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태자는 어질고 재능이 있는 인물이며 지금껏 상궤를 벗어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명성에 타격을 준 일은 단 하나였다.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났던 묘기화와의 남색설이었다.
설마 황제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걸까? 대신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그들의 시선은 잇달아 태자에게 향했다. 그러자 태자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부황이 무턱대고 죄명을 더하실 줄은……! 나를 훈계하려고 그러시는 걸까?’
태자는 억울했지만, 정선제가 천자복환령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니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의 은혜에 황공할 따름입니다. 소자… 지금 돌아가서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태자는 그리 말하며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정선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천자복환령 일은 절대로 밝혀지면 안 됐고, 그 죄목으로 태자를 벌해서도 안 됐다. 그랬다가는 온 조정이 술렁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를 벌하지 않으면 자신의 기분이 풀리지 않으니 그에게 커다란 교훈을 줘야 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용해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또 너무 티 나게 말할 수는 없어서 애매모호하게, 그 일 같지만 그 일은 아닌 것처럼 말해야 했다. 그래야 태자에게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줄 수 있었다.
“콜록콜록……!”
정선제는 또 심하게 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회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그리고 양왕은 짐을 따라오너라.”
그러더니 채결의 부축을 받아 한 걸음씩 떼며 자리를 떴다.
양왕은 수려한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깐 후 정선제가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자리를 떴다.
* * *
잠시 후. 침궁에 도착한 정선제는 침상에 누웠고 양왕은 그 곁에 놓인 수돈에 앉았다.
“아바바마, 몸은 좀 괜찮아지신 겁니까?”
“고질병이니 도리가 없구나. 약을 가져오너라!”
정선제는 기침을 연신 해 댔다.
채결이 약사발을 들고 오자 양왕은 숟가락을 들고 정선제에게 약을 떠먹여 주었다. 약 한 사발을 전부 마시고 난 후에야 정선제의 기침이 조금 멎었다.
“역시 쟁이가 제일 효자로구나. 채결아, 서재에 가서 <상교도上橋圖>를 가져오너라.”
채결은 명을 받아 밖으로 나가더니 이내 그림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양왕에게 전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전하께서 고화古畫를 좋아하시는 걸 아시고는 특별히 수집하신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전부터 전하를 가장 아끼셨죠.”
그 말에 양왕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양왕이 그림을 건네받자 정선제가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그를 물렸다.
“이제 그만 가 보거라.”
양왕은 예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정선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교도>를… 저 아이가 좋아할 것 같으냐?”
“물론입니다.”
채결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칠석에 전하께서 양신陽信 공주 마마께 모조품을 하나 그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그 사실을 아신 후 사람을 시켜 여기저기 찾아다니게 해 결국 진품을 찾아내셨죠. 폐하의 마음에 전하도 감동해 마지않으실 겁니다.”
정선제는 그제야 홀가분한 미소를 짓더니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황제의 대궐 밖으로 나온 양왕은 백옥석이 깔린 커다란 광장을 걷고 있었다. 그가 걸친 담비의 모피로 만든 소매 없는 검은색 외투가 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양왕은 붉은 입술을 천천히 추켜올렸는데, 입가에는 냉혹함이 어린 비웃음을 띠고 있었고 가늘고 긴 매력적인 눈은 싸늘한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아바마마는 항상 이러셨지. 태자에게는 응성 전체를 내주셨지만 나에게는 피서지로 쓸 별장을 내주셨고, 태자에게는 오성병마사를 전부 내주셨지만 나에게는 진귀한 골동품을 주셨다.’
오늘 일이 아바마마에게 전해졌으니 양왕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끝날 리가 있는가. 양왕의 두 눈에는 조롱 어린 써늘한 광채가 가득 감돌았다.
* * *
한편, 궁을 나선 태자는 태자부로 돌아와 벽을 보고 앉아 있었고 이 일은 삽시간에 도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요릿집에 앉아 있던 엽연채는 소식을 듣고는 냉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태자가 정산에 천자의 제터를 만들었는데 이는 크나큰 불효라고 했다. 하지만 황제는 ‘천자복환령’ 영패를 찾아내지는 못했으니 태자가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했다고 판단했으며, 지금 그를 모함한 자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태자가 제터를 짓는 불효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조사 중 태자부 안에서 부적절한 서신들이 발견되었다. 이에 황제는 그의 덕행에 문제가 있다고 태자를 꾸짖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전에 있었던 태자와 묘 공자의 소문을 떠올렸고 주위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태자가 정말로 사내와 놀아났다고 떠들어댔다.
삽시간에 사람들은 모두 태자를 경멸하기 시작했다.
