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25화 (225/858)

제225화

임 국공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양왕이 또 태자를 음해하려는 것이었다!

“난 태자 전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양왕 전하를 도울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차림새를 다시금 쳐다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안국공부는 황자들 간의 싸움에 끼어든 적이 없다. 돌아가서 양왕 전하께 이렇게 전하거라.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이용하고 옛정을 들추어도 소용없다고 말이다!”

엽연채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옷소매 안에서 잠簪 하나를 꺼내 들어 머리에 꽂았다. 임 국공은 오래되고 낡은 그 진주 잠을 보더니 마음이 요동치며 어릴 때 겪은 지나간 옛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낯빛이 싸늘하고 어둡게 변했다. 방금 전 과거를 사사로이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임 국공이 호통을 치려는 순간, 엽연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이 없으면 어떻게 이용하겠습니까? 또 정이 있다면 어떻게 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임 국공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감정이 없으면 어떻게 이용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감정이 있다면…….

자신은 수년 동안 양왕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나 몰라라 했으니, 그 감정 앞에 떳떳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이 감정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이용하든 말든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

임 국공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눈앞에 있는 엽연채를 보니 그는 그때 그 소녀를 보는 것만 같았다. 겨우 열 살이던 그 아이는 새하얀 유군을 흩날리며 뒷짐을 진 채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러고 나서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저를 불렀다.

“순 오라버니.”

머리 위에 꽂은 금빛 찬란한 잠의 술이 그녀의 이마 앞에서 찰랑거리며 눈부시게 환한 빛을 뿜어냈다.

임 국공의 마음도 그때의 기억을 따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으나 금세 다시 정신을 차렸다. 따뜻하지만 위엄이 서린 그의 시선이 엽연채에게 향했다.

“말솜씨가 좋구나. 내 그 옛정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이다. 그 잠을 내게 돌려주어라!”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머리에 꽂은 낡고 오래된 진주 장식이 달린 잠을 뽑아 커다란 녹나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임 국공이 그 은잠을 집어 들어 보니 양쪽 몸체는 조금 검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위쪽에 달린 진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반짝반짝 빛나고 윤기가 흐르며 보기 좋은 옅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이 진주는 당시 자신이 엄청난 공을 들여 직접 구해 온 동해진주東海珍珠이니 당연히 이 진주만의 특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선물했던 잠이 오늘에서야 내 손으로 돌아왔다. 그때 전했던 옛정도 되찾아 왔으니 이제 세월 속에 묻어 두리라!’

“그런데… 국공 대인.”

옆에 있던 고요가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 태자부에 가시면서 이 부인도 함께 데려가시면 나중에 일이 생길 경우…….”

그럴 경우 양왕의 계략에 빠져 국공부는 양왕 편에 섰다고 태자가 오해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태자부에 들어갈 방법은 제가 이미 생각해 두었으니 국공 대인께서 연루되실 일은 없사옵니다.”

엽연채가 재빨리 그들을 안심시켰다. 연루된다면 당연히 자신을 도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요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재차 염려를 표했다.

“이번에 태자부에 가게 되면 임씨 가문의 명예가 추락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태자 전하와 그 주변 사람들 눈에는 임씨 가문과 태자 전하가 서로 의기투합한 걸로 보일 겁니다.”

그 말에 임 국공은 날카로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것이 자신이 기를 쓰고 태자부에 가지 않으려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번에 자신이 태자의 뜻에 따르면 빈틈을 보여 주게 되는 셈인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그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이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국공 대인을 태자부로 초대하여 그림을 감정하자시는데, 그 실제 의도는 다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국공 대인께서 이 일에 응하시면 확실히 태자 전하 앞에서 가문의 명예와 위엄이 손상될 겁니다.

그런데 국공 대인은 차기 황제 폐하의 스승이 되실 분이니, 태자 전하를 훈계하는 것도 대인의 직책이옵니다. 그러니 차라리 태자부를 방문해 태자 전하를 훈계하시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임 국공은 그 말을 들으며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허, 보통 교활한 아이가 아니로구나.”

과연 일석삼조의 좋은 방법이었다.

