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28화 (228/858)

제228화

“전하, 사슴고기 좀 드셔 보시지요.”

엽연채는 특별히 제작된 조그마한 집게를 들고 있었다. 그녀 앞에 놓인 석쇠 위에는 사슴고기가 가득 올라와 있었는데 잘 구워져 기름기가 좔좔 흐르고 있었다.

태자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내 일을 다 마무리했으니 주 부인은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해 보시오. 내가 들어 주리라.”

엽연채는 손에 든 집게를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태… 태자 전하께서, 저희 고모를 도와주시기를 간청드리옵니다.”

그 말에 태자의 잘생긴 얼굴이 굳었다.

“내가 뭘 도와준다는 말이오?”

“최근 도성에서 일어난 일을 저뿐만 아니라 태자 전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이 일에… 전하도 연루되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묘 공자는 정말로 좋은 짝이 아닙니다. 그분은 단수이며 또 본인의 입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정말로 파혼했었는데 저희 조부님께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건지 다시 혼례식을 치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면 저희 고모의 한평생을 망치지 않겠습니까?

지금 태자 전하께서도… 이 일에 연루되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태자 전하께서 결백하다고 믿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존경하는 얼굴로 태자를 우러러봤다.

“태자 전하께서 저희 조부님과 이야기를 나눠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그리하면 조부님께서 혼사를 물리시지 않을까요?”

태자는 두 눈을 살짝 끔뻑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이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엽연채가 하필 불가능한 일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도저히 미인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일 엽 후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겠소. 다만 이 혼사는 묘… 그자가 정말 단수라 하더라도 그대의 조부가 딸을 그자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면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오.”

이제 태자는 묘기화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마저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어째서 사내를 좋아했던 걸까?

“저는 전하만 믿겠습니다.”

엽연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더더욱 공경하는 눈빛을 띠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술 한 잔을 따라 준 후 자신의 술잔도 채웠다.

태자가 술잔을 들며 보니, 그녀의 조그만 얼굴은 술 한 잔을 마시자마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장 빛깔 고운 복숭아꽃처럼 매혹적이었는지라 흑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태자도 이어 술을 들이켰는데, 이 ‘구단금액九丹金液’이라는 술은 아주 독한 술이었다. 술이 엽연채의 배 속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그녀의 조그만 얼굴은 화끈거렸고 두 눈에도 취기가 어렸다. 그러자 태자는 그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엽연채는 술기운에 몽롱해진 눈을 굴리더니 그의 손길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엔 수줍음이 담겨 있었다.

태자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기뻐했다. 지금 이건 그녀도 원한다는 뜻인가? 전에는 분명 그다지 원하지 않는 모습이었고 그럴 각오도 없어 보였다. 설마 고모 때문에 몸을 바치겠다는 것인가?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사실 고모를 위해 통사정하는 건 그저 핑계가 아닐까? 실제 목적은 그저 자신과 만나 가까워지기 위함일 것이다. 보아하니 그동안 그녀를 냉대한 것이 효과를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엽연채는 술을 두 잔 더 따랐고 연달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기우뚱하다가 그대로 탁자 위로 엎어졌다.

태자는 주량이 이리도 약한 그녀를 보더니 속으로 은근히 실망했다. 방금 전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녀와 이제부터 놀아 볼 작정이었는데 술에 취해 바로 쓰러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태자는 오랫동안 엽연채를 노려 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의 눈앞에 있으며 거기다 이곳엔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더 참을 수 있겠는가?

태자는 엽연채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때, 엽연채는 자신이 입고 있는 외투를 꽉 움켜쥐고 재채기를 했다.

이곳은 확실히 너무 추웠다. 태자는 그리 생각하며 그녀를 안아 올렸는데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가벼웠고 몸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 기대어 있으니 그윽한 향기가 그의 코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녀를 안고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칸막이 방엔 침상이 하나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서재로 걸어 들어가 침실로 돌아든 후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침상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그녀의 조그만 얼굴은 한 폭의 그림처럼 맑고 고왔다.

태자가 몸을 숙이고 뭔가를 하려는 찰나,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전하.”

태자는 깜짝 놀랐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태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 보니 임묵긍이 밖에 서 있었다. 그는 태자를 보더니 예를 올렸다.

“전하, 방금 전 소신이 아버지를 뵈니 몸이 편치 않으셔서 먼저 떠나셨습니다. 저는 전하께 인사를 드리러 돌아왔습니다.”

