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추길은 집으로 돌아가서 이 일을 엽연채에게 알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마께서는 아가씨를 까맣게 잊으셨나 봐요.”
태자비가 엽연채에게 시킨 일이라곤 꽃잎을 닦고 차를 끓이게 하는 등 풍류를 즐기는 일에 불과했으니,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추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묘서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내가 내일 직접 가 보마.”
“그게…….”
엽연채가 뜻밖의 말을 꺼내자 추길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아요, 지금으로선 가망이 없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쨌든 시도해 봐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단장을 마친 후 추길과 혜연을 데리고 함께 문을 나섰다.
엽연채는 태자부의 동쪽 측문에 도착해 배첩을 건넸다. 금슬은 배첩을 건네받으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정화원으로 걸어가 태자비에게 아뢰었다.
“마마, 주 부인이 또 오셨습니다. 이번엔 직접 오셔서 지금 동쪽 측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쫓아낼까요?”
태자비의 엄숙한 얼굴이 바로 어두워지더니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엽연채를 흉봤다.
“저렇게 윗사람에게 들러붙는 걸 좋아하다니. 망할 계집애 같으니라고!”
그녀는 자신이 엽연채를 상대하지 않으니 엽연채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으리라고, 그래서 다시 태자에게 들러붙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한편, 금슬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엽연채가 들러붙는 게 태자비가 줄곧 원했던 일이 아니었는가? 그동안 계속 미끼를 물도록 유도하지 않았는가? 하기야 지금 미끼를 무는 건 시기상 적절하지 않기는 했다.
“쫓아내지는 말거라. 네가 나가서 거절을 하되 너무 심한 말을 하지는 말거라.”
태자비가 분부했다. 지금 너무 차갑게 대하면 아마 엽연채는 포기하고 다시는 들러붙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 놓고 나중에 다시 부르면 그녀의 체면을 깎는 게 아니겠는가?
금슬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동쪽 측문으로 나가 보니 털 달린 붉은색 민소매 외투를 걸친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손난로를 쥐고서는 두 여종과 함께 그곳에 서 있었다.
“주 부인, 지난번에 마마께서 혼인은 부모의 명과 중매인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이니 마마께서는 규율을 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인께서는 마마를 난처하게 하지 마시고 어서 돌아가세요!”
“하지만… 이건 그저 사소한 일이다……. 태자비 마마의 말씀 한마디면, 태자 전하의 말씀 한마디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묘기화에게 시집가라고 고모에게 강요하지 않으실 게야.”
금슬의 말에 엽연채는 이리 대꾸하며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금슬은 조금도 동정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저희 마마와 태자 전하는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압력을 넣는 분들이 아니십니다. 마님께서는 그리 아시고 돌아가시지요!”
“난, 난 돌아가지 않을 거다. 마마와 태자 전하를 뵈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게야!”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었다.
“이런!”
금슬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가 좌우를 둘러보니 다행히도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태자부가 위치한 정륭가라 원래도 인적이 드물었고 동쪽 측문이 있는 이 골목에 감히 발을 들이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엽연채는 가냘픈 몸을 가지고 있으니 무릎을 오래 꿇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이리 판단한 금슬은 한마디만 남기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무릎을 꿇고 싶으면 그리하세요!”
엽연채는 그곳에서 정말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일각도 안 되어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결국 일각이 더 흐르자 혜연과 추길에게 부축을 받아 그곳을 떠났다.
금슬은 가녀린 엽연채가 잠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조차 버티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엽연채가 소란을 더 피우지는 못할 터라고 생각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엽연채는 이튿날 또 태자부를 찾아와 배첩을 건넸다. 금슬은 아예 그녀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엽연채는 또다시 밖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이때, 멀리서 옻칠한 화려한 덮개가 달린 호화로운 가마 두 대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마꾼은 누군가가 길을 막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멀리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마를 따라 걸어오던 하인이 태자부 문 앞으로 다가와 배첩을 건네자 지키고 있던 시위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그들을 맞이했다.
“임 국공 대인과 임 세자를 뵈옵니다.”
그러나 엽연채가 여전히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길을 막고 있으니 시위는 마음이 조급해져 그녀를 쫓아냈다.
“주 부인, 어서 비키세요!”
“난… 난 이곳을 뜨지 않을 거다. 태자 전하를 만나 뵙게 해 주거라……!”
엽연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유약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 부인, 어서 가시라고요!”
안에 있던 금슬은 차마 엽연채에게 완력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임 국공이 왔는데도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으니, 보기 껄끄러울 뿐만 아니라 길마저 막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흠…….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뒤에 있는 가마 안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 세자야께서 모르시는 일이 있사옵니다……”
시위가 난처한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여기 계신 주 부인이 태자비 마마와 조금 친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일이 생겼다며 마마께서 나서서 도와주십사는 무리한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일을 도와주시면 마마의 평판이 실추되니 마마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행히도 저희 마마께서는 관대하신 분이라 주 부인에게 따지지 않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이렇게 하실 줄은…….”
