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엽연채는 자기 앞에 놓인 청자 그릇을 내려다봤다. 하도 가득 담아 줘 혼돈들 사이로 틈이 안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리따운 얼굴을 찌푸렸다.
“다 못 먹어요.”
“드십시오.”
주운환은 짧게 이 말만 했다.
“아니면 압자고가 먹고 싶은 겁니까?”
엽연채는 ‘압자고’ 이 세 글자를 듣고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얼른 국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릇 안에 담겨 있는 조그만 혼돈들과 싸움을 벌였다.
압자고를 떠올리면 씁쓸함에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주운환의 말이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엽연채가 혼돈을 다 먹자 주운환이 말했다.
“밖에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네.”
엽연채가 대꾸하자, 주운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엽연채는 혜연이 준비해 둔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치고 침상 위에 편안히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말이 어디가 이상한지 이제 깨달았던 것이다.
주운환이 별안간 압자고를 들먹이며 자신을 협박하지 않았는가? 그 말인즉, 그는 자신이 압자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왜 또 그걸 사 와 먹이려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연채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곧장 달려가 까닭을 묻고 싶었지만 주운환은 분명 양왕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이따 저녁에 다시 물어봐야겠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주운환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엽연채는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 *
이튿날 아침, 임 국공 부자가 함께 태자부에 가서 그림을 감정했다는 사실이 도성 곳곳에 퍼졌다.
원래 백성들은 묘기화와 엽영교의 혼사에 대해 반신반의했고, 묘기화가 정말로 단수인지 아닌지, 태자는 묘기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지 아닌지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임 국공 부자가 구설수를 걱정치 않고 태자부를 방문한 걸 보니 임 국공조차도 태자가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또 묘기화와 엽영교의 혼사도 목전에 다가와 있으니 사람들은 다 오해였던 모양이라고 더욱 생각하게 되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지만 그것이 태자의 평판 회복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허서는 동대가에 위치한 한 요릿집 2층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님들이 빙 둘러 모여 묘기화 이야기를 하며 태자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태자가 오명을 벗을 수 있었던 건 전부 자신의 계책 덕분이었다. 자신이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엽연채가 이 일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분명 분통 터져 하겠지!’
허서는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분노로 더욱 눈부셔졌을 모습을 상상했다. 그 이유가 자신이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이 밀려왔다.
이때, 아래층에서 익숙한 자태의 한 여인이 여종 둘을 데리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쪽을 진 새까만 머리에 나비 모양 술이 달린 장신구를 꽂고 수홍색 옷을 입은 그 여인은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허서는 그녀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바로 엽연채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허서는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엽연채가 도성 중심에 나타난 걸 보니 방금 전 정안후부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허서의 추측대로 엽연채는 조금 전 정안후부에 갔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안녕당과 엽영교의 처소는 막일을 하는 어멈들에게 물샐틈없이 둘러싸인 채였다. 그래도 엽미채의 말을 들어 보니 다행이었다. 어제 소청이 할머니에게 말을 전달하자 할머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고 했다.
엽연채는 그래 봤자 요 며칠 안에 해결될 일인데 기를 쓰고 들어가 그들 모녀를 만나 봐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다가는 괜히 소란만 일어날 것이었다.
정안후부를 나온 엽연채는 아침을 먹으러 이곳으로 왔다. 그녀는 혜연, 추길과 함께 대당大堂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후 음식을 주문했다.
이때, 서생 차림의 한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바로 허서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에게 알은체했다.
“연채야, 이거 참 우연이구나.”
추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봤다. 이 꼴 보기 싫은 놈이 아주 어딜 가나 뻔뻔하게 나타났다.
“저희는 그쪽을 모르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내가 연채를 알아보면 그만이다.”
허서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다. 그저 선물을 하고 싶어서 온 것뿐이다. 고모께서 곧 혼례식을 올리는데 갑자기 선물을 하려니 뭘 선물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더구나. 여기 옥패가 있으니 네가 나 대신 고모께 이걸 전해 주려무나.”
허서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옥패를 풀었다. 비취로 만든 이 옥패는 투명도가 아주 높았고, 위에 달린 구럭도 정교하고 윤기가 나는 걸 보니 은정랑이 직접 만든 게 틀림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추길이 냉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그런 불결한 물건은 영교 아가씨께서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아가씨도 그쪽을 대신해 선물을 전달하지 않을 거고요.”
허서는 자신이 몸에 차고 다니는 옥패를 추길이 불결한 물건이라고 욕하자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지만 차마 그녀와 말다툼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공명을 얻은 문인이고 추길은 일개 여종이니 싸우면 자신만 손해를 볼 터였다.
허서는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쓱 쳐다보고는 다시금 허허 웃었다.
