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허서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건 그가 계획한 묘책이었고 원래대로라면 순조롭게 흘러갔을 일이었다. 성공을 코앞에 두었으니 이제 태자 전하의 유능한 모사가 될 일만 남아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 명확히 끄집어내지는 않으셨지만, 다들 확실히 눈치챘다.”
이리 말하는 엽학문의 속내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혼사,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
그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묘기화가 단수임을 알고 있는데, 이대로 여식을 그런 녀석에게 시집보내면 자신의 체면은 뭐가 된다는 말인가?
“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으신 것뿐입니다. 이런 사소한 일이 뭐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엽승덕이 얼른 만류했다.
“저희가 지금 파혼을 하면 우물에 빠진 태자 전하께 돌을 던지는 격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허서가 이 계책을 태자 전하께 제시했는데 저희 쪽에서 파혼을 하면 앞으로 허서의 장래는 어찌합니까?”
그 말에 엽학문은 소름이 확 돋았다. 자신은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미 육십이 넘었고 3품이나 강등을 당했으니 앞으로 무슨 미래를 꿈꾸겠는가?
지금으로서는 그저 모든 희망을 손자에게 거는 수밖에 없었다. 손자가 남들보다 뛰어나 가문을 빛내며 자신이 기를 활짝 펼 수 있게 해 주기를 말이다.
분명 지금 상황에서 엽영교를 묘씨 가문에 시집보내면 정안후부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며 도성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손자를 위해서라면 웃음거리가 돼도 그만이었다. 그리하면 적어도 태자 쪽에 줄을 이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세 사람은 상의를 마친 후 각자 그곳을 떠났다.
허서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송화 골목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자부로 향했다. 그가 배첩을 건네자 잠시 후 이계가 나와 이렇게 말했다.
“허 공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허서는 속으로 대단히 기뻐했다. 지금 다사다난한 시기를 겪고 있는 태자가 자신을 만나 조언을 듣길 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신임하는 모양이었다.
이계는 허서를 데리고 들어가 태자의 서재에 도착했다. 안에는 송초도 함께 있었다. 태자는 기다란 녹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흙먼지로 뒤덮인 뿌연 하늘처럼 어두운 얼굴을 한 채였다.
허서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린 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일은 순조롭게 흘러갔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하오나 전하, 걱정 마십시오. 엽씨 가문과 묘씨 가문의 혼사는 예정대로 계속 진행될 겁니다.
그리고 어쨌든 황제 폐하께서 직접적으로 폭로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백성들도 추측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두 가문의 혼사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적어도 어느 정도 만회는 될 겁니다.”
태자는 잘생긴 얼굴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하, 소신은 적절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송초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대했다.
“이 일은 천자복환령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에게 벌을 받으라고 하셨으니 이 벌은… 받으셔야 합니다.
명문대가의 공자들 중 허물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내와 좀 노는 게 뭐 어떻단 말입니까? 그런 왕공王公과 대신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저 공개되지 않은 것뿐입니다.
공적인 일만 잘해 내시면 백성들도 자연히 다시금 태자 전하를 좋은 분이라고 칭송할 겁니다. 그러니 묘씨 가문과 엽씨 가문의 혼사는 중단하라고 하시지요!”
허서는 다른 사람의 반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입을 뗐다.
“황제 폐하께서 명확히 언급하지 않으신 건 전하께 상황을 되돌리고 평판을 회복할 여지를 남겨 주고자 그러신 겁니다. 게다가 엽씨 가문과 묘씨 가문은 이미 혼례식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파혼하겠다고 하면 상황이 잠잠해지는 게 아니라 더욱 악화될 겁니다.”
송초는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고 허서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
태자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됐다. 밖의 일은 관여하지 않겠다. 이만 나가 보거라!”
관여하지 않겠다는 건 묘씨 가문과 엽씨 가문의 혼사를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말 아닌가? 허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반면, 송초의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이건 황제가 태자에게 내린 벌이었다. 만약 태자가 고분고분 그 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 될지 몰랐다.
송초와 허서가 떠나자 태자는 바둑을 두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바둑 한판을 두는 데 한나절 이상이 걸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이때, 이계가 어두운 낯빛을 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하…….”
“무슨 일이냐?”
태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사는 됐다고 내 이미 말했다.”
“그게 아니옵고…….”
이계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매화 문양이 찍혀 있는 초대장을 꺼냈다. 태자는 그 초대장을 보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조롱 어린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또 뭘 어쩌고 싶다고 하더냐?”