“난 그저 태자 전하를 뵙고 싶을 뿐이다. 인자하고 능력 있으신 전하께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니 도와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
엽연채는 그리 반박하며 이마를 어루만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때 뒤에 있던 가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 부인이 태자 전하를 만날 수 있게 해 주거라. 너무 억지스러운 요구라면 저 부인을 단념하게 하고 서둘러 쫓아내면 되니 말이다.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저곳에 무릎을 꿇고 있을 텐데 어찌 체통이 서겠느냐?”
“그게…….”
시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겠다.”
가마 안에서 방금 전 그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임 세자야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시위는 그리 말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국공 대인, 세자야. 감사드립니다.”
엽연채는 얼굴에 희색을 띠며 얼른 추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가마꾼이 가마 두 대를 들고 문안으로 들어가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엽연채도 그들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첫 번째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임 국공으로 은회색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백옥관白玉冠을 쓰고 있었다. 마흔 가까이로 보이는 그는 기품 있고 중후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두 번째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외모는 임 국공과 어느 정도 닮아 있었고, 기다란 눈썹에 가늘고 긴 눈을 갖고 있었다. 자수가 놓인 푸른빛 도포를 입으니 그의 점잖고도 수려한 용모가 돋보였다. 그의 온몸에 시와 예를 숭상하는 대갓집 자제의 진중함과 기개가 느껴졌다.
이 사람은 바로 임 국공의 세자인 임묵긍으로, 도성 5대 재자才子 중 최고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항상 조용하고 겸허한 자세를 유지할 뿐, 사람들과 시와 그림 실력을 겨룬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안국공부 적장자이고 시와 예를 숭상하는 대갓집의 자제이며 드높은 기개를 지니고 있어 5대 재자 중 최고라는 칭호를 자연히 얻게 되었다. 비록 임묵긍 스스로는 한 번도 자신이 재자라고 인정한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임 국공 대인, 임 세자야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그들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임묵긍의 부드러운 눈빛이 엽연채에게 향했다. 그는 순간 멍해졌는데, 그녀가 정말로 뛰어난 미인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윽고 임묵긍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동행을 청했다.
“가시지요.”
일찌감치 나와 있던 한 시녀가 다가오더니 그들에게 길을 안내했다.
태자는 서재에서 접본摺本(병풍처럼 접어 개는 식으로 만든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계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전하, 임 국공과 임 세자가 왔습니다!”
“왔구나.”
고개를 든 태자의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엽영교와 묘기화의 혼사가 계획대로 진행된 후, 태자는 이계를 안국공부로 보내 임 국공을 두 번이나 초대했지만 임 국공은 거듭 거절했다. 이에 태자의 마음속에서는 원망과 분노가 치밀었다.
임씨 가문이 백 년 동안 명망을 누려 온 학식 깊은 명문가이며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끄떡없는 대학자 가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자신을 안중에도 안 두는 것 아닌가? 대대로 황제의 스승을 배출하기는 했지만, 그 황제의 스승이라는 자리는 황제가 내리는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친 태자는 앙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이계를 보내 재차 초대했는데, 그가 마침내 초대에 응한 것이다.
“왔다고 하니 정문을 열어 맞이하거라.”
태자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이번에 임 국공을 초대한 건 자신의 오명을 벗기 위함이니 당연히 대문을 열어 놓고 성대하게 맞이해야 했다. 게다가 임 국공의 신분 역시 정문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으, 그게… 임 국공 대인께서 동쪽 측문으로 들어와 이미 수화문에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계를 쏘아보며 물었다.
“준비를 안 해 둔 것이냐?”
그러자 이계는 고개를 숙이며 자책하는 목소리로 고했다.
“원래는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도착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워낙 일찍 당도하셨습니다. 이미 임 국공 대인께서 스스로 측문으로 들어오셨는데… 다시 나가서 대문으로 들어오시라고 청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태자가 말없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자 이계가 얼른 미소를 지으며 눙쳤다.
“너무 성대하게 맞이하면 되레 너무 공들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평소처럼 측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고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여 더 나을 겁니다. 어차피 저희 쪽에서 이 소식만 알리면 사람들은 이런 시기에 임 국공이 여전히 태자부의 손님으로 찾아오는 걸 보니 역시 태자 전하는 청렴결백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듣기에 일리가 있는 말이라 태자가 수긍하려는 찰나, 이계가 급히 고했다.
“임 국공 대인께서 지금 안내를 받아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태자가 하하 웃으며 반색했다.
“이게 다 허서가 내놓은 묘책이다.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