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21화 (221/858)

제221화

이튿날 아침, 엽학문은 서둘러 회미천하로 갔다. 귀빈실로 들어가 보니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는 허서와 엽승덕의 모습이 보였다.

“서야, 시험은 어떻게 봤느냐?”

엽학문은 긴장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가며 물었다.

“할아버지, 시험은 잘 봤습니다.”

허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이어 갔다.

“제가 익힌 지식을 전부 쏟아 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몇 문제는 전에 풀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를 풀었을 때 스승님께서 저를 칭찬하셨죠.”

허서는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고, 이번 춘시에서 자신이 그동안 익힌 지식을 전부 활용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엽학문은 설렘과 흥분이 북받쳐 올랐다.

“참, 왜 네 어미는 안 보이는 게냐?”

엽학문은 허서가 시험을 잘 봤으니 함께 축하하기 위해 자신과 약속을 잡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자父子만 보이고 은정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는 제 과거 시험 때문이 아니라 고모의 혼사 문제 때문에 마련한 것입니다.”

허서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것이냐? 설마 네 고모에게 중매라도 서 주려는 게냐?”

엽학문은 ‘에휴’ 하며 탄식했다. 자신의 여식은 정말이지 골칫덩어리였다. 엽학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에는 그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여식을 끔찍이 아꼈다. 그런데 최근 반년 동안 너무 소란을 피워댔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소란을 피운 게 공연한 일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묘기화에게는 절대로 시집을 가서는 안 되었다. 그런 자에게 시집을 갔다가는 되레 집안 체면에 먹칠을 하게 되고야 말 것이다.

“예. 고모께 혼처를 소개해 드리려고요.”

허서는 엽학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설마 너랑 같이 수학하는 서생이냐?”

엽학문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그러면서 허서가 공부하는 서원을 떠올렸다. ‘명산서원’은 국자감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도성에서 손꼽히는 서원이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집안 형편도 나쁘지 않을 테니 아마도 진사로 합격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엽학문의 눈빛엔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아닙니다.”

허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묘씨 가문의 묘기화 공자입니다.”

“뭐라?”

엽학문은 깜짝 놀라 낯빛이 변했다.

“묘기화는 단수다! 그 녀석에게 시집을 가면 우리 정안후부의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거기다 그런 녀석에게 시집을 가면 일생을 망치게 될 거다.”

엽학문은 엽영교에 대한 애정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었다.

“서야, 묘씨 가문에서 너에게 잘 좀 말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냐? 네가 너무 순진해서 그자들의 꾐에 넘어간 거다.”

엽학문은 이리 추측했으나 허서가 대번에 부정했다.

“묘씨 가문에서 저한테 두둔해 달라고 부탁한 게 아닙니다. 게다가 전 묘씨 가문 사람들과 모르는 사이입니다. 할아버지, 이런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지 왜 생각을 안 하십니까!”

“묘기화가 아니겠느냐?”

엽학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에 허서의 눈에 조롱기가 스쳤다. 어쩐지 엽학문은 분명 삼갑三甲 동진사同進士(전시 합격자 중 삼갑에게 주는 칭호)로 호명되었고 공훈도 있는 귀족인데, 수십 년을 조정판에서 굴렀음에도 아직 서책이나 관리하는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과연 정치적 감각이 형편없어서였다.

“바로 태자 전하이십니다.”

허서의 입꼬리에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태자?’

엽학문은 깜짝 놀랐다. 그는 품계는 낮아졌지만 직위는 낮아지지는 않아 여전히 비서소감이었다. 그러나 정4품에서 종5품으로 품계가 낮아져 조정에 나갈 자격마저 박탈당했다.

묘기화 사건이 터진 후 엽학문은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고 생각했다. 파혼했다 하더라도 묘기화는 처조카였으니 그는 동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싶지 않아 사흘간 휴가를 냈다.

또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듣고 싶지 않아 해 하인들은 감히 그의 앞에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엽학문은 이 일이 태자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전연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허서가 묘기화와 태자를 둘러싼 소문을 들려주자 엽학문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허서가 재차 말을 이었다.

“지금 태자 전하께서는 소문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고모께서 원래대로 묘씨 집안에 시집만 가시면 묘 공자가 단수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자 전하 쪽은…….”

엽학문은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곰곰이 따져 봤다. 그의 기억으론 전에 몇 번이나 정성껏 태자에게 선물을 바쳤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별조차 없었다. 그나마 그땐 바쳤던 것들이 재물에 불과하니 없어도 그만이지만, 이젠 그의 여식이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아끼고 귀여워한 여식이었다.

여식의 일생을 걸고 묘기화에게 시집보냈는데도 태자 쪽에서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응도 없고 보답도 하지 않는다면? 그만 막대한 손해를 보는 게 아닌가.

생각을 마친 엽학문은 허서의 말에 찬동하지 않았다.