그중 어떤 이가 묘기화와 엽영교의 혼사를 언급하며 엽씨 가문이 속아 넘어간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말했다. 그리고 임 국공이 방문한 건 또 어디서 흘러나온 소식인지도 알 수 없으며, 그날 사실 임 국공은 태자부를 방문해 태자를 훈계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변인들은 전부 그의 말을 듣고 모든 것을 깨우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불현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작은 부스러기 은전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원래 궁에서의 소식을 들은 후 바로 정안후부에 들릴 계획이었는데, 마음을 바꿔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 * *
마차가 서쪽 측문으로 들어서자 엽연채는 마차에서 내려 곧장 서과원으로 달려갔다. 난죽거를 지나치다 안을 보니 문이 열려 있어 그녀는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운환은 침실에서 겉옷을 벗고 있었는데 꽤나 고단해 보였다.
“공자님, 천자복환령 말이에요……. 제가 실패한 거예요?”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살짝 하얘졌다.
‘설마 그날 밤 야옹이가 실수를 한 걸까?’
“아니요. 찾아냈습니다.”
주운환은 ‘픽’ 하고 냉소를 지었다.
“그럼 왜…….”
엽연채는 규방 여인이지만 황자가 천자의 제터를 짓는 일이 불효막심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도 불효를 저지르면 대죄를 범하는 셈이니, 태자가 그랬을 경우 그 파장이 몇 배나 크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황제 폐하는 늘 이렇게 태자를 편애하셨지요.”
주운환은 조롱기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태자 전하는 황제 폐하께서 인정하신 후계자이니 태자에게 불효라는 죄명을 씌우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다. 하나 그러면서도 분을 삭이지 못해 태자의 덕행에 문제가 있다며 나무라신 것이지요.”
엽연채는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고모님과 할머님을 뵈러 안 갑니까?”
그녀가 말이 없자 주운환이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 이런 때에는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을 거예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냉소를 지었다.
엽학문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대문을 걸어 잠그고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작년 자신의 혼례식 때도 그랬다. 장손녀를 내팽개치듯 정국백부로 보내 버린 후, 장씨 가문 연회에 참석했던 손님들이 돌아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것을 두려워해 아예 대문을 닫아걸었다.
엽연채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엽학문은 대문에 빗장을 걸고 방문객들을 모조리 사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집안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묘씨가 포위를 뚫고 엽학문의 서재로 가서 울고불고 소란을 피우는 중이었다.
“나리는 그 녀석이 단수임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여식을 기어코 그런 녀석에게 시집보내려 하시는군요. 나리께서 왜 그러는지 전 알고 있습니다.”
묘씨는 그리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엽학문과 20여 년을 부부로 지내 왔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태자에게 달라붙고 싶은 것이며, 그가 황위에 오르는 데 일조하여 공을 세우고 싶은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러한 공을 세우고 싶으면 공을 세울 자본이 있어야 하기 마련. 태자는 무능력한 엽학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태자가 묘기화 일에 연루되어 있으니 그는 여식을 이용해 사람들의 입을 막아 태자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려는 것이었고, 그리함으로써 태자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묘씨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남편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악을 쓰고 난리를 칠 수는 없어 그저 애처롭게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엽학문은 묘씨의 눈물을 보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탄식했다.
“그만하면 됐구려. 울 게 뭐가 있소?”
“저에겐 여식이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안 울게 생겼습니까?”
묘씨는 좀 전보다 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금 밖에선 태자 전하와 묘기화가 동침했고 황제 폐하마저 불온한 서신을 찾아내 태자 전하의 덕행에 문제가 있다고 꾸짖으셨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리께서는 여식을 그런 녀석에게 시집보내시려는 겁니까? 그럼 우리 정안후부의 체면은 뭐가 된단 말입니까?”
“돼, 돼… 됐소! 왜 이리 시끄럽게 구는 것이오!”
엽학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손을 홱 뿌리치고 뒷짐을 진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 나리!”
묘씨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엽학문은 밖에 있던 어멈들에게 말했다.
“붙잡아라!”
그러고는 묘씨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은 이곳에 꼼짝 말고 있으시오!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말고.”
묘씨는 또다시, 이번에는 엽학문의 서재에 갇혀 버렸다.
서재 밖으로 나온 엽학문은 곧장 수화문으로 가 마차 위에 올랐다. 유이가 말채찍을 내려치자 마차는 바로 정안후부를 벗어났다. 살짝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엽학문은 치미는 짜증에 답답해했다.
마차는 잠시 후 회미천하에 도착했다. 엽학문이 2층 귀빈실로 올라가 문을 열어젖히니 허서와 엽승덕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엽승덕과 허서는 그를 보더니 얼른 앞으로 다가와 예를 올렸고, 엽학문은 손사래를 치며 그들을 일으켰다.
“태자의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이냐?”
엽학문은 이리 물으며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았다.
“…태자 전하께서 방금 전에 태자부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이런 때에 태자부에 방문해 만나 뵙기를 청하는 건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