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39화 (239/858)

제239화

“어……?”

엽연채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벌써 날이 밝은 게냐?”

방금 막 잠이 들었던 것 같아 엽연채는 의아해했다.

“아니요……. 아직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도 안 됐어요.”

혜연의 대꾸에 엽연채는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

“고모가 왜 한밤중에 날 찾아온 거니?”

“모르겠어요. 영교 아가씨는 지금 서쪽 측문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혜연이 답하는 동안, 벌써 자리에서 일어난 엽연채는 옷을 대충 챙겨 입은 다음 소매 없는 외투를 걸치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

서쪽 측문으로 나가 보니 정말로 엽영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집에서 입는 일상복을 입은 그녀는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를 걸친 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고모, 밤늦게 무슨 일이에요?”

엽영교가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외갓집 사람들이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갔잖아. 우린 묘씨 가문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지는 않더라도 장례는 제대로 치러서 오라버니의 영혼을 떠나보낼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아무리 소란을 피웠을지언정… 우리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부조금을 보내셨어.

그런데 전 마마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그쪽에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하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바로 이런 생각이 들더라. 묘씨 가문 사람들이 창피하다고 시신을 대충 묻어 버릴 계획이란 생각 말이야. 그래서 내가 나중에 가서 제대로 제사를 지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런데 해시亥時(밤 9시~11시)쯤 됐을 때 묘씨 가문의 어린 여종 하나가 몰래 나를 찾아와서 말해 주기를, 묘씨 가문 사람들이 오라버니를 성 밖의 어딘지도 모를 곳에 버렸다고 하는 거야. 그렇게 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니.”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귓전에 엽영교의 흐느끼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봤자 시간이 이리 늦었으니 분명 나서려고 하지 않으실 거야. 설령 나서 주신다더라도 아마 내일은 되어야겠지. 하지만… 밖에 들짐승들이 얼마나 많은데……. 난 마음이 급해서 몰래 빠져나왔어…….”

“여기는 어떻게 온 거예요?”

엽연채는 그녀의 더러워진 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차를 안 탄 거예요?”

“집안 마차를 부를 수는 없었어. 그리고 이미 날이 저물어 말과 마차를 빌려주는 상점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고. 그래서 걸어서 올 수밖에 없었어.”

“가요, 고모. 지금 바로 출발해요.”

엽영교의 대꾸에 엽연채는 고개를 돌려 혜연에게 분부했다.

“가서 부군을 모셔오너라.”

그런데 혜연이 돌아서기도 전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주운환이 찬 서리를 맞고 걸어오고 있었다.

“제가 떠올랐나 보군요.”

“한밤중이라 성문이 닫혔잖아요.”

엽연채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자신이 열쇠라는 건가? 하긴, 자신에겐 양왕의 친필 명령서가 있기에 언제든 성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가요!”

물론 주운환도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여한과 여양이 재빨리 서쪽 측문에 세워 놓은 두 대의 마차를 몰고 오자 그들은 마차에 오른 후 정국백부를 떠났다.

반 시진쯤 지나자 마차는 성문 밖으로 나왔다. 엽영교가 창문에 달린 발을 걷어 올리니 밖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어찌나 매섭게 부는지 눈조차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주변의 나뭇가지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귀신이 팔을 내뻗어 춤을 추는 양 공포스럽고 소름 끼쳤다.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실까?”

엽영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시신을 버릴 수 있는 곳은 한 곳밖에 없습니다……. 도성 밖에 위치한, 연고 없는 시신이 널려 있는 공동묘지예요. 여한이 그곳을 알고 있습니다.”

주운환이 무연고자들의 공동묘지라고 알려 주자 엽영교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차는 삼각을 더 달린 후, 마침내 자리에 멈춰 섰다.

엽연채와 엽영교, 주운환이 마차에서 내려 보니 주위는 온통 커다란 나무로 가득했고 은백색 달빛이 땅 위로 쏟아지고 있어 사물이 또렷하게 보였다. 주위 풍경은 그윽하고 아름다웠으나 멀리서부터 악취가 풍겨 왔다.

“부인과 고모님은 여기 계십…….”

그러나 주운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엽영교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앞으로 두 발자국을 떼자마자 엽연채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사방에 널린 시신들이었는데 반쯤 썩은 것도 있었고, 아예 백골이 된 사체도 있었다. 지금껏 엽연채는 단 한 번도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본 적이 없는 터라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엽연채의 몸을 확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대로 그 사람의 품에 안겨 버렸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려는 찰나, 주운환이 걸치고 있던 담비의 모피로 만든 두꺼운 검은색 외투가 그녀를 감쌌다. 엽연채는 그의 품에 완전히 밀착되고 말았다.

엽연채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고모가…….”

“고모님 내키는 대로 하시게 내버려 둡시다.”

그는 그리 말하며 팔뚝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감싸 안았다. 그러자 엽연채는 ‘웁’ 소리를 내며 그의 넓은 품에 안기게 되었고, 그의 몸에서 나는 옅은 연꽃 향기를 맡게 되었다.

