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서재 밖으로 나가니 저 멀리 시녀 한 명이 사람들을 이끌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임 국공이었고 그 뒤로 젊은 공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태자는 그가 누구인지 즉시 알아보았다. 바로 임 국공의 적장자인 임묵긍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늘씬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붉은색 사람 형체가 보였다. 태자는 그 조그마한 인영을 보더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엽연채 아닌가? 어떻게 이곳에 온 거지?
그러다 갑자기 지금 묘기화에게 시집갈 사람이 바로 엽연채의 고모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엽연채가 요 이틀 동안 태자비에게 배첩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하나 태자가 아는 바는 이것뿐으로, 엽연채가 배첩에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동안 마음이 너무 산란해 그녀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태자는 그들을 맞이하러 가까이 다가섰다.
임 국공, 임묵긍 그리고 엽연채는 얼른 그에게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태자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임 국공을 일으켜 세웠다.
“국공, 일어서세요. 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그리 말하며 임묵긍에게도 공수를 했다.
“임 세자.”
“전하.”
임묵긍은 미소를 지으며 맞잡은 두 손을 가슴까지 올려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도록 옆으로 비켜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문 입구에서 이분이 무릎을 꿇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들어 보니 태자부와 두터운 친분이 있어 태자 전하를 뵙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더군요. 하여 ‘고약한 아랫것들이 혼란한 틈을 타 전달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어질고 너그러운 분이시니 제 생각대로 모셔왔다고 탓하지 말아 주시길 바라옵니다.”
태자의 안색은 그대로였으나 그의 눈빛은 어둡게 변했다. 그는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엽연채에게 화가 났으나 그의 시선은 저절로 그녀에게 향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추위에 얼어 불그스레했다. 소매 없는 외투의 끈이 그녀의 목에 묶여 있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두르고 있는 흰색 여우 털은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더욱 요염하게, 또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아름다워 보이게 했다.
촉촉하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꼭 눈물이 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엽연채는 위로 말린 기다란 속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 맑고 투명한 눈으로 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연꽃 같은 얼굴에서는 아리따운 꽃이 폭우를 맞은 것처럼 처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아 전하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하는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분이시니 제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엽연채가 자신을 그렇게 우러러보고 있다고 하니 태자의 마음은 금세 풀렸다. 그녀가 부드러운 말로 아양을 떠니 다가가 위로를 해 줘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어디 화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태자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한사코 날 만나겠다고 하니, 그럼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는지 내 한번 들어 봐야겠군.”
태자는 그리 말하며 임 국공을 불렀다.
“국공, 세자. 이쪽으로 오시오.”
그들은 태자를 따라갔고, 태자는 걸어가며 이야기를 했다.
“여기 주 부인은 평소 태자비와 친분이 있소. 태자비를 위해 종종 와서 꽃잎을 닦고 차를 끓인다오. 나도 두어 번 본 적이 있소.”
“그랬군요.”
임묵긍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오래된 그림을 감정할 텐데 미인이 함께하니 더욱 운치가 있을 겁니다.”
그들은 백옥이 깔린 오솔길을 걸어갔다. 엽연채가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흰 벽과 검은 기와로 이루어진 커다란 본채 세 칸이 줄지어 이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고, 편액 위에는 금박을 붙인 ‘정안천하定安天下’라는 커다란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엽연채는 곱고 아리따운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이곳이 바로 태자의 서재였다. 그리고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태자, 이계, 송초 이 세 사람밖에 없었다.
이 밖의 다른 사람들이 서재에 들어갔을 경우, 그들이 떠난 후 이계가 서재 전체를 검사하기 때문에 아무도 태자의 서재에 몰래 손을 쓸 수 없었다. 설사 정말 손을 썼다 하더라도 발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자신의 목적은 바로 천자복환령을 서재에 넣어 두는 것이었다. 엽연채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태자는 그들을 데리고 잠시 걸어가더니 서재를 두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저 멀리, 넓고 큰 건물이 한 채 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건물은 여덟 개의 추녀마루가 지붕의 한가운데에 몰려 있고 유리 유약을 발라서 구운 붉은 기와가 깔려 있었다. 사방이 모두 열려 있는 정자인데 날씨가 추운 계절이라 그런지, 정자의 사방엔 얇은 반투명한 대발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넓고 큰 건물 내부에는 커다란 긴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책상 근처에는 두 개의 원탁이 자리했으며, 그 위에는 사슴고기와 열로 익히는 조리 기구, 술 한 단지가 놓여 있었다.
이른 봄추위가 살을 에는 듯한 날씨에 그림을 감상하며 사슴고기를 굽는 건 만족스럽기 이를 데 없는 훌륭한 조합이었다.
“이리로 오시지요!”
