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24화 (224/858)

제224화

“자, 이제 내가 너에게 판을 깔아 줬으니 임 국공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느냐는 네 능력에 달렸다. 임 국공은 날 뱀이나 전갈 보듯 피하니 너 혼자 가면 된다.”

양왕은 그리 말하며 배첩 한 장을 꺼내 항탁 위에 올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위 마마와 언서, 언동이 그의 뒤를 따랐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양왕 전하께서는 식사를 안 하시는가?”

위 마마가 고개를 돌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희 양왕 전하께서는 밖에서 식사하시는 게 익숙지 않으십니다.”

위 마마는 엽연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항상 양왕비에게 점잖지 못한 내용이 담긴 책자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양왕 일행이 병풍을 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혜연은 그제야 숨을 훅 내쉬었다. 동시에 몸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가씨…….”

“어서 이리 오렴. 식사하자꾸나!”

엽연채는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고 혜연은 할 수 없이 엽연채 옆에 앉았다.

“아가씨, 방금 전에…….”

혜연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어떤 일인지는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에 혜연은 전부 간파했다.

‘아가씨가 양왕과 함께 모반을 꾀하고 계시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혜연은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지고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건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이 일은 추길이에게 알리지 마.”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혜연이 똑똑하고 사려 깊은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과 손발을 맞춰 줄 사람이 필요했다.

혜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은 입이 가벼웠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그녀가 실수로 흘리기라도 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세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러고 어계루 뒤뜰로 가 보니 그들이 타고 왔던 푸른 덮개가 달린 조그만 마차 옆에 검은 덮개가 달린 평범한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마차를 모는 이 역시 흔하게 생긴 젊은 사내였다.

“이 마차를 타고 가지요.”

주운환이 가리킨 마차는 평범한 마차였다. 그는 먼저 마차에 오른 후 엽연채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이에 그녀는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혜연도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말채찍을 휘둘렀고 마차는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삼각 정도 지나자 번화가를 지나 도성 서쪽의 한 골목에 이르렀고, 마차는 그곳에서 멈춰 섰다.

주운환은 양왕이 항탁 위에 올려놓았던 배첩을 엽연채에게 건네며 물었다.

“태자부에 가게 되면 빠져나올 방법은 생각해 놨습니까?”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은 얼른 등받이가 없는 작은 걸상을 땅 위에 내려놓고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도록 부축해 주었다. 엽연채가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작은 골목이었다. 바깥쪽으로 큰길이 보였는데, 번화한 분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적막만이 가득 차 있었다.

엽연채가 밖으로 걸어 나가 보니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저택이 보였다. 저택 밖에는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서 있었고, 거기에 붉은 칠을 한 대문과 수환獸環, 그 위에 줄지어 박힌 장식용 못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저택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대문에는 파란색 바탕에 생동감이 넘치는 금색 글씨가 적힌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편액엔 ‘사조안국공부赦造安國公府’라는 여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태조 황제가 손수 써 준 글씨였다.

엽연채는 당연히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선 혜연과 함께 천천히 돌아갔다. 큰길을 지나 작은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 보니 안국공부安國公府의 동문이 자리하고 있었고, 작은 골목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혜연은 이 일을 마친 후에도 태자부에 가서 물건을 넣어 두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었다. 그녀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일은… 셋째 도련님께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되나요?”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공자께서 날 두 번이나 도와준 건 둘째치고 공자께서는 나에게 빚진 것도 없단다. 그런데 내가 무슨 염치로 매번 도와달라고 하겠니? 설령 공자께서 원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지 않는다. 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가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번엔 반드시 내가 가야 해. 그리해야 양왕 전하께 내가 그분 편이고 그분께 복종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드릴 수 있어.”

엽연채는 지난번 양왕부에서 주운환과 양왕을 만났을 때, 주운환이 자신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며 무슨 일이 있으면 그가 대신하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즉, 자신이 떠맡지 않는 일들은 그가 떠맡게 되는 것이었다. 주운환은 자신이 위험한 일을 무릅쓰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험이 그에게 전가되는 걸 바란 적이 있겠는가?

두 사람은 금세 안국공부 측문에 도착했다. 두 명의 하인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엽연채는 양왕의 배첩을 꺼내 전달한 후 그곳에서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안국공부 서재.

한 중년 사내가 녹나무와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혈옥血玉으로 만든 벼루를 들고 있었는데, 벼루는 윤기가 흐르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또 잔주름처럼 생긴 혈옥의 빨간색 무늬는 대단히 매혹적이지만 요혹妖惑하고 불순한 느낌은 들지 않는 걸 보니 최상급 혈옥으로 만든 게 분명했다.

“이런 벼루는 저희 국공부에 없습니다.”

책상 옆에 서 있던, 흰옷 차림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스물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이 사내는 고상함이 묻어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임 국공이 가장 신뢰하는 문객, 고요였다.

“원래 물건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이밀었습니다. 어쨌든 태자 전하의 심복이니 그들의 체면을 너무 깎아서 좋을 건 없습니다.”

“거절은 했느냐?”

임 국공이 고요에게 물었다.