임 국공부는 대대로 황제의 스승을 배출했지만, 여전히 황제의 권력 아래에 서 있었다. 국공부가 아무리 덕망이 높다 하더라도 황제의 노여움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태자가 도량이 넓은 사람이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즉, 태자가 여러 차례 자신을 초대했는데 자신이 계속해서 거절했으니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부인이 내놓은 방법이 아주 그럴싸했다. 태자부에 방문해서 태자를 훈계하라는 것인데, 그리하면 첫째로 태자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둘째론 임씨 가문의 명예와 황제의 스승으로서의 위엄도 실추되지 않으며, 셋째론 양왕의 옛정에도 보답할 수 있었다. 양왕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나, 자신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여하튼 태자는 지금 덕행에 문제가 있으니, 자신이 태자부에 방문해 그를 훈계한대도 태자는 속으로 찔리는 부분이 있기에 원한을 품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임 국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얼굴엔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엽연채는 임 국공과 잠깐 더 상의를 한 뒤 국공부를 떠났다.

* * *

그녀가 정국백부로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유리 등롱을 들고 문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추길은 저 멀리 엽연채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자 기뻐하며 얼른 곁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그러더니 추길은 얼굴을 찡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지면 더 추워질 것 같아요. 어서 처소로 가시죠.”

그리 말하며 엽연채의 팔짱을 끼고 그녀를 끌어당기며 궁명헌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니 서차간에는 이미 난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엽연채와 혜연은 나한상에 앉아 손을 녹였고 추길은 얼른 따뜻한 차를 내왔다.

“아가씨, 오늘 어디 가신 거예요? 친정집에 가신 거예요?”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영교 아가씨는 만나 보셨어요? 주인마님께서는 뭐라고 하셨고요?”

추길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거듭 물었다.

“만나지 못했단다. 할머니와 고모는 갇혀 계셨어!”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더는 늦출 수 없다. 방법을 강구해 고모를 도와드려야 해.”

“그럼…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죠?”

추길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야께서 아가씨를 제일 미워하시잖아요…….”

그리 말하며 조심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저희가 설득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추길의 걱정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누군가에게 부탁해 할아버지께 압력을 넣자꾸나! 태자 전하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거지.”

“예?”

추길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아주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 태자 전하께서는…….”

묘기화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지 않은가! 추길은 태자에게 아주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전에 그녀는 태자를 숭배하다시피 깊이 존경했다. 태자는 고귀한 신분에 외모도 준수했고 아가씨를 태자부에 들이는 귀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묘기화와…….

이번 일에 대해 추길은 모순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묘기화가 진짜 단수임을 알게 되길 바랐다. 그러면 엽영교가 그에게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나 그와 동시에 세상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지 않길 바랐다. 그래야 태자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았다.

추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묘 공자는 진짜인 것 같아요……. 그러나 태자 전하는 그저 이 일에 연루되셨을 뿐이겠죠.”

그 말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다! 하하, 태자 전하는 선량하고 인자한 분이시니 고모가 피해 입는 걸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으실 게다. 가서 그분께 도움을 청하자꾸나. 종이를 가져오너라.”

추길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침실로 뛰어 들어가 종이를 가져왔다. 엽연채는 배첩을 적은 후 그녀를 통해 태자부로 연통을 보냈다.

* * *

태자부의 정화원.

“묘기화와 혼인할 사람이 그 아이의 고모였다는 것이냐? 그런데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그 아이는 이 일이 전하를 옭아매고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지금 그 엽영교라는 소저가 묘기화에게 시집을 가야만 태자 전하께서 그 일에서 벗어나실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대체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

“그분께서 서신에 자신과 그 엽영교라는 분은 돈독한 사이이며, 자신은 묘기화는 믿지 않지만 태자 전하는 믿는다고 적었습니다.”

금슬은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더니 조롱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 부탁할 데가 없었을 겁니다. 아니면… 자신의 고모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일을 핑계로 다시 마마께 들러붙으려는 거겠지요!”

태자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주묘서를 내쫓은 후로 더 이상 엽연채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니 엽연채는 주묘서와 엮여서 자신도 총애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춘절을 쇠기 전에도 선물을 전달하러 왔었는데 실제로 바쁜 것도 있었지만 일부러 엽연채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그런 후에 지금까지 그녀를 태자부로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태자비는 엽연채 같은 좋은 장기말을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의심받기 쉬운 상황이니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밖에 나가서 그 아이의 여종에게 전하거라. 혼인은 부모의 명과 중매인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이니, 난 그 선을 넘어 부부의 연을 가로막는 짓은 할 수 없다고 말이다.”

금슬은 태자비의 명을 받들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수화문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추길은 금슬에게서 태자비의 말을 전해 듣고 속으로 적잖이 실망했다. 우선 엽영교가 걱정됐고, 또 태자비의 냉담한 태도에도 낙담했다.

추길은 이 일을 계기로 엽영교를 도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엽연채가 태자비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테니, 때가 되면 그녀가 다시 태자부에 자주 방문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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