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29화 (229/858)

제229화

엽연채는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삼각에 정국백부에 도착했다. 이때, 마차 밖에서 경인이 주운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창문에 달린 발을 젖히니 얇은 연청색 옷을 입은 주운환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얼굴에서 찬기가 느껴졌다.

엽연채는 그를 보더니 그제야 안도감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공자.”

“네.”

주운환 역시 그녀를 보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진작에 준비를 마쳐 두었다. 이미 신양 공주를 불러 놨고, 그녀가 눈가림이 되어 주는 동안 태자부에 심어 둔 첩자가 상황을 알려 오면 바로 가서 엽연채를 구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임묵긍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고, 아무래도 그가 돕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여 그렇게 하기로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주운환은 초조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줄곧 이곳에서 엽연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미소 띤 엽연채의 얼굴을 보니 한시름을 놓았지만, 태자부에서 그녀가 겪었을 일이 떠오르자 마음이 너무도 괴로웠다.

마차가 수화문으로 들어서자 혜연은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내려놓았다. 엽연채가 진홍색 치마를 들며 혜연의 손을 잡으려는데, 갑자기 주운환이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움켜잡았다.

갑자기 그가 손을 잡아끌자 엽연채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엽연채는 마차 안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반신만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주운환은 그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순간 멍해진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소저, 발… 삔 거 아니었습니까?”

주운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내뱉어지는 따뜻한 숨결에 엽연채의 귀는 한층 빨개졌고,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화를 냈다.

“제 발이 언제 삐었다고 그래요?”

“그게… 소식을 전달해 준 사람이 그리 말했습니다.”

주운환이 약간 쉰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품 안에 들어오니 그제야 현실감이 느껴졌다.

“잘못 전달된 거예요……. 앗!”

엽연채는 소스라치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고 이어 하늘과 땅이 빙빙 돌았다. 주운환이 그녀를 안아 들었던 것이다. 엽연채는 순간 균형을 잡지 못했고 당황한 나머지 그의 목을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것 같은데요.”

주운환은 그녀를 안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앞으론 이런 일 할 필요 없어요. 태자부에 다시 갈 필요도 없고요.”

엽연채는 이어진 말을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매번 태자부에 가서 그들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웠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오늘도 주운환과 양왕이 자신을 구할 방법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지만, 이런 일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 일을 하겠다고 응했을 때, 이미 정조를 잃을 각오까지 했었다.

“하지만… 태자 전하께서 이미 아가씨께 눈독을 들이고 있어요. 앞으로 또 아가씨를 불러 차를 끓이게 하고 꽃잎을 닦게 하고 그러면 어쩌죠?”

혜연이 뛰어와 주운환에게 물었다. 그녀는 엽연채가 태자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몇 번이나 태자부에 방문했었던 일을 되짚어 보니 절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혜연의 말에 주운환의 수려한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런 일은 없다. 내가 신분과 지위, 영예를 모두 소저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살짝 흔들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오니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안고 궁명헌으로 들어갔다.

추길이 얼른 그들을 맞이하러 나오다가 주운환이 엽연채를 안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가씨……! 어찌 된 겁니까?”

주운환은 방 안 나한상 위에 그녀를 살포시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려 혜연에게 분부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하거라.”

혜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선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여양과 여한을 불러 두 사람에게 함께 뜨거운 물을 들고 오라 지시했다.

“아가씨, 발은 왜 그러신 거예요?”

추길이 앞으로 다가서며 걱정스레 물었다.

“발이…….”

엽연채는 발이 삐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방금 전 주운환에게 괜찮다 했으니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어 조그만 입만 삐죽거렸다.

“태자부에서 무릎을 너무 오래 꿇고 계셨던 거죠? 그래서… 들어는 가셨고요?”

추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묻자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러자 추길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영교 아가씨 일은… 어떻게 하죠? 정말로 그분에게 시집가셔야 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아가씨가 이제 태자비에게 잘 보일 기회도 잃어버렸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추길을 달래는 엽연채의 아름다운 눈에 싸늘한 빛이 번뜩였다.

“일단은 배부터 채워야겠어. 추길아, 주방에 가서 혼돈餛飩(만둣국) 두 그릇을 준비하라고 전하거라.”

“예.”

추길은 코를 훌쩍이며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그녀의 뒷모습이 궁명헌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양왕 전하 쪽은 언제 움직이세요?”

“소저가 가지고 있는 영패令牌는 어떻게 넣을 생각입니까?”

주운환은 대답하는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물었다.

