련해야 했다.
엽승덕이 은정랑을 바라보니 그녀의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그러자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움켜잡았다.
은정랑은 늘 이랬다. 의지할 데 없는 연약한 여인이면서도 늘 굳세게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강인한 모습이 마치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는 양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엽연채는 엽승덕 쪽과 서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엽연채와 강심설 등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씨 일행이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연채야.”
온씨는 흥분한 모습으로 엽연채에게 다가서더니 그녀의 작은 손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녀와 함께 온 사람은 묘씨, 엽영교, 엽미채, 엽승강 내외였다.
“어머니, 보세요. 저기 아버지가…….”
엽미채는 조심스럽게 온씨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온씨는 ‘하’ 헛웃음을 치며 조롱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잘나가는 우리 사위의 모습을 보러 왔나 본데 그럼 오라지, 뭐. 난 저들이 안 올까 봐 걱정했단다.”
조소하는 목소리가 결코 작지 않아 엽승덕 일행은 그 말을 듣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허서의 눈빛이 가라앉자 은정랑은 그의 손을 토닥였고 그제야 허서는 냉정을 되찾았다.
2층 대당으로 올라오는 손님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잠시 후, 계단 입구로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사내가 걸어 올라왔다. 창백한 낯빛에 눈 밑 아래 그늘이 짙게 깔린 이 잘생긴 사내는 다름 아닌 장박원이었다.
장박원은 대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엽연채 일행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엽연채 일행의 시선 역시 이미 그에게 향해 있었다.
이를 알아챈 장박원의 안색이 또 한 번 변했다.
‘주씨 일가가 올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텐데! 궁금해 참을 수가 없어 걸음했더니 하필 저들과 맞닥뜨릴 줄이야!’
장박원은 어젯밤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했다는 것만 떠올리면, 심지어 그가 전시에서 삼갑 안에 들 것만 생각하면 그야말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장박원은 주운환이 부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기를, 동진사나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장박원은 속으로 이 저주를 계속 되풀이했고 그 되풀이는 아침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침 해가 뜨자 장박원은 더는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충격을 받을 거라면 빨리 받는 게 나았다. 더 이상 기다림이 주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으로 와서 소식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하필 엽연채 일행과 떡하니 마주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장박원은 그들이 자신을 조롱할까 봐 걱정이 되어 잽싸게 눈알을 굴렸고, 그러다가 엽승덕 일행을 발견했다.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엽 어르신.”
“박원아.”
엽승덕은 마음 맞는 동지가 온 양 기뻐하며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한 탁자에 앉게 되었고 엽승덕은 그에게 허서와 은정랑을 소개해 주었다.
장박원은 허서도 춘시에서 낙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공통된 원수가 있기 때문에 같은 곤경에 처한 사람이자 공동의 적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다소 풀어 낼 수 있었다.
“장원 급제하면 뭐 하겠습니까? 그동안 많은 장원 급제자가 전시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결국 동진사에 머물렀습니다. 이갑二甲 안에도 들지 못했지요.”
“그 말이 맞다.”
엽승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정랑과 허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들은 마음을 굳세게 먹고자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허서는 주운환이 전시에 급제할 거라는 사실을 자신이 받아들이도록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런데 장박원 이 유약한 자가 그런 말을 꺼내자 저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 은근히 그런 기대를 품게 되었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끼리끼리 노는구나.”
온씨가 노여운 목소리로 그들을 비난했다.
“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엽연채는 실실 웃으며 그녀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이따가 체면을 확 깎아 버리면 되죠.”
온씨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황궁.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정각, 전시가 시작되었다.
오늘 금란전 안에는 정선제도 자리하고 있었다. 정신이 맑은 그는 옥좌에 앉아 생기가 넘쳐흐르는 서생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서생들이 입는 회백색 도포를 입고 단정하고 예의 바른 자세로 아래에 서 있었고, 관원들은 양쪽으로 나눠 서 있었다.
