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37화 (237/858)

제237화

그 시각 정안후부.

얼마 후면 해산을 하는 엽이채를 제외한 집안사람들 모두 저택에 모여 있었다. 온씨도 소식을 듣고 황급히 추씨 가문에서 돌아와 안녕당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엽영교는 완전히 넋이 나간 듯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그곳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마지막으로 묘기화가 자신을 만났을 때 했던 모든 말, 특히 엽영교에게 미안하고 그녀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목숨을 끊은 까닭에는 태자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정신과 기력을 모두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엽영교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는 여전히 꿈속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목숨을 끊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묘기화는 분명 절명함으로써 태자를 도울 수 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뭇사람들의 입방아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생각하게 하고, 동시에 엽영교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억지로 그에게 시집올 필요가 없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바로 군중의 생각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명 양왕이 주도한 거겠지?’

묘기화는 이 일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 하긴, 그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면 태자에게 속아 이렇게 탈탈 털리는 지경까지 왔겠는가.

“흑, 흐윽…….”

묘씨는 눈물을 닦으며 울고 있었다. 어쨌든 묘기화는 그녀의 친조카였다. 더군다나 지금껏 사위로 생각하고 대해 왔으니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묘씨는 비애 속에서도 안도감을 더욱 크게 느꼈다. 자신의 딸이 마침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이었다. 딸을 희생할 필요도 없고 단수에게 시집보내 체면을 깎일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자신의 가문이 공을 세울 기회를 잃게 되는 게 문제였다.

“나리, 밖에… 묘씨 가문 사람들이 와 계십니다.”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사람들이 이곳에는 왜 온 거죠?”

손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새파란 얼굴로 말했다.

“이제 막 장례를 치렀을 텐데, 사람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남의 집에 찾아온단 말입니까! 이건 저희 가문에 불운을 끌고 오는 행동이 아닙니까?”

“저희도 그런 상식은 알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그분들을 안으로 들이겠습니까? 한데 그분들이… 갈 생각을 안 하세요. 지금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돈 마님을 비롯해 묘씨 가문 분들이 밖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세요. 주인마님, 마님께서 어서 나가 보시지요!”

여종의 말에 묘씨는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들이 또 수작을 부리려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묘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고 엽학문과 온씨 등도 그녀를 따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엽영교를 부축하며 위로했다.

“고모, 괜찮아요? 정 힘들면 처소로 돌아가 쉬세요.”

하얗게 질린 엽영교는 엽연채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괜찮다. 우리도 나가서 보자꾸나. 더 이상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동안 엽영교는 처소에 갇혀 있다가 이제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간에 이렇게나 많은 일이 일어났으며 하마터면 자신이 또 그에게 시집갈 뻔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 묘기화는 죽고 없었다.

엽연채는 엽영교를 부축해 서둘러 대문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팽씨, 황씨, 묘기전 그리고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셋째 공자 묘기담이 그곳에서 울고 있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에서 묘기화가 실족사한 후 팽씨는 지금처럼 정안후부로 달려와 엽영교에게 묘기화를 위해 과부로 수절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똑똑히 알게 되었다. 팽씨가 그렇게 묘기화를 사랑하고 아꼈는가?

전생에서 팽씨가 그리했던 건 그저 묘기화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윤강부의 바지가 벗겨졌기 때문이었다. 묘기화가 실족사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다고 말했으나 소수의 사람들은 그와 윤강부의 관계가 애매하다며 태자까지 언급했었다.

이에 묘씨 가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묘기화와 정혼녀의 애정이 깊으며 그가 단수가 아님을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정안후부로 달려와 엽영교에게 평생 혼자 지내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생에선 묘기화와 태자의 소문이 곳곳에 퍼져 시끌시끌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묘씨 가문에서 엽영교에게 수절하라고 강요할 생각이 분명했다. 사람들에게 두 남녀의 애정이 깊다는 걸 보여 주면 오명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더라도 조금은 떨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숙모님, 이런 때에 집으로 돌아가셔서 기화의 장례식을 준비하지 않고 이곳에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온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먼저 운을 뗐다.

“우리는…….”

팽씨는 어두운 낯빛으로 이를 악물었다.

엽연채는 싸늘한 냉소가 어린 두 눈을 번뜩였다. 저들은 전생에선 엽영교가 묘기화를 불러냈으니 실족사의 책임도 그녀에게 있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데, 이번 생에선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이제 무슨 낯짝으로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곧 있으면 둘째 도련님과 영교 아가씨의 혼례식인데 며칠 남겨 두고 이렇게 가 버리셨네요.”

황씨가 팽씨 대신 나섰다.

“솔직히 말해… 영교 아가씨가 작년에 거듭 소란을 일으켜 혼례식을 지금까지 미루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습니다. 저희 둘째 도련님이 바깥에서 떠도는 악의적인 소문을 못 견디고 자결하셨을 일도 없었겠죠.”

“그 말이 맞다……! 가여운 내 아들!”

팽씨가 울부짖었다.