“고양이를 이용할 건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엽연채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소저가 갑자기 밖에 가서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봐도 즉흥적으로 데려온 것 같지는 않고, 게다가 금패金牌를 주문 제작해 그 고양이에게 장난감으로 주었지요. 또 그 금패의 크기와 형태가 천자복환령과 아주 흡사했고 말입니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주운환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이 고양이한테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물건을 숨기는 거거든요. 특히 금으로 만든 물건을 가장 좋아하고요. 그런데 이 녀석이 물건을 숨길 곳에 미리 오줌을 발라 놔야 해요. 녀석은 코가 아주 예민해서 오륙일이 지나도 자기 오줌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낼 수 있거든요.”

“믿을 만합니까?”

“당연하죠. 지난 반년 동안 녀석을 데리고 백 번가량 확인했고 계속 훈련도 했어요. 그럼 패자牌子는 언제 넣을 거예요?”

엽연채가 그에게 반문했다.

“여유 있게 사흘 후로 합시다!”

엽연채가 오늘 태자부의 서재에 들어갔는데 내일 바로 일이 생기면 의심받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그런데… 이 영패 때문에 태자에게 일이 생기는 게 우리 고모에게 과연 도움이 될까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엽연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주운환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때, 멀리서 추길이 쟁반 하나를 들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엽연채는 혼돈의 따뜻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추길이 혼돈을 소청의 원탁 위에 올려놓으며 손짓을 하자 엽연채와 주운환은 함께 식사를 하러 앉았다.

자그마한 백자 쟁반 위에는 조그마한 혼돈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혼돈에서 새 나온 기름과 쫑쫑 썰린 실파가 국물 위에 뿌려져 있어 보기만 해도 입맛을 한층 돋우었다. 그 옆에는 청자 그릇 두 개도 준비되어 있었다.

주운환이 국자를 들어 그릇 두 개에 혼돈을 담아 주자 엽연채는 국 숟가락을 집어 들고선 조그마한 혼돈을 하나하나 떠먹기 시작했다.

주운환은 맛있게 먹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녀의 먹는 모습은 늘 보기 좋았고, 특히 압자고를 먹을 때는 더욱 보기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녹엽이 궁명헌 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그쪽을 쳐다보며 까닭을 생각했다.

‘설마 진씨 쪽에서 내가 태자부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걸까? 주묘서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또 난리를 치려나?’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녹엽의 뒤로 낯익은 여종 한 명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종의 이름은 소청으로, 묘씨를 곁에서 모시는 이등二等 여종이었다.

녹엽과 소청은 방 밖에 섰다.

“셋째 마님, 마님 친정에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녹엽이 고하자 소청은 얼른 엽연채에게 예를 올렸다.

“큰아가씨, 공자님.”

주운환은 소청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큰아가씨, 저번에 셋째 마님께서 보내신 서찰을 읽어 보지 않으셨나요?”

온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한 소청이 엽연채를 원망하는 투로 대꾸했다.

“영교 아가씨께서 다시 묘씨 가문으로 시집가게 되셨습니다. 스무엿새에 출가하게 되셨어요. 주인마님께서는 초조한 마음에 방 안에서 자진하겠다고 하고 계세요. 그러니 큰아가씨께서 정안후부로 가셔서 주인마님을 말려 주세요!”

엽연채는 이미 국 숟가락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난 지금…….”

“너는 돌아가서 할머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거라. 할머님이 돌아가시면 고모님이 묘씨 가문에서 고생해도 신경 써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이다. 반면, 할머님이 살아 계시면 설사 고모님이 정말로 그 가문에 시집을 가시더라도 할머님이 뒤에서 고모님을 뒷받침해 주실 수 있다고 말이다!”

엽연채가 무어라 하기 전에 주운환이 한발 빨리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내일 할머니를 뵈러 가마.”

그의 말에 엽연채가 한마디를 보탰다.

말문이 막힌 소청은 엽연채가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엽영교는 전부터 그녀에게 정말 잘해 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이런 큰일이 터졌는데도 그녀는 와 보려 하지도 않았다. 결국 지금 이쪽에서 이렇게 부르러 왔는데 그녀의 부군은 자신을 나무라기까지 했다.

소청은 불만스러웠지만, 차갑게 식은 주운환의 얼굴을 보니 더는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떴다.

그녀가 멀어지자 엽연채가 주운환을 살살 달랬다.

“저 아이는 그냥 초조해하는 거예요. 고모에게 일이 터진 후 제가 태자부에 가는 일로 바빠서 정안후부에 들러 보지 못했잖아요. 할머니와 고모는 제가 뒤에서 고모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모르세요. 그러니 냉정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주운환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그녀의 그릇에 혼돈을 가득 떠 줄 뿐이었다. 엽연채는 요 며칠 동안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무릎을 꿇고 사람들에게 간청도 하고 태자 그 망할 놈에게 모욕적인 일까지 당할 뻔하다가 이제서야 겨우 마음 놓고 편안히 밥 한 끼 먹으려고 하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종이 소란을 피우니 화가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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