이계가 얼른 그들을 맞이하러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 원탁에 앉았다. 이계가 구워진 사슴고기를 펼쳐 놓고 있는데 임 국공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조前朝의 연 대사가 그린 <춘추명산도>는 어디 있느냐?”
“지금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이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른 손에 든 사슴고기를 내려놓고 빠르게 걸어가더니 잠시 후 두루마리 그림 한 장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그림을 기다란 책상 위에 펼쳤다.
드높은 기세가 느껴지는 산수화였는데, 한쪽에는 가을의 붉은 단풍이 그려져 있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봄의 녹색 기운이 물씬 풍겨, 보고 있자니 마치 따뜻한 춘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듯했다. 이 특별한 그림만의 특징은 이렇게 봄과 가을의 경치가 한 폭에 담겨 있음에도 조금도 이질감이 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태자와 임 국공, 임묵긍은 그림 쪽으로 걸어갔고 임 국공은 그 그림을 보더니 ‘흠’ 하고 짧게 탄식을 했다.
“이 그림은 가짜입니다.”
그러자 태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역시 가짜인가 보오? 나도 처음 봤을 때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이 그림이 너무 훌륭해서 가짜라고 확정 지을 수가 없어 국공이 방문해 감정해 주기를 청한 것이오.”
그림의 진위 여부 따위가 뭐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국공이 방문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보아하니 임 국공 역시 태자인 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앞으로 또 이런 지저분한 일이 생기면 그를 다시 태자부로 초대하면 된다.
그런데 이때, 임 국공이 이렇게 말했다.
“붓을 가져오너라!”
이계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속히 밖으로 나가 문방사우를 준비한 후 그것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임 국공은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을 집어 들더니 뜻밖에도 명화 위에 거침없이 붓을 휘둘렀다.
잠시 후, 아름다운 경치가 그려져 있던 <춘추명산도>는 그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다. 왼쪽의 가을 경치는 금방이라도 악귀가 집어삼킬 듯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녹색 기운이 물씬 풍기던 오른쪽 봄철의 경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선명한 녹색빛의 독사로 변해 버렸다.
태자는 그 그림을 보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이건…….”
임 국공은 붓을 던지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덕행을 드러내려는 자는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았고 수신의 핵심은 올바른 마음입니다. 소신은 차기 황제 폐하의 스승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태자이시고 아직 군주가 아니십니다.
소신이 감히 전하께 망령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사오나, 전하께서 정성을 기울여 소신을 초대해 주셨으니 소신이 이 그림을 빌려 전하께 깨달음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그림을 고쳐 전하께 드리오니 전하께서는 보시며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태자는 그 말에 마음이 요동쳤다. 속으로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무엇보다도 부끄러웠다.
태자는 부끄러운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원래도 켕기는 부분이 있던 참에 임 국공이 훈계하니 어디 감히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국공부는 원래부터 황제만을 위해서 일해 왔다. 황자들과는 한 번도 얽히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어엿한 황태자이더라도 임씨 가문은 구태여 자신과 친분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위가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지는 아직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 국공이 저를 훈계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이쪽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태자는 속으로 경외심을 느꼈고 임 국공에게 더욱더 존경심이 생겼다.
태자가 임 국공에게 공수하며 답했다.
“국공 말이 옳소.”
“소신은 그저 그림을 드린 것뿐입니다.”
국공이 그리 대꾸하며 저편에 놓인 원탁을 쳐다보니, 엽연채가 그곳에서 사슴고기를 굽고 있었다.
“요즘 상초열上焦熱(목구멍이 붓고 입안이 헐며 머리가 아프고 눈이 충혈됨)이 나서 구운 고기는 먹지 않으려고 하오니 소신은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국공은 돌아서서 넓은 건물을 나갔다.
“아버지?”
임묵긍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태자에게 예를 표했다.
“태자 전하, 아버지께서 최근 몸이 편치 않으십니다. 제가 따라가서 보겠습니다.”
“가 보시게나, 임 세자.”
태자가 허하자 임묵긍은 바로 건물을 나갔다.
태자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들썩였다. 과연 임 국공이었다. 향후 자신의 스승이 될 임 국공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다만 앞으로 또 태자부를 방문하게 해 뭔가를 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이계야, 그림을 정리하거라.”
태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이계는 얼른 걸어오더니 그림을 둘둘 말아 화구통畫具筒에 넣은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태자가 고개를 돌려보니 엽연채는 가만히 사슴고기를 굽고 있었다. 아리따운 옆모습, 아래로 살짝 드리워진 기다란 속눈썹, 곱디고운 붉은 입술을 보니 사랑스럽고 또 요염해 보였다.
태자는 기분이 너무 좋아 엽연채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이 단둘이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