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혜연아, 따라오너라.”
엽연채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연과 추길은 어리둥절했다. 그동안 밖에 나갈 때 누가 따라 나가는지는 혜연과 추길이 직접 정했다. 엽연채가 누구를 콕 짚어 데리고 나가겠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아가씨, 영교 아가씨와 관련된 일이죠? 저도 가고 싶어요.”
“넌 추위를 많이 타잖아. 아가씨께서 다 널 생각하고 그러시는 거야.”
추길이 입을 뽀로통하게 내밀며 아쉬워하자 혜연은 미소와 함께 그녀를 달랬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이미 문을 나섰기에 혜연은 얼른 그들의 뒤를 쫓았다. 수화문에 도착한 그들은 바로 마차에 올랐고 여양이 마차를 몰았다.
“이번 일은 할아버님께서 태자에게 잘 보이려고 스스로 생각해 내신 방안이 결코 아닙니다.”
사정을 알려 주는 주운환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저께 저녁 무렵 허서가 태자부로 들어가더니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왔어요. 그리고 그다음 날 할아버님과 약속을 잡아 만났죠. 그 후 이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 말에 엽연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엽학문이 자신의 벼슬길을 위해 전에 태자부에 알랑거렸던 듯, 이번에도 또 잔머리를 굴려 엽영교를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벼슬길을 위해서가 아니라 허서를 위해 엽영교를 판 것이었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 * *
도성 안 동쪽 거리에 위치한 어계루. 이 요릿집 3층 끝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귀빈실 문 입구에는 강태공이 낚시를 하는 그림이 그려진 정교하고 커다란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귀빈실 내부에는 붉은색 비단이 깔린 커다란 원탁이 자리했다. 그 위에는 요리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는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전부 생선 요리였다. 창문 아래에는 옻칠한, 교룡 문양이 새겨진 기다란 박달나무 탑상이 놓여 있었고, 양왕은 거기에 기대어 앉아 뼈마디가 선명히 드러나는 손가락으로 항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언동과 언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양쪽에 서 있었고, 조금 더 뒤쪽에는 검은 옷을 입은 엄숙한 표정의 마마媽媽가 서 있었다. 수시로 조앵기를 단속하는 그 마마였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원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한쪽에 서 있는 혜연은 양왕을 보고는 몹시 놀랐다.
지난번에 아가씨가 양왕부에서 열린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양왕이 어쩌다 마음이 동해 초대했던 것뿐이다.
“식사하자꾸나.”
양왕이 미소를 지으며 권하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거절했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 말하고선 속으로 불평을 했다.
‘식사를 하려면 너도 여기 와서 앉아야 할 것 아니야. 탑상에 기대어 앉아 뭐 하는 거니?’
“묘기화 쪽은 원래 운환이에게 가끔씩 지켜보라고 했었다. 운환이가 춘시를 치른 후 방법을 강구해 태자와 그자를 만나게 할 계획이었지. 그리해서… 현장을 포착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
양왕이 픽 웃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엽연채는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물기를 머금은 듯 반짝이는 요염한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이 일이 실제로 묘기화와 태자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전에 주운환도 자주 회방루에 갔던 것이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더는 가지 못했지만.
양왕은 말을 이어 갔다.
“현장을 포착하지는 못했지만 영향을 주긴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가 되어 버렸지. 하여 그들은 당분간 가만히 있으면서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유언비어가 잠잠해지길 기다릴 생각이었지.
태자도 이를 알고 더욱 경계심을 가지며 규율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건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우리도 그쪽의 잘못을 집어내기 어려웠지. 그래서 이 일은 이렇게 대충 넘어가지는 줄 알았는데……. 하하, 그런데 그 허서라는 놈이 내게 직접 허점을 보여 줄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느냐.”
“허점이요?”
엽연채가 묻자 주운환이 대신 대답했다.
“허서가 태자부에 간 뒤로 두 가지 일이 일어났지요. 하나는 엽씨 가문과 묘씨 가문이 예정대로 혼례식을 진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자 전하께서 비밀리에 직접 임 국공 대인을 만나러 간 겁니다.
허서가 태자 전하께 내놓은 계책이 분명합니다. 고모님을 시집보내 소문의 내용을 바꾸고 임 국공을 태자부로 들이는 것이지요.”
또 허서 그 파렴치한 놈이 벌인 짓이었다. 엽연채는 순간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그 임 국공이라는 분은 명성이 자자한 분 같던데요.”
두문불출하며 지내긴 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대제의 이름난 대학자인 임 국공의 이름은 들어 봤다. 어릴 땐 임 국공의 서첩을 보며 글씨를 연습하기도 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보탰다.
“임씨 가문은 백 년 동안 명망을 누려온 학식 높은 명문가이죠. 전조前朝에서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임씨 가문은 끄떡없었어요. 대제가 전국을 통일했을 때, 태조 황제께서 직접 임씨 가문을 방문해 임 노야를 국공國公으로 봉하셨고 관작官爵을 세습하게 하셨으며, 임씨 가문의 가주家主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그때부터 임씨 가문에서는 대대로 황제의 스승이 배출됐고, 가주들은 모두 학식이 깊고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황제의 스승인데도 황실의 권력 다툼에는 한 번도 관여하지 않았어요. 황자들과도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죠. 새 황제께서 제위에 올라야 그 세대의 가주가 황제의 스승이 될 겁니다.”