“영교 너는 원래대로라면 기화의 처가 됐을 몸이다! 다 네가 초래한 일이야……! 우리가 너를 순장殉葬하지는 않겠다만 넌 우리 묘씨 가문의 며느리다! 그러니 우리 가문으로 들어오지는 않더라도 기화를 위해 수절해야 한다!”

묘기전이 엽학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고모부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정안후부 대문 앞은 이미 백성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최근 큰일이 벌어졌으니 사람들은 묘씨 가문에 관한 일이라면 득달같이 모여들었다.

어엿한 두베 공자가, 그 신선 같아 보이던 인물이, 대제를 대표해 금 연주 대결에 나서 북연을 꺾어 놨던 놀라운 재주를 가진 멋진 사내가 단수이며 심지어 받아들이는 역할을 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묘기화는 회방루에서 목을 매어 자진했으나 묘씨 가문은 그가 단수가 아니라고 박박 우기며 소문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오후에 또 다른 부분이 밝혀지며 백성들은 그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묘기화가 자신의 마음을 저버린 태자 때문에 생을 마감한 것이라고들 더욱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죽고도 이리 시끄러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혼녀에게 그를 위해 과부로 수절하라고 요구한다니.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묘씨는 팽씨의 말을 듣고 안색이 확 변했고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게…….”

엽학문은 눈알을 굴리다가 두 눈을 번뜩였다. 밖에는 태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묘씨 가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엽영교를 이용해 묘기화와 태자의 평판을 회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었다.

“할머님, 묘 공자가 목숨을 끊었는데 그 이유는 할머님 식구분들도 똑똑히 아실 겁니다. 묘 공자에게 마지막 남은 그 조금의 체면마저 지켜 주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묘 공자가 편하게 떠날 수 있게 해 주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엽연채가 싸늘한 목소리로 따져 묻자 팽씨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되레 성을 내며 대꾸했다.

“지금 이유라고 했느냐? 밖에서 떠도는 소문이 내 아들이 죽은 이유다! 헛소리가 기화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영교가 혼례식 날짜를 바꾸자고 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고!”

“묘씨 가문 분들이 무슨 낯으로 저희 고모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건지 정말 알고 싶네요?”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뗐다.

“저희 고모가 혼례식 날짜를 바꾸는 바람에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어째서 제일 처음 혼례식 날짜를 바꾸고 싶어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생각을 안 하시는 거죠? 바로 묘 공자이잖아요!”

전에도 혼례식 날짜를 바꿨다? 묘기화가 혼사를 원치 않아 바꿨다는 건가? 백성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에 집중했다. 이 이야기는 아무도 들은 적이 없었다.

엽연채의 말에 묘씨 가문 사람들은 안색이 확 변했다.

“작년에 묘 공자가 저희 고모에게 할머니께 혼사를 내년으로 미루고 싶다고 이야기해 달라고 했죠. 풍경을 보러 변경 지역으로 가야 한다면서 말이죠. 그러는 바람에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묘 공자가 가고 싶다고 하시니 저희 가문에선 그분의 뜻에 따라 주었죠. 그런데 그렇게 시간을 드렸는데도 그분은 가지 않고 여기 계속 머무르셨고요.”

이어진 엽연채의 말에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깜짝 놀랐다. 그런 일도 있었다는 말인가?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 중 한 사람이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쯧쯧, 변경 지역에 가서 풍경을 볼지언정 혼례식을 올리고 싶지는 않다? 이건 뭐… 정이 보통 깊은 게 아니네!”

“본인이 혼인을 원치 않아 지금까지 미룬 거네……. 단수였던 게지! 사내를 좋아하고 있으니 당연히 혼례식을 올리고 싶지 않았을 거고.”

“맞아.”

이렇게 이야기가 오가니 묘기화가 단수라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지는 셈이었다. 팽씨는 화가 치밀어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연채야!”

이때,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말썽 일으키지 말거라.”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금 묘씨 가문은 태자의 오점을 씻어 주려고 나선 것이었다. 소용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할아버지, 제가 뭘 잘못 말한 거죠?”

엽연채는 자신은 무고하다는 얼굴로 그를 직시하며 물었다.

“지금 저분들은 고모에게 과부로 수절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설마 고모를 저분들에게 보내시려는 건 아니겠죠? 할아버지는 여식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시던 분이 아니셨어요?”

“그러게 말이야!”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고 그중 체격이 큰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 아버지는 대체 왜 저러는 거요? 그 사람이 단수인지 아닌지는 일단 둘째 치고 그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목을 매어 자진한 거잖소. 그러니 저 아가씨야말로 피해자이지!

정혼자가 까닭 없이 세상을 떠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가여운 처지인데, 묘씨 가문 사람들은 이 아가씨를 위로하고 마음을 달래기는커녕 과부로 수절을 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내 여식이었으면 난 벌써 한바탕 싸움을 벌였을 거요. 어떻게 자기 여식을 위해 나서 준 손녀에게 호통을 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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