“공연장에 오셔서 연극을 감상하시라고 묘 공자가 전하를 초대했습니다.”
태자는 묘기화만 생각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이 느껴졌다. 이계의 보고를 듣는 그의 눈빛은 서릿발처럼 냉랭하고 살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태자는 이성적으로 생각해 그 살의를 꾹꾹 억눌렀다.
“그자에게 알리거라. 지금 이 몸은 벽을 향해 서 있는 벌을 받고 있으니 외출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서 혼인해 아이도 낳고 잘 살라고 그자를 잘 설득하거라. 가 보거라. 그자는 달래기 쉬운 사람이 아니더냐!”
이계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서는 얼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 * *
이틀 후, 밖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 일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정안후부와 묘씨 가문의 이번 혼사는 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틀을 기다렸는데도 파혼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기미가 없었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정안후부 하인에게 물어봤더니 그는 혼사는 예정대로 진행될 거라고 답했다. 하인은 그 소문은 와전된 것이며 묘 공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엽연채는 두 가문이 아직도 파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후야께서는 그리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면서 어찌 영교 아가씨를 그분에게 시집보내신다는 거예요?”
혜연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손자가 여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보지!”
엽연채는 차갑게 대꾸했다. 허대실이 도성에 당도했다면 진작에 허서의 존재를 폭로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로선 아무 증거도 없었다. 허서와 엽승덕은 피가 잘 섞이기 때문에 적혈법 결과에는 아무도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었다.
“정말 안 되겠으면 양왕 전하를 찾아가 저들을 상대해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지.”
“아가씨.”
엽연채가 다음 수를 고민하는데, 추길이 초대장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누가 보낸 것이냐?”
엽연채가 받아 보니 한매寒梅가 바람을 맞는 문양이 찍힌 예쁜 초대장이었다. 그녀는 초대장을 열어 보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가시려고요?”
추길은 불안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녀는 방금 전에 초대장을 보아 초대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
엽연채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요? 위험해요. 그분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무서울 것 없어.”
엽연채가 옅은 한숨을 쉬며 추길을 안심시켰다.
“그분은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 * *
저녁이 되자 엽연채는 해당화가 수놓아진 검은색 상의와 치마를 입고 여우 털이 달린 진홍색 민소매 외투를 걸친 후 문을 나섰다.
난죽거를 지나치며 보니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주운환은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쁜지는 모르겠으나 계속 집을 비웠다.
엽연채는 수화문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해시亥時(밤 9시~11시)가 절반 이상 지난 터라 대로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조그만 마차가 엽연채에게 다가왔고, 마차의 양쪽에는 유리 바람막이가 달린 조그만 제등提燈(들고 다닐 수 있게 자루가 달린 등) 두 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제야 어둠 속에 불빛 한 점이 더해졌다.
조그만 마차는 적막한 대로를 지나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멈춰 섰다.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둠이 짙게 깔린 3층 높이의 공연장이 보였고, 공연장에 붙어 있는 ‘회방루’라는 글자가 적힌 편액은 깜깜한 하늘 때문에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엽연채는 안으로 들어가 희곡사로 장식된 병풍을 돌아갔다. 대당大堂에는 탁자와 의자가 가득 놓여 있으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제화부용>으로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회방루는 이제 <제화부용> 때문에 적막만이 감돌았다.
어찌나 조용한지, 엽연채가 계단을 올라가다가 넓디넓은 공간에 울리는 자기 발소리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2층에 올라와 얼마간 걸어가니 매화 귀빈실이 보였다.
귀빈실 안에는 등불이 하나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엽연채는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터라 흐릿하게나마 사물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녀를 등지고 앉아 있는 묘기화의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가 걸어가며 운을 뗐다.
“묘 공자,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묘기화는 멍한 눈빛으로 아래층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가 지나면 이튿날이 되는데 갑자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런데 누구를 불러야 할지 몰라 너를 부른 것이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묘기화는 탑상 위에 앉아 있었고 엽연채는 항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전에는 사람들마다 이 공연을 보고 칭찬 일색이었는데 나와 그분의 일이 알려진 이후론 모두들 역겹다고 말하는구나.”
그는 그리 말하며 자조하는 듯한 냉소를 지었다.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역겹다고 생각하는 건 이 연극도, 두 분의 감정도 아니에요. 제가 역겹다고 생각하는 건 공자가 찾으시는 그분이에요.”
묘기화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