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엽학문은 그 말에 말문이 막히고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 말이지. 묘씨 가문은 생떼를 쓰고 있는 거야. 남의 집 여식을 이용해 자기 가문의 오명을 벗고 싶을 뿐인 거지.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네!”
“염치도 없어!”
비난이 연이어지자 팽씨와 묘씨 가문 사람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자신들은 엽영교를 압박해 집안의 오명을 지울 생각이었다. 엽학문 또한 태자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자신들이 이 제안을 하면 엽학문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리라 생각했는데, 엽연채가 이곳에서 자기들을 상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명을 씻기는커녕 씻으려면 할수록 더욱더 얼룩이 질 뿐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남의 집 여식을 협박까지 했다는 오명만 하나 더 추가될 상황이었다. 그러면 묘기전이 앞으로 어떻게 관리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상황 파악을 마친 묘기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린 그저 이야기만 했을 뿐이다……. 엽씨 가문에서 원치 않는다니 그럼 없던 일로 하겠다.”
말을 마친 묘기전은 팽씨 등과 함께 풀 죽은 모습으로 자리를 떴다.
묘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엽영교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엽영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엽학문은 자신이 태자를 돕지 못할 거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고 거기다 체면마저 크게 깎이게 되자 화가 나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엽연채를 나무라고 싶었지만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해 그저 고개를 돌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채 너는 왜 또 친정으로 달려온 것이냐? 너와 이채는 출가한 지 두 달도 차이가 안 나는데 이채는 얼마나 의젓하고 진중하냐. 시집간 뒤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집안에서 남편과 시부모님을 잘 보살피고 회임도 했다. 어디 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친정집으로 달려오느냐?”
“연채가 친정에 온 건 가족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묘씨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연채는 자신의 딸을 도와주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엽학문은 음산하고 냉랭한 눈빛을 띠며 그녀를 질타했다.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오! 지난번 요릿집에서 주 백야와 마주쳤는데 그분이 나한테 셋째 며느리는 어찌 된 게 이틀이 멀다 하고 친정집으로 달려가는 거냐고 물었소. 시댁은 안중에도 없는 거 아니냐고 물었단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온씨는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엽연채의 손을 꽉 쥐었다.
묘씨가 얼른 온씨 모녀를 대변해 주었다.
“그렇게 자주 온 건 아닙니다. 그리고 친정집에 이렇게나 많은 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안 보러 오겠습니까? 안 보러 왔다면 사람들이 이 아이에게 매정하다고 욕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채는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 오지 못한 거예요. 아니었으면 그 아이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엽학문은 콧방귀를 뀌더니 한마디 하고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아무튼, 별일 없으면 오지 말거라.”
창백한 온씨는 엽연채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연채야, 사위와 잘 지내거라.”
그녀는 엽학문이 무슨 소리를 한 게 걱정이 되는 게 아니라 주 백야가 엽학문에게 그렇게 불평을 했다는 게 걱정되었다. 딸은 출신도 좋고 혼수도 많이 가져갔으니 지금은 사람들이 별말 안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고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분명 듣기 거북한 말을 해댈 것이다.
그러나 엽연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하 웃을 따름이었다.
“저희 시아버님은 절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세요. 할아버지가 꾸며 내신 말씀이 분명해요.”
“얘가 참!”
온씨는 옅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미간을 콩 쥐어박았다.
“여하튼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아 참, 오늘이 며칠이지?”
“스무나흘이에요.”
곁에 있던 나씨가 대신 대답했다.
“어머, 그럼 며칠 뒤면 합격자 명단이 공포되는구나!”
온씨는 그리 말하며 빙그레 웃다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또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삼월 초하루에 합격자 명단이 공포돼요!”
이때 손씨가 대화에 끼어들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새언니, 뭘 그리 흥분하고 그래요?”
엽영교는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댔다.
“들어 보니 장박원은 향시에서 구십 몇 등밖에 못했다고 하던데.”
손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성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때 박원이는 병이 든 몸으로 시험장에 들어갔어요. 병이 나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시험에 붙었으니 능력이 있는 아이죠.”
그러자 엽영교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럼 이번에도 병이 든 몸으로 시험장에 들어간 건 아니겠죠?”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손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우리 박원이가 시험장에 들어갈 때 얼마나 정신이 맑았는데요. 그때 저도 배웅해 줬다고요! 시험장에서 나올 때는 좀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맑아 보였어요.”
“그럼 됐고요.”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험에 붙지 못했을 경우 댈 핑곗거리가 없는 셈이다.
묘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슬슬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야겠구나.”