“그랬군. 그럼 국공에게 돌아가서 푹 쉬시라고 전하시게.”

태자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는 언제든지 입 안에 넣을 수 있는 고기가 서재에 있으니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당연히 눈앞에 있는 임묵긍이 어서 사라져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참, 왜 주 부인은 안 보이는지 아시는지요?”

그러나 임묵긍은 가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저와 함께 들어왔으니 제가 데리고 나가야겠습니다.”

그 말에 태자는 혼비백산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태…….”

태자비를 보러 갔다고 말하려는 순간, 서재 안에서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 주 부인께서 여기 계시나 보군요.”

임묵긍이 놀란 목소리를 내자 태자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에 임묵긍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태자 전하, 주 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태자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내게 고모의 혼례식 일로 자신의 조부와 이야기를 나눠 달라고 했다네.”

태자는 안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엽연채의 모습을 임묵긍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유부녀이니 자신과 실내에 단둘이 있는 행동 자체가 이미 상궤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취해서 안에 쓰러져 있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꼴이 뭐가 되겠는가?

방금 전에 임 국공에게 훈계를 들었는데 돌아서자마자 이러면… 설명하기가 참으로 곤란해진다.

한편, 엽연채는 그들이 바깥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태자 서재의 침실이었다.

그녀는 눈알을 굴리더니 얼른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나와 보니 길고 커다란 침목沈木 책상이 놓여 있고, 옆으로는 다층 진열장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엽연채는 그쪽으로 걸어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찾은 뒤 서랍 하나를 열었다. 그러고는 소매에서 조그마한 물주머니를 꺼내 안에 든 액체를 조금 쏟아낸 후, 손에 묻은 액체를 서랍에 발랐다.

일을 마친 엽연채는 밖에서 태자가 임묵긍을 돌려보내는 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원래 있던 곳으로 달려가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몸을 굴려 땅바닥에 떨어지며 ‘아야’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안에 무슨 일이죠?”

임묵긍이 미간을 찌푸리며 안에 대고 말했다.

“주 부인?”

태자는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그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채로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가 몽롱한 얼굴로 걸어나왔다.

“전… 전…….”

태자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술에 취해 자신에게 안겨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할까 봐 심히 걱정이 되어 급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방금 전 건물이 너무 춥다면서 굳이 서재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하여 내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넘어졌는가?”

엽연채는 살짝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건에 부딪혀서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그럼 시녀를 부를 테니 가서 쉬시오!”

태자는 그리 말하며 시녀를 부르려고 했다.

“상태가 이러하니 집에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때, 임묵긍이 태자에게 공수를 하며 끼어들었다.

“전하, 지금 밖에는 유언비어가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의심받기 쉬운 행동은 피하는 것이 좋으니 전하께서도 주 부인에 대한 호의를 거두시지요.”

그 말에 뜨끔한 태자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임 세자의 말이 옳군.”

엽연채는 태자에게 인사를 올린 후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임묵긍을 따라 함께 이곳을 떠났다. 태자는 점점 멀어져 가는 엽연채의 아리따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요염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조그만 얼굴과 방금 전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느꼈던 은은한 향기, 부드러운 몸을 떠올렸다.

태자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못마땅했으나 그녀가 술을 마시고 반쯤 취했을 때 보인 수줍은 모습이 떠올랐다. 드디어 엽연채에게 이쪽에 달라붙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기회는 또 있다. 이 일이 완전히 잠잠해지고 나면 엽연채를 마음껏 맛볼 것이다. 그런데…….’

태자는 또 허서가 떠올랐다. 이 일이 이렇게 원만하게 해결되고 자신에게 묻은 때를 말끔히 씻을 수 있던 것은 허서 덕분이었다. 담력과 용기를 모두 겸비한 자였다. 그러니 앞으로 그를 잘 써먹어야 했다.

그런데 허서와 엽연채는 서로 척을 진 사이였다. 하지만 그럼 뭐 어떤가? 자신은 엽연채와 동침하면서 허서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엽연채는 자신에게 들러붙기 위해서라면 아마 원수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엽연채와 임묵긍은 함께 수화문을 넘어섰다.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엽연채는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게 뭐가 있소?”

임묵긍이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반문했다.

“내가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어쨌든 내가 데리고 들어간 사람이니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겠소?”

그는 말을 마친 후 자신이 타고 온 큰 가마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탄 가마가 떠나자 엽연채는 그제야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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