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유이야, 뭐 하는 게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것이냐?”
엽균은 유이의 속도 모르고 헤헤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유이야, 너 여기에 온 후로 계속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왜 그러는 게냐?”
반면 엽학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잖아도 손자가 시험에서 떨어져 기분이 좋지 않은데, 유이까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이는 감히 사실을 숨길 수가 없어 난처한 얼굴로 입을 뗐다.
“큰도련님, 도련님이 대체 어떻게 보신 건지 잘 모르겠네요. 도련님은 큰아가씨의 부군께서 떨어진 걸로 보셨다는데, 전 그분이 붙은 걸로 봤습니다.”
“뭐라?”
엽학문은 깜짝 놀랐고 엽승덕, 은정랑, 허서의 낯빛도 확 변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내가 어떻게 못 봤겠느냐?”
엽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분명 네가 잘못 본 게다.”
“도련님이 잘못 보신 거예요.”
유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단언했다.
“눈에 확 띄었습니다. 그분이 일등이니까요. 장원 급제하셨잖아요! 도련님 눈이 어떻게 되신 거 아니에요?”
“뭐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 내 매부의 이름이 설마 주운환인 거냐?”
엽균은 깜짝 놀랐고 엽학문과 엽승덕, 은정랑 모자도 깜짝 놀랐다.
‘참나, 이 물건은 자기 매부의 이름조차도 모른다는 말인가? 저게 사람인가? 어? 아니지, 사람일 리가 없지!’
“장, 장원 급제?”
엽학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도 무려 네 번이나 춘시에 응시해 봤기 때문에 춘시 합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춘시에서 장원 급제를 하는 건 어렵기 이를 데 없는 일로,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을 해낸 사람이 나온 것이다.
그래도 매년 회시를 보면 누군가는 장원 급제를 하기 마련이었다. 한데 이번에 장원 급제를 한 사람은 뜻밖에도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냥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손녀사위였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미워하고 꺼리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그 손녀의 남편 말이다.
엽학문은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엽승덕은 원망이 가득 담긴 음험하고 악랄한 눈빛을 번뜩였다.
‘어째서 그 악독한 계집애의 남편이 장원 급제를 했단 말인가!’
“그, 그럴 리가 없어요.”
허서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으로 냅다 뛰어나갔다.
“서야!”
엽학문도 더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도 장원 급제를 한 사람이 정말로 그 재수 없는 손녀사위가 맞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허서를 쫓아간다는 구실로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허서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엽연채는 자신을 시골 출신 촌뜨기에 첩실이 달고 온 의붓자식이라고 모욕했다.
그러나 괜찮았다. 자신 또한 그녀를 비웃어 주었으니까.
‘후부의 적장녀임에도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그 주제에 어디서 오만방자하게 구느냐고, 뭐 잘났다고 사람을 업신여기느냐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젠…….’
허서는 불만을 가득 품고 단숨에 송화 골목을 빠져나갔다. 합격자 명단은 그 근처에도 붙어 있었다. 동대가 또한 중심가이기 때문에 합격자 명단이 한 요릿집의 외벽에 붙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으로 몰려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허서가 사람들을 홱 밀치며 비집고 들어가 보니 명단에는 정말로 주운환이 장원 급제자로 적혀 있었다. 허서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분노로 뜨겁게 들끓던 마음이 담담하게 가라앉더니 차갑고 음산하게 식어 버렸다.
“아이고, 이게…….”
엽학문 또한 자신의 신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명단에 정말로 자신의 손녀사위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게 되자 엽학문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손녀가 득세한 꼴은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또 한편으론 조금 설레기도 했다. 어쨌든 자신의 손녀사위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니 또 마음이 씁쓸하고 유감스러울 따름이었다.
‘왜 손자가 아닌 손녀사위란 말인가! 에잇!’
명단을 본 허서는 고개를 숙인 채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나 그와 달리 엽학문은 떠나기가 아쉬웠는지 명단을 계속해서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지 않으면 이름이 도망가기라도 하는 양 말이다.
허서가 영존거로 돌아오자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참나, 눈이 삐어도 한참 삔 게지. 왜 하필 연채의 부군을 합격시킨 거지? 연채 그 녀석이 지금쯤 얼마나 잘난 체를 하고 있을까! 코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거 아냐?”
“형님, 저희는 남을 포용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허서가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은정랑도 억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도량도 참 넓네요. 하지만 연채는 전부터 정랑과 허서를 업신여겨 왔고 아버지마저 감옥살이를 하게 만들었어요. 이젠 그 아이의 부군이 장원 급제를 했잖아요! 내일 전시를 보면 성적이 아무리 나빠도 어쨌든 진사는 될 텐데, 또 얼마나 있는 힘껏 정랑과 허서를 핍박하고 괴롭히려 하겠어요!”
엽균은 그리 말하며 미간을 짓이겼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연채뿐만 아니라 어머니마저도 이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려 할 텐데…….’
엽균은 그런 생각을 하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은 온씨의 아들이니 그녀의 잘못을 입 밖으로 꺼내기는 마땅치 않았다.
“서야, 너……. 에휴…….”
엽균은 어떻게 그를 위로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허서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매부가 몇 등을 하는지 보러 가야겠어요. 어쩌면 그 사람이 거리에서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허허.”
