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태자의 준수한 얼굴은 차갑고 어둡게 변했으나 눈에는 조롱하는 기색이 언뜻 비쳤다.
‘이 일은 누가 벌인 짓일까? 양왕? 아니면 용왕?’
둘 다 가능했지만, 아무래도 양왕, 이 철천지원수가 그랬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러나 누가 벌인 짓이든 간에 참으로 어리석었다.
현재 천자의 제터는 공사 중이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이 많으면 비밀이 새 나가기 쉬운 법인데,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비록 외부와 차단이 되어 있긴 하지만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여기에 천자복환령까지 발견된다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우니 그 물건은 여전히 원도대사遠度大師의 손에 있었다. 만약 진짜로 발견된다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하고 있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양왕은 여전히 침착한 태자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눈에 조롱기를 비쳤다.
이제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조회가 파했을 시간이었으나 지금 누가 감히 조정에서 나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캑캑… 캑……!”
흥분한 정선제는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황제 폐하, 돌아가서 쉬시지요!”
그의 곁에 있던 우두머리 환관인 채결이 염려를 토했다.
“좀 있으면 상관수 통령께서 돌아와 보고를 할 겁니다.”
정선제는 손사래를 치고 싶었지만 심한 기침이 멎지를 않았다. 결국 그는 채결의 부축을 받아 먼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어린 환관들이 그 뒤를 따라 정전正殿을 나갔다.
정선제 일행은 뒤편의 동난각東暖閣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노란색 용상龍床이 놓여 있었다. 몸이 허약한 정선제가 정무 중에 임시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따로 설치해 두었던 것이다.
앞쪽에 위치한 대전大殿에선 사람들이 모두 초조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형부상서 요양성과 영국후부榮國侯府의 후야는 머리를 맞대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양성은 태자비의 아버지이자 태자의 장인이었고 영국후부 후야는 태자의 외조부였다.
다른 대신들도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뭐라고 수군거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 이도 있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 있었다.
한 시진쯤 기다리자 마침내 상관수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고 그의 뒤로 몇 명의 금위군이 따라오고 있었다.
“상관수 대인…….”
자리에 있던 모든 대신들이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으나 상관수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가 뒤편에 자리한 난각에 있음을 알아차리곤 큰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그곳으로 향했다.
난각 밖을 지키던 시위는 상관수를 보더니 얼른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상관수 대인, 오셨습니까!”
손에 불자拂子를 들고 있던 채결이 얼른 앞으로 다가섰다.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뭐라도 찾아내셨습니까?”
상관수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주렴 너머로 노란색 용상이 보였는데, 보일락 말락 할 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들어오너라.”
이때, 정선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상관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채결도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주렴 너머, 정선제가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채결은 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황제 폐하, 조심하십시오.”
“폐하, 찾아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자복환령입니다!”
상관수는 그렇게 고하며 금패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뭐라?”
정선제와 채결 모두 깜짝 놀랐다. 정선제는 대로해 안면 근육이 쌜룩거렸고 두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섰다.
“가져오너라!”
채결은 얼른 물건을 건네받아 정선제 앞에 가져다 놓았다. 금패 윗면에는 ‘천자복환령’이라는 다섯 글자가 돋을새김되어 있었다.
“어디서 찾아내셨습니까?”
“태자 전하의 서재에서 찾았소.”
채결의 물음에 상관수가 답했다. 이에 정선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놈!”
서재는 중요한 곳이다. 더욱이 태자의 서재였다. 그리고 정선제는 태자 서재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들어갈 경우 서재를 샅샅이 조사했기 때문에 절대로 누락되는 부분이 있을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 요양성 대인와 영국후부의 후야께서 폐하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옵니다.”
밖에서 어린 환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정선제가 격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짐은 괜찮으니 문안 인사는 필요 없다. 그러니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하거라!”
어린 환관은 명령을 받들고 나가 두 대신을 돌려보냈다.
“두 분 대인, 황제 폐하께서 아직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가서 기다리고 계시면 폐하께서 나오실 겁니다.”
요양성과 영국후부 후야의 낯빛이 동시에 하얗게 변했다. 두 사람 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상관수가 안으로 들어갔으니 분명 뭔가를 찾아낸 게 틀림없었다.
설마 정말로 천자복환령을 찾아낸 걸까? 아니면 뭔가 떳떳하지 못한 물건이라도 찾아낸 걸까? 두 사내의 머릿속이 헝클어졌으나 일단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난각 안, 침상 위 정선제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말했다.
“상관수, 너도 나가 보거라.”
“예, 폐하.”