“고모께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실 것 같다면 선물하지 말아야겠구나. 그럼 연채야, 나를 대신해 축복의 말이나 전해 드리렴! 아 참, 고모를 묘 공자에게 시집보내라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나다!”
허서는 그리 말하며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길 기다리는 두 눈이 대단히 형형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
추길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게 그쪽이 벌인 일이라고요? 그럴 리가. 잠깐만, 후야께서 왜 당신 말을 들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죠!”
엽학문은 분명 은정랑을 싫어했다. 설령 은정랑이 정말로 엽승덕의 ‘생명의 은인’이라 하더라도 엽학문은 은정랑을 미워하지 않는 게 고작일 것이며, 허서 이 의붓자식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허서는 대경실색한 추길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퍽 좋아졌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 표정이 엽연채의 얼굴에 나타나야만 진정으로 흡족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엽연채는 그저 찻잔을 들고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홀짝일 뿐,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허서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의붓자식 주제에 허튼소리 하지 마시죠. 그저 우리 아가씨를 열받게 하려는 것뿐이겠죠.”
추길이 써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허서는 그녀가 자신을 의붓자식이라고 부르자 순간 살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내가 의붓자식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허서는 지금 우선 예고를 하고 나중에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면 더욱 흥미진진할 것이라 생각했다.
엽연채는 그제야 기다란 속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적선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봤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물어보는데 여기서 잘도 쉴 새 없이 조잘조잘 떠들어 대네. 정말이지, 시답잖은 일로 수선 피우는 수다쟁이 아낙이 따로 없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우쭐거리는 꼴 하고는.”
허서의 표정이 확 굳었다. 엽연채가 지금 자신을 옹졸하다고 비웃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 물정 모르는 촌뜨기 같다는 건가? 게다가 수다쟁이 아낙이라고?
허서는 부끄럽고 분해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대신 콧방귀를 뀌며 으름장을 놓았다.
“모든 건 내가 손에 쥐고 있다. 네가 나와 내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는 날이 있을 게다!”
말을 마친 허서가 자리를 뜨자 추길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천한 놈! 매번 이렇게 찾아와서 욕을 얻어먹고 가네요.”
“아침이나 먹자꾸나.”
엽연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 *
엽연채 일행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온씨를 보러 추씨 가문에 들렀다가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궁명헌에 당도하니 서차간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주운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놓인 찻상 위에는 서찰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주운환은 안으로 들어오는 엽연채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서찰을 집어 들었다.
“강왕이 도성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요?”
엽연채가 두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허대실도 돌아오는 거죠?”
“네! 이 서찰을 보내기 전에 이미 길을 나섰다고 하는군요. 대략 삼월 초면 도성에 도착할 겁니다.”
주운환의 대답을 들은 엽연채는 급히 서찰을 건네받아 펼쳐 보더니 한층 희색이 만면해졌다.
“전 나가 봐야겠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요?”
서찰을 읽던 엽연채는 아리따운 얼굴을 들더니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그를 쳐다봤다. 주운환은 앙증맞은 그 모습을 보고는 볼을 꼬집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충동을 억눌렀다.
“그 일을 하러 가려고 합니다. 소저께서는 내일 밤에 그 물건을 넣어야 해요.”
그 말에 한기를 느끼며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운환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엽연채는 창틀에 기대어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녀는 나한상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서찰에 적힌 내용을 보고 또 보며 기뻐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압자고 이야기를 물어보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 * *
저녁이 되자 추길은 곁채에서 잠이 들었고 엽연채와 혜연은 본채에 누워 있었다.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 무렵이 되자 두 사람은 슬그머니 침상에서 일어났고, 엽연채는 뒤뜰에서 고양이를 안고 왔다.
여한은 일찌감치 궁명헌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매 없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나오는 두 사람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세 사람이 함께 문밖으로 나오자 조그만 검은색 마차가 좁은 골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월 중순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 날씨가 무척 추운 때라 백성들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일부 부호들만 문밖에 등롱 두 개를 걸어 놓지, 대부분의 집은 깜깜했다.
큰 거리도 당연히 칠흑같이 어두웠다. 하지만 오늘은 보름달이 유난히 밝은 덕에 어둠에 익숙해진 엽연채 일행은 주변을 대충 볼 수 있었다. 검은색 조그만 마차는 큰 거리를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사람들이 소리에 깰까 봐 속도를 내지 않았다.
정륭가에 거의 다다를 무렵, 마차는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그곳에 멈춰 섰다. 엽연채와 혜연이 마차에서 내린 후 여한의 안내를 받아 여기저기를 돌아 정륭가에 도착하니, 저 멀리 태자부의 측문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