주름 가득한 정선제의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번졌다.
“음, 좋구나.”
그리 말하며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응시생들은 한 줄에 열 명씩 서 있었는데, 첫 번째 줄을 쓱 훑다가 오른쪽 세 번째에 서 있는 한 서생에게 시선이 꽂혔다.
열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다른 춘시 합격자들과 마찬가지로 회백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눈에 확 띄었다. 화려한 외모에 남다른 고상함을 풍기고 있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선제는 그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을 지켜보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며 담담한 목소리로 명했다.
“시작하거라!”
채결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환관들은 즉시 높이가 낮은 기다란 책상을 들고 앞으로 나오더니 춘시 합격자들 앞에 책상을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준비를 마치자 정선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국政局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니 직무를 맡길 인재가 필요하구나. 하나 교육, 외교, 건설 등의 분야는 전문적 지식이 없는 자가 감독하고 관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 막중한 임무를 너희들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그러려면 너희들은 반드시 견문과 시야부터 넓혀야 하고 너희들을 단련할 책임은 관리들에게 있다.
한데 지금 각 성省에 설치된 교육 기관과 그곳 관리들의 공적을 살펴보면 대부분 공문空文이나 쓸 뿐, 실천에 힘쓰지 않고 있다. 짐이 지방 관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으나 그들은 형식적으로 대응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정책을 통해 관련 분야를 진흥할 적절한 계책이나 좋은 방법을 제시해 보거라.”
채결이 불자를 가볍게 흔들며 앞으로 한 발짝 내딛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전시를 시작하겠다!”
전시는 한 시진 동안 진행되었다. 모든 춘시 합격자는 일제히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먹을 갈면서 답안을 작성할 준비에 돌입했다.
양쪽에 서 있는 대신들은 응시생들의 집중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유 재상도 옆에 있는 관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소를 지으며 젊고 잘생긴 한 응시생을 슬쩍 가리켰다. 정선제 또한 그 서생을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 말이다……. 운하를 닮지 않았느냐?”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주운환이었다.
“닮았습니다.”
채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폐하, 작년에는 이 대인의 여식이 운하 공주 마마를 닮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정선제는 그렇게 대꾸하고 요절한 장녀를 떠올렸다. 자식을 앞세운 그의 가슴속에는 오랫동안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저자는 특히 닮았구나.”
채결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라 그는 이제 그 공주의 생김새도 가물가물했다. 궁에서 나갈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열 살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채결이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저자가 올해 장원 급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장원 급제자라고?”
정선제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반 시진쯤 지나자 하좌에 앉아 있는 응시생들은 붓을 휘두르며 글을 써 내려갔다. 정선제는 오늘 몸 상태가 아주 좋았기에 채결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대전 안에 모인 춘시 합격자들은 정신을 집중해 답안을 작성했고, 흥이 잔뜩 오른 황제는 천천히 걸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운환 앞에 다다르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 그가 한 바퀴를 돌면서 보니 어떤 응시생들은 답을 적기 시작했고 또 어떤 응시생은 답안지의 절반을 채운 상태였다. 물론 일부 응시생들은 긴장감 혹은 두려움 때문에 한 글자도 적지 못하거나 먹물로 종이의 절반을 더럽혔다. 이런 이들은 자신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힐끗 쳐다봤다.
정선제는 주운환에게 조금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의 외모가 누군가를 닮기도 했고 장원 급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앞으로 다가가 보니 답안지는 여전히 백지 상태였다.
주운환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천천히 먹을 갈 뿐이었다. 그가 이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정선제는 내심 실망하여 고개를 가로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에서 답안 작성에 주어진 시간이 거의 다 흘렀을 무렵, 금옥루의 손님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당연히 이야기는 대부분 전시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 둥근 꽃 문양이 들어간 자줏빛 비단 도포를 입은, 살이 퉁퉁하게 찐 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사내가 계단 입구에서 2층 대당으로 걸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