상관수는 예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황제 폐하, 지금…….”
채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서재에서 찾아냈으니 그럼… 태자 전하께서 정말로 천자의 제터를 만들고 계신 걸까요?”
정선제는 아래로 축 처진 험상궂은 얼굴을 씰룩거리며 욕을 뱉었다.
“이 불효막심한 것……!”
정선제는 당장에 태자를 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천자인 그 또한 태자의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은밀히 이런 짓을 하지 않는 태자가 어디 있겠는가?
과거의 그도 하루빨리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에 천자의 제터를 지었었다. 그런데 그 일을 자신이 당하게 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과 분노가 느껴졌다.
“네가 말해 보거라. 누군가가 태자를 모함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으냐?”
“소인의 생각에는… 모함이든 아니든 간에 그 천자의 제터는 태자 전하께서 만들고 계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영패는 누군가가 전하의 서재에 넣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터가 완공되지 않았으니 아직 영패를 모실 필요가 없잖습니까.
영패가 이렇게 빨리 태자부에 나타난 걸 보니 태자 전하께서 신중하지 않으셨을 수도, 누군가가 집어넣었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둘 중 어떤 것이든 간에 태자 전하께서 천자의 제터를 만들고 계신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선제의 하문에 채결은 사실대로 고할 뿐, 태자를 돕지도 훼방을 놓지도 않았다. 정선제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불효막심한 놈! 이 불효막심한 놈!”
“그럼 사실에 따라 처벌해야 할까요?”
채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정선제는 헛기침을 했고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이 죄목으로 벌을 내린다면 태자가 크나큰 불효를 저지른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조정의 관리들이 함께 들고일어나 그를 공격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태자를 폐위하게 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태자를 폐위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대제의 국경과 요새, 요충지를 지키고 있는가? 바로 태자 측비의 친정인 풍씨 가문이었다. 또한 누가 북연과 인접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해 지키고 있는가? 바로 태자의 생모인 황후의 친정, 영국후부였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이 태자를 밀어 주고 있어 태자는 이미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였다. 만약 자신이 붕어하면 태자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바로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모두 자신이 태자에게 주고 싶은 것이었다. 이 아이는 자신이 선택한 태자였다. 그가 천자의 제터를 지으리라는 것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도 정말로 그러했단 사실을 알고 나니 화가 치밀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선제는 자신이 붕어하면 언제든지 태자에게 황위를 넘겨줄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루라도 더 사는 동안에는 무엇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동안은 태자를 억눌러야 했다.
“황제 폐하…….”
채결이 작은 목소리로 재차 그를 불렀다. 이에 정선제는 정신이 들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짐이 화가 치밀어 죽겠구나……. 가자!”
그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채결은 얼른 그를 부축했고 한 걸음씩 떼며 앞쪽에 위치한 대전으로 걸어갔다.
대전에 있는 대신들은 정선제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자리에 똑바로 서서 몸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정선제는 자리에 앉은 후 그들에게 몸을 일으키라고 했다.
태자는 정선제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내자 낯빛이 조금 하얘졌다. 그는 방금 전 금위군에 심어 놓은 첩자에게서 정말로 천자복환령을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어째서 자신의 서재에 있단 말인가?
태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발견된 것은 사실이었다. 도대체 누가 한 짓일까? 그는 최근에 자신의 서재에 출입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어제는 전 상서가 다녀갔고, 그저께도 한 사람이 다녀갔는데 바로 엽연채였다.
하지만 태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엽연채를 가능성에서 지웠다. 왜냐하면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엽연채가 떠난 후 이계가 사람을 시켜 꼼꼼히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가 패자를 숨겼을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어떻게 천자의 분노를 마주하는가.’였다.
곤란에 처한 태자 옆에서 양왕은 풍류 넘치는 눈을 살짝 깜빡였다.
정선제는 자리에 앉은 후 접본 한 무더기를 집어 들더니 아래에 서 있는 태자에게 홱 집어 던졌다.
“이런 뻔뻔한 놈!”
아래에 서 있던 대신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설마 정말로!’
“천자복환령은 찾지 못했으나 이 서신들을 찾아내었다. 허허, 네가 정말 우리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는구나. 썩 물러가 벽을 보고 반성하거라. 태자는 일 년 동안 감봉에 처한다!”
황제의 격노한 목소리가 정전에 울려 퍼졌다.
아래에 있는 대신들은 그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니까 천자복환령은 찾아내지 못했고 서신을 찾아냈다는 말인가? 그런데 황실의 명예를 더럽혔다니, 대체 무슨 서신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