“국공 대인, 걱정 마십시오. 소생은 국공부의 규율을 잘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받겠다고 했겠습니까?”

고요의 대꾸에 임 국공은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혈옥 벼루를 내려놓았다.

“거절했음에도 그들이 기어코 건넨 것이니 받는 게 좋겠구나. 다음 번 태자 전하의 생신 때 청유쌍이병靑釉雙耳甁(병목 양쪽에 귀 모양의 장식이 달린, 연청색 유약을 칠한 도자기)을 선물로 보내 드려야겠구나.”

그는 그리 말하며 손으로 미간을 눌렀고 그의 눈빛엔 고민하는 기색이 어렸다. 이 심란한 모습에 고요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어제 태자의 심복인 이계가 직접 방문해 배첩을 건네며 ‘전조前朝의 연 대사大師가 그린 <춘추명산도春秋明山圖>를 얻었는데, 이 그림의 진위 여부를 알 수가 없으니 태자부에 방문해 함께 그림을 감정해 달라.’라며 임 국공을 초대했다.

그때 임 국공은 집에 없는 척 그를 만나지 않고 고요에게 시동을 데리고 나가 이계를 접대하라고 했다. 말로는 그림 감정이라고 했지만 태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임 국공의 명성과 평판을 이용해 자신의 오명을 벗으려는 것에 불과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요는 경멸의 눈빛을 내비쳤다. 태자는 위선적이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그의 초대에 정말로 응했다면, 임 국공은 스스로 명예와 절조를 더럽히게 됐을 뿐 아니라 태자 앞에서도 위엄을 잃었을 것이다.

이때, 시동 하나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리, 누가 배첩을 건넸습니다.”

그리 말하며 그는 임 국공의 손에 배첩을 건네주었다.

임 국공이 배첩을 살펴보니 새하얀 매화 꽃잎이 그려져 있었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배첩이었다. 이 배첩은 바로 그 자신이 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왕 전하이시냐?”

고요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임 국공이 콧방귀를 뀌며 시동에게 일렀다.

“어서 안으로 뫼시거라!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지 한번 보자꾸나.”

“양왕 전하께서 뭘 하시고 싶든 간에 국공 대인께서는 응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 배첩이 될 게다.”

고요의 조언에 임 국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 국공과 양왕은 인연이 좀 있었는데, 양왕은 이 점을 이용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국공부는 줄곧 중립 노선을 지켜 왔고 황제에게만 충성했다. 그러니 어느 편에 서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황자들과도 그다지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다.

임 국공은 끈덕지게 구는 양왕에게 정말 진절머리가 났지만, 그래도 그 사소한 옛정을 생각해 양왕에게 세 장의 배첩을 주었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세 번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요청에 응할지 아닐지는 양왕이 어떤 도움을 청하는지를 보고 난 후에 결정할 것이었다.

임 국공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동이 다시 걸어왔고 그를 따라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흰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임 국공은 흰옷을 입은 여인을 보더니 어리둥절했다. 양왕이 오지 않았단 말인가? 게다가…….

이 여인은 어두운 은색 연꽃이 수놓인, 하의가 가슴까지 올라오는 하얀색 유군에 여우 털이 달린 소매 없는 담홍색 외투를 걸치고, 경홍계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홍옥으로 장식된 날개를 펼친 봉황 모양의 머리 장식엔 기다란 순금 술이 달려 있는데, 그녀가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려 본래도 곱고 아리따운 그녀의 작은 얼굴에 맑고 아름다운 빛을 드리웠다.

그야말로 경국지색이었다. 거기다 하얀색 옷을 입고 있으니 말쑥하고 멋스러우며 범속을 초월한 청아한 느낌까지 풍겼다. 그 누구도 비견할 수 없는 빼어난 자태를 뽐내는 미인이었다.

임 국공은 그녀의 용모와 자태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늘 그의 꿈속을 헤매던 조그만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른이 되었다면 분명 이런 절세미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인이었을 터.

임 국공 앞으로 걸어온 엽연채는 몸을 낮추며 예를 올렸다.

“소인, 국공 대인을 뵈옵니다.”

“일어나시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숙했던 임 국공의 얼굴은 그녀의 차림새를 보더니 슬픔과 허전함이 밀려와 목소리도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그대는 양왕 전하의 첩실인가?”

“아닙니다.”

엽연채는 거북한 느낌이 들어 얼른 그의 말을 부인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보니 임 국공은 마흔 살 가까이 되어 보였고, 준수하고 기품 있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소인은 주씨 가문 셋째 공자의 아내인 엽씨라고 하옵니다.”

임 국공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물었다.

“어쨌든 양왕 전하께서 그대를 보낸 게 아닌가? 무슨 일로 왔는가?”

“소인이 국공 대인께 간청을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엽연채가 말을 이어 갔다.

“국공 대인께서도 최근 태자 전하의 일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저희 가문 사람이 그 일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인은 태자 전하께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전하께서는 저를 보려고 하지 않으실 겁니다. 와중에 최근 태자 전하께서 국공 대인을 초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국공 대인께서 저를 데려가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