엽연채는 조그만 얼굴을 뜨겁게 달군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여양, 여한. 너희는 가서 고모님을 돕거라.”

주운환의 명에 여양과 여한은 얼른 엽영교의 뒤를 쫓았다.

한편, 엽영교는 지금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하다니.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시신들뿐이었다. 전에는 사람 시신은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나 개의 시체만 봐도 무서워했는데, 여긴 전부 사람의 시신이었다.

그러나 무섭다 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엽영교는 제일 위에 던져져 있는 하얀색 미끈한 사람 형체를 찾아냈다. 그의 시신을 감싸고 있는 멍석은 바람이 불어 반쯤 젖혀져 있었다.

“오라버니…….”

엽영교가 달려가 보니 그가 입고 있던 새하얀 도포는 원래 흰옷이었음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오라버니,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엽영교는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앞의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드높은 기세를 보이던 흰옷의 사내, 자만심 넘치고 신선 같은 용모를 뽐내던 사내, 모든 사람을 깔보는 듯한 득의양양하고 거만하던 사내가 지금은 쓰레기처럼 이곳에 버려져 있었다.

엽영교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처럼 깔끔 떠는 사람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진 거예요……. 옷은 왜 또 이렇게 얇게 입고 있는 거예요……. 이불도 없이……. 춥지도 않아요? 흐윽, 흑…….”

그녀는 흐느끼며 자신이 걸치고 있던 소매 없는 외투를 벗어 그의 몸을 감싸 주었다.

엽연채는 엽영교의 울음소리를 듣더니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묘씨 가문 사람들은 정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둘째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아들이 갑자기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그때는 조금은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 큰아들의 관직을 얻기 위해 태자가 그에게 추악한 욕망을 품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묘기화가 그를 찾아가도록 강요했다. 묘기화의 몸을 이용해 벼슬이 높아지고 부를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몸과 마음을 바쳐 얻어온 것을 누리면서도 그를 경멸했고 그를 역겨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태자가 더 이상 묘기화를 좋아하지 않고 그를 골칫거리로 여기기 시작하자 그들은 태자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그를 정혼시켰다. 그래도 태자를 단념하지 못하는 묘기화의 모습에 놀라고 화가 난 그들은 그가 죽기 살기로 매달려 태자를 분노하게 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그들이 그를 더욱 혐오하고 경멸하게 된 까닭이었다.

이제 묘기화의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그가 집안에 말썽거리를 남기고 떠났다고만 생각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상황에서 눈곱만큼의 정마저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영교 아가씨, 이곳은 더러우니 그분이 어서 이곳에서 떠날 수 있게 해 드리죠.”

여한의 말에 엽영교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깔끔한 걸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한과 여양은 그의 시신을 마차 위로 옮겼고, 엽영교도 그를 따라 그 마차 위에 올랐다.

“이제 가요.”

주운환은 엽연채를 끌어당기며 다른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여양은 말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엽연채가 주운환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의장義庄(지방에서 또는 같은 지방 출신인 사람들이 돈을 모아 지은, 관을 안치해 두는 장소)이 있어요. 우선 묘 공자의 시신을 그곳에 안치할 겁니다.”

대답을 들은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들은 의장에 도착했다. 여한과 여양은 묘기화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여양은 이곳에 남아 그의 시신을 책임지고 지키기로 했고, 엽연채와 나머지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근처 마을로 향했다. 네 사람은 객줏집의 문을 두드려 방 두 개를 잡았고, 엽연채와 엽영교가 한 방에, 여한과 주운환이 한 방에서 잠을 청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관을 파는 상점으로 가서 품질이 좋은 관을 고른 후 묘기화에게 입힐 옷도 구입했다. 엽영교는 죽은 사람에게 어떤 옷을 입혀야 하는지 몰라 기성복 상점에서 새하얀 도포를 한 벌 구입했다. 흰 도포가 그가 생전에 가장 즐겨 입던 옷이었다.

그러곤 시체를 전문적으로 닦아 주는 일을 하는 노인을 구해 묘기화의 몸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그 후 옷을 갈아입혀 깨끗한 상태로 관 속에 누이고 땅을 구해 그 관을 묻는 것으로 장례를 마무리했다.

* * *

집에 돌아온 엽연채는 한숨 푹 자고 아침을 맞았다. 식사를 한 뒤 일상원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안으로 들어서 보니 주 백야가 실의에 빠진 얼굴로 탑상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강심설과 백 이낭도 하좌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엽연채는 문안 인사를 드리며 주 백야를 쳐다봤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주 백야는 집에 있지 않았다.

주 백야는 손사래를 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셋째 아가…….”

“예?”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휴!”

주 백야는 말을 잇지 않고 한숨만 쉬었다. 그 모습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고 그가 왜 그러는지 대충 알아챘다. 오늘이 이월 스무이레이고 모레가 삼월 초하루이니 곧 합격자 명단이 공포된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에 주운환을 보러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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