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묘 공자?”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묘기화는 헛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난 말이다, 영교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소용도 없었단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이기적이었던 게지. 그래서 그 아이에게 거듭 피해를 주고 말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넌 이만 돌아가 보거라.”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공자는 안 가세요?”
“난… 이곳에 좀 더 있으련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엽연채는 안타까워했다. 이곳은 묘기화가 태자에게 공연을 보여 주기 위해 구입한 곳이니… 그의 정성과 마음이 담뿍 깃든 곳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곳에 푹 빠져 스스로 헤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는 척하는 사람은 영원히 깰 수 없다는 것을 엽연채는 알고 있었다.
“네.”
엽연채는 가볍게 대꾸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녀가 돌아서서 문 입구로 걸어가자 뒤에서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자시가 지났구나. 역시 안 오시려는 모양이다……. 그분은 날 속인 적이 없으시겠지?”
그 말에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 생각은 어떠신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묘기화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녀는 이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공연장은 그의 마음처럼 다시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쥐 죽은 듯 적막감이 감돌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엽연채는 곧장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동안 그녀는 엽영교 일을 생각했다.
방금 전 묘기화가 사과의 말을 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파혼 이야기를 꺼낼까? 아니, 태자를 향한 집착과 후회하지 않는 태도를 봐선 그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성싶었다. 게다가 묘씨 가문도 파혼을 원치 않았다.
엽연채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축시丑時(새벽 1시~3시) 삼각이었다. 그녀는 침상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단장을 마친 후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식사를 반쯤 했을 무렵, 갑자기 창백하게 질린 경인이 안으로 뛰어 들어와 고했다.
“아가씨, 저희가 어제 묘 공자를 뵈러 가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묘 공자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회방루 대문 앞에 목을 맨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경인의 말에 엽연채는 안색이 확 변해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밖으로 서둘러 뛰어나갔다.
그녀가 회방루에 도착해 보니 주변은 이미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모두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이곳에서 목을 매고 죽다니 말이야?”
“그 묘 공자 같은데! 태자 전하와 남색을 했다는 그 사람 말이야!”
“엽씨 가문 소저와 혼인을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곳에서 목을 매고 죽은 거야?”
엽연채는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고 추길과 경인은 얼른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가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땅바닥에 누워 있는 묘기화의 모습이 보였다.
묘기화는 새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다. 신선이 입는 옷처럼 새하얗고 멋스러운 도포였으나, 땅바닥에 눕혔기 때문인지 여기저기 지저분한 흙먼지 따위가 묻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수려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에서는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새까만 머리칼은 흙탕물이 잔뜩 묻어 땅 위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었다. 그 지저분한 모습에서는 신선 같은 풍채를 뽐내던 두베 공자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엽연채는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묘 공자…….”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내,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대체 왜!!”
엽연채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보니 팽씨, 묘기전, 황씨 등이 허둥대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얼른 길을 내주었고 팽씨는 묘기화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그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아들이 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냐!!”
주위에는 여전히 그와 태자 사이의 일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황씨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주위를 향해 삿대질하며 울부짖었다.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소문이란 게 참으로 무섭구나! 우리 둘째 도련님은 네놈들이 주는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하신 게다!!”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우리 기화의 비참한 모습을 보아라! 다 너희들이 못살게 굴어 목숨을 끊은 게다!!”
팽씨도 눈물을 흘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구경꾼들을 힐난했다.
“요 며칠 동안 기화는 집에서 괴로워했다. 밖에서 떠도는 소문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며 줄곧 고통스러워했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백성들은 하나같이 낯빛이 하얗게 변했고 자신들도 모르게 코를 만지작거렸다.
“기화야, 어째서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난 것이냐…….”
팽씨는 엉엉 울며 비통해했다.
연기 삼매경인 묘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던 엽연채의 눈빛이 싸늘하고 어둡게 변했다.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게 그리 안타깝고 아들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다면 왜 이제서야 오셨어요? 전 이곳에서 먼 도성 북쪽에 사는데도 벌써 도착했는데, 묘씨 가문 분들은 가까이 사는데도 어째서 이제야 오신 거죠?”
그 말에 팽씨와 황씨의 낯빛이 확 변했다.
