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진씨와 강심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진씨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그럴 리가?”
주운환은 서자에 불과했다. 거인이 된 것만 해도 이미 횡재를 한 셈인데, 어떻게 진사로 합격을 했단 말인가? 비천한 서자 따위가 진사로 합격을 했단 말인가? 그럼 자신의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이 서자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이 어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강심설의 마음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신은 모든 면에서 엽연채에게 뒤졌다.
‘그런데 남편마저…….’
그나마 주비양이 적장자라는 점에 기대어 엽연채보다 한 발 앞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서자인 주운환이 진사로 합격을 한 것이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비 이낭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눈앞의 현실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종과 도련님도 떨어졌는데 셋째 도련님이 무슨 수로 붙는단 말입니까?”
“비 이낭의 둘째 공자는 거인도 되지 못했는데 진사 합격을 꿈꾼다는 말이오?”
엽연채가 비웃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주종과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엽연채의 비아냥이 그에게는 더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말 잘됐구나.”
반면, 주비양의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가 어렸다.
“그래, 정말 잘됐구나! 하늘과 조상님이 보우하셨구나!”
주 백야는 흥분한 모습으로 주운환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며 감격에 겨워했다.
“장하다, 내 아들……! 크흐흑……. 우리 주씨 가문이 드디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겠구나!”
그 말에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진씨와 다른 사람들은 분통이 터져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쩜 이리 재수 좋은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참, 몇 등을 하셨느냐?”
엽연채가 물었다.
“셋째 도련님은 장원 급제하셨어요!”
대복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장원 급제를 했구나!”
주 백야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진씨와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쾅’ 하고 굉음이 울렸고 당장이라도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원 급제라고? 저 녀석이 어떻게 장원 급제를 해?’
요행으로 거인이 되었다면 그건 운이 좋은 것이고 진사로 합격했다면 대운이 뻗쳤다고 할 수 있지만, 장원 급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장원 급제는 진짜 실력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씨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주운환을 노려봤다. 자신이 늘 업신여겨 왔던 서자가 여태껏 본인의 실력을 꽁꽁 숨겨 왔던 것이다.
‘그리해서 무엇을 하려고? 분명 큰아들의 세자 자리를 빼앗고 싶은 것이다! 이 비천한 놈이, 이 짐승만도 못한 것이!’
지금껏 숨기고 감추며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아무것도 빼앗지 않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사실 속으론 늘 세자 자리를 탐냈던 게 분명했다.
주종과는 ‘장원 급제’라는 말에 멍하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고 백 이낭은 두 눈을 반짝이며 주운환을 쳐다봤다.
‘이 집안에 개벽이 일어나겠구나!’
주운환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장원 급제면 시작이 괜찮았다. 내일 전시가 있으니 최선을 다해 엽연채의 체면을 한껏 살려 줄 것이다.
“운환아, 가자꾸나. 어서 가서 조상님께 절을 올리자꾸나. 아 참, 어서 가서 네 할머님을 뵈어야지. 이렇게 중요한 소식은 네가 직접 가서 할머님께 알려 드려야 한다.”
주 백야는 그리 말하며 주운환을 끌고 밖으로 나갔고, 엽연채는 밝게 웃으며 그들을 따라 사당으로 갔다. 그러나 주 백야는 사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위패 몇 개가 땅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바람이 너무 세구나.”
주 백야는 얼른 위패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때, 바람이 또 불어오더니 위에 놓인 위패 하나가 ‘탁’ 소리를 내며 떨어져 주 백야를 찧었다. 그 바람에 주 백야는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주운환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실룩댔다.
‘흠, 조상님이 노하셨구나!’
주 백야도 내심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대대로 영웅을 배출한 어엿한 장수 가문이 지금 무인의 길을 버리고 문인의 길을 걸으려고 하자 조상님들이 분명 크게 노한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절을 올린 다음 곧장 사당을 떠났다. 가모家母를 뵈러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주 백야는 그저 주운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리 말했다.
“전시 결과가 나오면 그때 할머님을 뵙자꾸나.”
주씨 가문뿐만 아니라 장씨 가문과 송화 골목 쪽도 소식을 기다렸다.
장찬, 장굉, 맹씨 그리고 장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만만은 뜨뜻미지근한 얼굴로 한쪽에 앉아 있으며 엽이채는 남산만 한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 지 이제 열 달이 됐으니 해산날이 곧이었다.
“왜 아직도 안 오는 걸까?”
손씨는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엽승신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엽영은 훌쩍 들이마시면 또 흘러내리는 콧물과 씨름을 하며 과일을 먹고 있었다.
이때, 하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큰도련님께서……!”
“어찌 됐느냐?”
손씨는 그의 낯빛을 보더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큰도련님께서 낙방하셨습니다.”
하인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손씨가 대번에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꼼꼼히 찾은 것이 맞느냐?”