손씨는 그 말에 우쭐거리더니 묘씨를 잡아당기며, 장박원이 시험장에 들어갈 땐 어땠고 또 시험장에서 나왔을 땐 어땠는지 등등을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시험장 밖으로 나왔을 때 미소 띤 얼굴로 시험을 잘 봤다고 말했어요.”
손씨의 이 말에 묘씨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손씨가 전에 이미 한 번 한 이야기였으나 묘씨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반복되는 이야기들을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다.
전부터 묘씨는 둘째 아들 내외와 장씨 가문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엽영교에겐 이런 일이 생겼고 자신은 친정집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 당연히 더더욱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일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갔고,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이 천천히 닫혔다. 구경하던 백성들 또한 수군거리며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흩어지자 훤칠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름 아닌 허서였다.
허서의 품위 있는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묘씨 가문과 엽씨 가문의 혼사를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었는데 모두 허탕으로 돌아갔다. 묘기화가 자결하면서 태자의 오명은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짙어졌다.
허서는 생각을 하다가 황급히 마차를 타고 태자부로 향했다. 태자부의 동쪽 측문에 도착한 그는 배첩을 건넸고, 잠시 후 그것은 이계에게 건네졌다.
이계가 배첩을 들고 서재로 들어가 보니, 태자는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표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전하.”
이계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허서가…….”
“썩 물러가라고 하거라!”
태자는 단어 하나하나를 이 사이에서 짜내듯 힘줘 말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거라.”
이계는 고개를 숙인 채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 입구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허서는 이계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
“어르신…….”
“전하께서 앞으로 다시는 전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네.”
이계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하며 경고를 덧붙였다.
“허 공자, 앞으로 전하께 들러붙으려고 하지 마시게. 안 그러면…….”
만약 어젯밤에 태자가 묘기화에게 얼굴을 한 번 내비쳤다면 묘기화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 일이 이렇게 악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묘기화가 순순히 엽영교와 혼례를 치르게 설득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건 결국 태자 자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감히 태자를 탓하겠는가.
“어쨌든 태자 전하가 어질고 너그러우신 분이라 자네 목숨은 살려 주셨으니, 자네는 앞으로 알아서 처신하시게나.”
이계는 콧방귀를 뀌고는 그곳을 떠났다.
허서는 단단히 잠긴 측문을 쳐다보며 이 상황이 아주 탐탁지 않은 듯 이를 꽉 깨물었다.
“어라, 허 공자 아니신가? 왜 이곳에 서 있으시오?”
이때,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스물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사내가 그의 곁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단출한 회색 도포를 입은 그는 외양도 평범했는데, 다름 아닌 송초였다.
송초는 앞으로 걸어오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네 때문에 태자 전하의 평판이 더욱 엉망이 되어 버렸네. 하나 전하는 그저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으셨을 뿐이네. 게다가 덕행 같은 건 일국의 태자에게 있어선 정말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 전하께서 전부터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너무 확대해석 된 것뿐이네.”
허서의 얼굴은 분노와 증오로 파르르 떨렸다. 지난번에 송초가 태자에게 자중하고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던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런데 자신은 고집을 부리며 의견을 밀고 나갔고,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다.
송초가 이어서 말했다.
“허 공자, 걱정 마시게. 대제의 국경과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한 장군들과 조정의 핵심 관료들이 모두 전하의 사람이네. 시간이 좀 지나면 이 일은 잠잠해질 거고, 태자 전하는 여전히 위엄 있고 근사한 태자 전하이실 거라네.”
그렇다. 태자는 여전히 태자이겠지만 허서는 태자에게 들러붙을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송초는 허허 웃더니 쥘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곳을 떠났다. 허서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화가 나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독하고 모진 마음을 먹었다.
‘일개 모사 주제에 우쭐거리는 꼴 하고는! 내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정안후부로 입적되면 어디 두고 보자꾸나!’
다행히도 지난번 태자에게 도움을 구했던 일은 이미 잘 처리가 되었으니 합격자 명단만 공포되면 그는 위풍당당하게 정안후부로 들어가 적자로 입적될 것이다. 태자라는 거목巨木을 잃었으니 자신은 이제 정안후부로 입적되는 일에 더더욱 끈질기게 매달려야만 했다.
* * *
한편, 엽연채는 온씨의 처소에서 잠깐 머무르다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집으로 돌아왔다. 엽학문이 내뱉었던 말이 확실히 듣기 거북하긴 했기에 온씨는 엽연채에게 당분간 가급적이면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집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 엽연채가 깊게 잠이 들어 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를 깨웠다. 엽연채가 눈을 떠 보니 혜연이었다.
“아가씨.”
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교 아가씨께서 아가씨를 보러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