그들은 묘기화가 자진했다는 소식을 이른 아침에 들었다. 그러나 시체를 수습하기 전, 집에서 대책을 상의하느라 출발이 늦어진 것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오려고 하는데 마차가 미끄러졌단다.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구나. 먼 길을 돌아서 왔는데……. 분명 둘째 도련님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셨던 게지. 우리가 마음 아파할 테니 이곳에 못 오게 하려고 하셨던 게다.”
황씨는 그저 이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갑시다. 어머니, 저희는 둘째 도련님을 데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묘기전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에 묘씨 가문 하인들이 멍석을 들고 와 바닥에 깐 다음 묘기화를 들어 그 위로 옮겼다. 그러곤 그의 시신을 둘둘 감아 밖으로 들고 나갔다. 하인들이 시신을 밖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 안으로 집어넣자 묘씨 가문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설마 정말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못 이겨… 저런 선택을…….”
엽연채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낯빛으로 마차에 오르더니 곧장 정안후부로 향했다.
* * *
그 시각 태자부.
태자도 묘기화가 목을 매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묘씨 가문이 발 빠르게 대응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쪽에서 사람들이 함부로 입방아를 찧어 묘기화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힐난했고, 이에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백성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고 했다.
태자는 기다란 녹나무 책상 앞에 서서 손으로 책상을 치며 하하 웃었다.
“잘됐구나! 잘 죽었어!”
그러고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또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근데 묘 공자가 왜 하필 회방루에서 목숨을 끊은 거지?”
“집에서 죽으면 방을 더럽히게 되니 밖에서 죽은 거지! 한데 그런 거면 성 밖 나무에 목을 매면 되는데 왜 하필 회방루에서 목숨을 끊은 걸까? 그러면…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장사를 하라고?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남의 공연장에서 목숨을 끊냐는 말이야!”
“어떤 사람이 공연장 사람에게 물어보니 묘 공자가 진작에 회방루를 구입했대. 자기 공간에서 목숨을 끊은 거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건 아니지.”
“에? 공연장은 왜 구입한 거래? 그러고 보면 회방루도 참 이상해. 전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장사가 되긴 했잖아. 그래도 본격적으로 돈을 번 건 역시 <제화부용>이 나온 후부터지만.
그런데 인기가 좋다고 같은 공연을 거듭하니, 아무리 좋은 연극이라 하더라도 듣다가 다들 질려 버린 거야! 나를 포함해 다른 관객들이 이 공연은 그만하고 다른 연극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공연장 주인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누군가가 거금을 내고는 매일같이 이 연극을 공연하라고 요구했대.
결국 관객들이 모두 발길을 끊었고, 그런데도 여전히 그 연극만 공연했어. 그래서 약란 소자신을 좋아하는 한 관객이 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어.
공연장 주인이 말하길, 어떤 사람이 공연장을 구입한 후 다른 연극 말고 매일 이 연극만 공연하라고 했대. 이제 알고 보니 공연장을 구입했던 사람이 묘 공자였던 거네? 어째서 매일 이 연극만 공연하라고 한 걸까?”
“난 그 이유를 알지. 공연장 사람이 알려 준 건데 이 연극의 극본을 쓴 사람이 바로 묘 공자래. 그리고 묘 공자는 예전에는 매일같이 태자부로 가서 금을 연주했다고 해. 연극 속 부용이 매일 남주인공 집에 가서 춤을 추는 것처럼 말이야.
쯧쯧, 묘 공자가… 그분과 정을 통한 거라는 소문이 퍼졌잖아. 그러니 이 연극의 줄거리는… <제화부용> 속 등장인물은 그 자신 아니겠어? 부용은 여인이 아니라 사실 묘 공자였던 거지.”
“맞네, 맞아. 연극 속에 등장하는 높은 지위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 세자라는 사람은… 그분인 거고 부용은 묘 공자인 거지.
그런데 연극 속 평남후부 세자는 사랑에 푹 빠졌지만, 결국 가문에 대한 책임 때문에 헤어진 거잖아. 진심으로 부용을 사랑하는데도 말이야. 사람들에게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했고. 그런데 현실에서는… 계속해서 부정했잖아.”
“단수이면 단수라고 하지. 이건… 그분이 변심한 거네!”
“그럼 그분이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거잖아?”
그러자 사람들은 태자가 단수일 뿐만 아니라 변심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태자는 이 소문을 듣고 표정이 확 굳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바로 이계를 내보내 묘씨 가문에게 이 일을 수습하라고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