“똑바로 본 것이냐?”
장박원 역시 급히 물으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시험 문제 하나하나에 제대로 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꼼꼼히 찾아봤지만 도련님의 이름은 정말로 없었습니다.”
하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장박원을 쳐다봤다.
“저, 저 혼자만 명단을 본 게 아닙니다. 산자와 다른 하인들도 함께 봤습니다. 네 명이 여덟 개의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잘못 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정 못 미더우시다면 제가 지금 그 애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고, 장박원은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흥!”
상석에 앉아 있던 장찬은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장만만은 눈에는 비웃음을 띤 채 다소곳이 차를 마셨다.
“상관없다. 다음번에 또 보면 된다.”
맹씨가 얼른 장박원을 위로했다.
“넌 아직 어리니 연습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말이 맞소. 다음에 또 보면 된다!”
장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떨어진 게 어찌 보면 더 좋은 일이다. 넌 아직 미숙하니 가까스로 붙었다 해도 그저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했을 게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제대로 준비해 다음번에 더 높은 등수로 붙는 게 낫다.”
“예.”
장박원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한 번에 붙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붙더라도 등수가 잘 나오기 어렵고요.”
이때, 아까 그 하인이 함께 합격자 명단을 봤던 다른 세 명을 데리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손씨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로 없었단 말이냐? 확실히 본 게 맞느냐?”
아까의 하인이 쭈뼛거리며 답했다.
“사돈 마님, 저희 네 명이 여덟 개의 눈으로 봤으니 잘못 봤을 리가 없습니다.”
손씨는 그제야 그 말을 믿고는 의자에 앉아 장박원에게 말을 건넸다.
“다음번도 있으니 더 노력하면 된다. 이번은 그저 연습이었던 것이다.”
장박원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은 엽이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배를 받치고 있는 그녀의 낯빛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주운환은? 분명 떨어졌겠지! 절대로 붙었을 리가 없어!’
장박원이 떨어졌는데 주운환이 붙으면 자신의 체면은 뭐가 되겠는가? 분명 엽연채 그 빌어먹을 계집애에게 실컷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앞으로 어찌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엽이채는 주운환의 결과를 묻고 싶어 조그만 입을 벌렸지만, 감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엽영이 양쪽 콧구멍에서 흘러내린 콧물을 훌쩍거리며 물었다.
“듣자 하니 큰매형도 시험을 보셨다고 하던데 큰매형은 붙으셨느냐?”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 순간 아무도 반응을 하지 못했다. ‘큰매형’이 누구인가? 주씨 가문과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는데, 언제 누가 이렇게 친근한 호칭으로 주운환을 불렀겠는가.
얼이 빠져 있던 사람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엽영이 언급한 사람은 엽연채의 남편인 주운환이었다.
“그… 주씨 성을 가진 분 말씀하는 겁니까?”
그 말을 들은 하인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씨 가문 셋째 공자이신 주운환 공자 말이죠?”
“어머니, 큰매형의 성함이 저게 맞죠?”
엽영이 어수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손씨는 그를 쏘아보았다.
‘말끝마다 큰매형, 큰매형. 뭣 하러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냐는 말이다!’
엽이채는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고 장박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한 눈빛으로 엽영을 쳐다봤다.
‘안 붙었겠지? 그럴 리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암, 그럴 리가 없지!’
“그분은 붙으셨어요!”
그러나 하인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장박원의 낯빛은 확 변했고 엽이채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배를 꽉 움켜잡았다. 별안간 배에서 쿡쿡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어떻게 붙었다는 말이냐? 잘못 본 게 아니냐?”
손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잘못 본 게 아닙니다.”
하인은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저희 네 명이 여덟 개의 눈으로 봤는데 어떻게 잘못 볼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눈에 띄는데…….”
장굉과 맹씨는 낯빛이 어두웠다. 엽이채가 혼사를 가로채 혼인 상대가 바뀌는 바람에 지금껏 주씨 가문과 남몰래 경쟁을 해 왔다. 장박원이 낙방했으니 당연히 주운환도 낙방했어야 했다.
장박원은 잘생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가슴속에 울분이 쌓여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장굉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럴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주씨 가문 공자가… 박원이보다 몇 살 어리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운이 좋다니! 하하하!”
“그러게요! 대단하네요! 하하, 하…….”
맹씨는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지만 ‘하하’ 따라 웃으며 대범한 척 그를 칭찬했다. 그러고는 말머리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는 몇 등을 했느냐? 가까스로 합격해 내일 전시를 봐서 동진사로 합격한다면… 안 붙은 편이 나을 게다. 차라리 다음번에 시험을 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낫지.”
심지어 그녀의 말투에선 뜻밖에도 동정심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이 말에 하인의 낯빛이 확 변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룬다 해도 어차피 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주 공자께서는… 장원 급제하셨습니다. 일등으로 붙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