자신이 이런 문턱 하나 못 넘겠는가? 이런 일, 이런 타격쯤 못 받아들이겠는가? 받아들일 수 있고 기를 쓰고 마주할 것이다. 마주하기 싫은 일일수록 마주해야만 했다. 이 모든 고난이 자신이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돼 줄 테니까.
“서의 말이 옳다. 올해 장원은 그 녀석이지만 다음 장원은 너일 것이다.”
엽학문이 안으로 들어오며 허서를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항탁으로 걸어오더니 자리에 앉지는 않고 다소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으로 그에게 위로의 말을 재차 건넨 뒤 작별을 고했다.
“출타한 지 시간이 꽤 지났고 집안에 일도 있으니 이만 가 봐야겠구나.”
“그럼 제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릴게요.”
허서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다. 너는 푹 쉬고 있거라.”
엽학문은 그를 말린 후 유이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
상황을 지켜보던 엽균도 다시금 허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사실 그는 이럴 때 어떤 말이 적절한지 잘 몰랐다. 차라리 허서가 혼자 조용히 있게 해 주는 편이 더 나을 성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도 이내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 * *
그 시각, 정국백부.
엽연채는 읽다 읽다 손에 힘이 빠질 정도로 많은 축하 서찰을 받았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성대한 연회를 열지 않았고 방문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내일 바로 전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한다고 집으로 몰려오면 내일 볼 전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정말로 축하하고 싶더라도 전시와 천자가 과거 시험 합격자들을 위해 베푸는 연회가 끝난 후에 해야 했다. 그래서 가문마다 사람을 통해 서찰을 보냄으로써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이건 추씨 가문에서 보낸 축하 서찰이고, 이건 온씨 가문에서 보낸 축하 서찰이네. 이건 장국후부에서 보낸 거고. 엥? 이건 어느 가문에서 보낸 걸까?”
추길은 갖가지 양식의 축하 서찰을 득의양양하게 세어 보다가 ‘아’ 소리를 냈다.
“아, 오씨 가문 일곱째 아가씨의 시댁에서 보낸 것 같네. 이분은 둘째 아가씨 쪽에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나?”
“작년 유월에 혼례식을 올렸던 것 같은데.”
혜연의 대꾸에 추길은 콧방귀를 뀌었다.
“전에는 우리 아가씨랑 사이가 정말 좋았잖아. 근데 아가씨가 주씨 가문으로 시집온 후로는 연락 한 통 안 하더라. 작년에 자기 혼례식을 올릴 때도 아가씨를 초대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셋째 공자께서 장원 급제하니 뻔뻔하게도 축하 서찰을 보냈네. 이건 빼도 되지 않을까?”
“됐어.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서찰에 답장이나 하자!”
혜연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때, 주 백야의 시동인 대복이 궁명헌으로 들어오더니 문 앞에 서서 말했다.
“혜연아, 주 백야께서 금옥루金玉樓에 예약을 하셨으니 어서 정안후부로 가서 내일 함께 거리 행진을 구경하자고 전달하고 오렴.”
이전까지 주씨 집안사람들은 장원 급제자를 포함한 진사들이 거리 행진을 하는 모습을 보러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주운환이 거리 행진을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당연히 보러 가야 했다.
추길은 곧장 마차를 타고 정안후부에 가서 온씨 등에게 이를 알렸다.
* * *
날씨가 청명한 삼월 초이튿날, 이날은 바로 춘시 합격자 명단이 공포된 이튿날이자 전시가 있는 날이었다.
진시辰時(오전 7시~9시) 정각이 되자 춘시 합격자들은 시위의 안내를 받으며 잇달아 궁 안으로 들어갔다.
장명가는 대제의 수도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며, 황궁 입구에서 바로 성문까지 연결되는 곧고 널찍한 길이었다. 매년 외국에서 사신이 방문하거나 대군大軍이 회군하여 조정으로 돌아올 때 이 길을 통해 왔고, 매년 삼갑三甲에 든 진사들이 거리 행진을 하는 곳도 바로 이 길이었다.
장명가는 황궁의 대문에서 바로 성문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도성 서쪽을 감싸고 돌아 도성 동쪽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 백야가 자리를 예약한 ‘금옥루’는 장명가에서도 황궁에 인접한 장소에 위치했다. 이 금옥루 2층 대당大堂의 남쪽에는 창문들이 줄지어 있어 장명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 백야는 창가의 커다란 탁자 세 개를 예약했는데, 원래 이때 이 자리를 예약하려면 큰돈이 들었지만 금옥루의 주인은 주 백야가 바로 올해 장원 급제자의 아버지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주 기뻐하며 공짜로 자리를 내주었다. 더군다나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얼마든지 편하게 주문하라고 선심도 썼다.
주 백야는 오랜 세월 무능한 사람으로 살아 왔는데, 이렇게 깍듯한 대우와 존중을 받자 기가 한껏 살았다.
이날 아침, 주운환이 궁 안으로 들어간 후 주 백야는 가족들을 데리고 금옥루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온 사람이라곤 엽연채, 강심설, 주비양 그리고 주묘서, 주묘화뿐이었다.
엽연채는 2층으로 올라가더니 이내 냉소를 지었다. 대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 가족이 앉아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엽승덕과 은정랑 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