설명을 들은 엽연채가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지금…….”
양왕이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추론에 동조했다.
“지금 태자는 임 국공이 태자부를 방문하게 하려고 한다. 임 국공은 훌륭한 대학자이니 그자가 태자부에 손님으로 오겠다고 하면 태자의 평판은 자연히 회복될 게다.”
“그럼 이제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해야 할 일은……. ‘천자복환령’은 준비가 다 되었느냐?”
양왕은 엽연채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의 매력적이고 풍류가 넘치는 두 눈에 웃음기가 어리었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찌감치 준비를 마쳤습니다. 태자부의 서재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태자는 지금 의심받기 쉬운 행동은 피하는 것이 좋은 다사다난한 시기를 겪고 있으니, 아주 사소한 일조차 일으킬 엄두를 못 낼 것이다. 그러니 너를 태자부로 부르는 건 더더욱 하지 못할 게다. 네가 간대도 태자와 태자비는 너를 만나 주지 않을 테지.”
엽연채는 양왕이 뭘 하고 싶은지 눈치챘다.
“저더러 임 국공 대인을 이용해 태자부에 들어가라는 건 아니시죠?”
“맞다.”
양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엽연채는 까만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제가 국공 대인을 어떻게 만나 뵐지는 차치하고, 우선 태자 전하께서 임 국공 대인을 초대하시는 것부터 이야기하시죠. 양왕 전하께서는 그분이 정말로 초대에 응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초대를 거절하면 낙씨 가문이나 장씨 가문 사람을 초대할 겁니다.”
주운환이 대신 답했다.
“이 두 가문은 임씨 가문만은 못하지만 명망이 아주 높은 학자 가문이고 초대하기도 더 쉬워요. 하지만 태자 전하는 명예와 평판을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니 임 국공 대인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설령 임 국공이 망설이더라도… 그자가 태자부에 방문하고 너까지 데려가게 할 방법이 내게 있다.”
양왕은 ‘픽’ 하고 웃더니 풍류가 넘치는 두 눈으로 엽연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자신이 데려온 마마를 쓱 쳐다봤다.
“위 마마.”
“예, 전하.”
대답한 위 마마는 엽연채 곁으로 걸어가 예를 올렸다.
“주 부인, 소인과 함께 가시지요.”
엽연채는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귀빈실 오른쪽에는 병풍이 하나 있었는데, 그 병풍 뒤로 조그마한 난각暖閣(난방 설비를 하여 몸을 녹일 수 있게 했던 작은 방)이 있었다. 난각 안에는 화장대와 옷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엽연채는 위 마마를 따라 난각으로 들어갔고 주운환은 양왕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략 이각이 지나자 엽연채가 마침내 밖으로 나왔고 고개를 돌린 주운환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엽연채가 옷차림을 바꿨던 것이다.
그녀는 하의가 가슴까지 올라오는 노란빛을 띤 하얀색 유군을 입고 있고 경홍계驚鴻髻(머리 위 양쪽으로 뿔이 난 듯한 형태의 올림머리) 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홍옥으로 장식된 날개를 펼친 봉황 모양의 순금 장식이 오른쪽에 꽂혀 있고 기다란 순금 술이 이마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엽연채는 본래 절세미녀인지라 어떻게 꾸미든 간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고 요염하며 맵시 또한 있었다. 또 그녀는 평소 붉은색을 선호했는데 붉은색은 그녀의 뛰어난 외양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런데 오늘 흰색 계열의 옷을 입으니 화려한 아름다움은 줄어들고 범속凡俗을 초월한 듯한 청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 색다른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와 주운환은 눈을 떼지 못했다.
“이쪽으로 오너라.”
양왕의 멋스러운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엽연채가 곁으로 걸어가자 그는 품 안에서 기다란 박달나무 상자를 꺼냈다.
양왕이 상자를 여니 안에는 평범하고 낡아 보이는 진주 잠簪이 들어 있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잠의 몸체 윗부분엔 간단하게 진주 한 개만 상감되어 있었는데, 엄지손톱 크기만 한 이 진주는 반짝반짝 빛나고 윤기가 흘러 한눈에 봐도 값어치가 상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귀한 진주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은잠에 상감되어 있어 더욱 돋보였고, 서로 상반된 분위기가 만들어 내는 수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양왕이 그 진주 잠을 집어 들자 엽연채는 그의 앞에서 몸을 숙였고 그는 그 잠을 엽연채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주운환은 그 모습에 기분이 언짢아졌으나 침묵했다.
엽연채는 얼떨떨해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뻗어 머리 위를 만져 보았고, 양왕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내 며느리와 꼭 닮았구나.”
엽연채는 그 말에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전하, 전하의 아드님은 올해 몇 살이십니까?”
엽연채의 이 말은 양왕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양왕은 잘생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주운환을 쳐다보며 말을 더했다.
“나에게는 운환이가 친아들과 진배없다.”
그러자 엽연채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저희 공자님을 정말 살뜰히도 신경 써 주시는군요.”
그 말에 주운환은 ‘피식’ 하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살짝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