“전에 몇 번이나 태자부로 선물을 보냈는데 결과는… 에잇! 거기다 네 고모만 묘기화에게 시집보낸다고 문제가 바로 해결되겠느냐? 괜히 잔머리 굴리다가 영교만 손해를 볼 것이다.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태자 전하에게서도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할 거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허서가 그를 안심시켰다.

“제가 이미 태자 전하를 만나 뵈었습니다. 고모를 시집보내는 것 외에도 태자 전하 쪽에도 계획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전하께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뭐라?

엽학문은 그가 진짜 권력자인 태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흥분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가 태자부에 들어가서 태자 전하를 뵈었다는 말이냐? 어떻게?”

태자가 아닌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엿한 후작인 자신도 선물을 바치러 직접 방문했지만, 그저 응접실로 불려가 집사의 접대를 받은 다음 집으로 돌려보내진 게 다였다. 그런데 이름 없는 한낱 거인에 불과한 허서가 태자와 대면했으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저와 전하 사이에 인연이 조금 있습니다.”

허서는 자신과 태자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면서 지난번 추씨 가문 일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엽학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의 손자는 과연 능력이 출중한 아이였다. 태자의 총애를 받다니! 이번 일이 잘된다면 손자는 태자라는 커다란 배에 올라타게 되는 셈이니, 돛을 올리고 출항하여 더 멀리 나아갈 날도 머지않았다.

이건 바란다고 얻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다. 향후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허서가 그를 잘 따라가기만 한다면, 허서는 대신들 중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엽학문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벅차올라 혈색이 좋아지고 얼굴에 윤기까지 흐를 정도였다.

‘하지만 영교는……. 손자를 위해 딸을 팔아 버리면, 내가 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파렴치한이 되는 것 아닌가?’

“할아버지, 저희가 이리하는 건 다 고모를 위해서입니다.”

“그게 무슨……?”

허서의 말에 엽학문은 어안이 벙벙했다.

“고모와 묘 공자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이고 정혼한 지도 오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고모께서는 그동안 묘 공자를 깊이 사모해 왔는데, 정작 그분은 고모를 좋아하지 않으니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으셨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내를 좋아하니… 그래서 홧김에 파혼을 하신 거죠.”

엽학문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영교는 전부터 기화를 사모했다. 지금은 그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뿐이지. 기화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게다. 그러니 영교가 평생 후회하지 않게 우리가 도와주자꾸나.

단수이니 뭐니 그런 건… 밖에서 사내아이들과 놀아나는 사내들이 얼마나 많으냐. 하지만 결국 장가도 들고 아이도 낳고 잘들 산단다. 부부 금슬? 기화도 그저 잠깐 정신 못 차리는 것뿐이니 혼인하면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을 게다.”

엽학문은 말을 더할수록 마음속에 자리하던 죄책감이 점점 옅어졌다. 그는 또 이렇게도 덧붙였다.

“지금 묘씨 가문은 나락에 떨어졌다……. 그런데 우리가 이리하면 묘씨 가문을 돕는 셈 아니겠느냐. 그럼 묘씨 가문이 영교에게 고마워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거고 그 아이를 금지옥엽으로 애지중지할 것이다.”

이게 무슨 불구덩이라는 말인가. 행복한 가정이겠지! 이리 말을 잇자 엽학문 자신마저도 그 말을 믿을 지경이었다.

“그럼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묘씨 가문과 상의하세요. 그런 다음 각 가문에 청첩장을 보내시고요. 원래 정했던 혼례식 날짜인 이번 달 스물엿새입니다. 아직 보름이 남았네요.”

엽학문은 자신과 허서 앞에 탄탄대로가 천천히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정이 격양된 채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염려를 표했다.

“그런데 네 할머니가…….”

묘씨는 엽학문보다 거의 스무 살가량이 어렸다. 나이 든 남편이 젊은 아내를 맞이했으니 당연히 그녀를 끔찍이 아꼈다. 그런데 지금 아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딸을……. 아내는 사리에 어두운 사람이니 분명 이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굳이 할머니께 긴말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허서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방 안에 가둬 두시면 되죠. 혼례식을 올리고 나면 할머니도 기뻐하실 겁니다.”

엽학문은 허서와 잠깐 더 상의한 뒤 회미천하를 떠났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갑자기 몇십 년은 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엽학문은 안녕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이를 시켜 우락부락한 어멈 열 명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들더러 안녕당 대문을 걸어 잠그게 한 다음 주위를 에워싸고 지켜보게 했다. 엽영교의 처소 또한 철통같이 지키게 했음은 물론이었다.

묘씨는 방 안에서 구럭을 뜨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와 당황했다. 이때 전 마마가 쫓겨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응? 밖에 무슨 소란이라도 났는가?”

묘씨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묻자 전 마마가 안으로 걸어오며 굳은 얼굴로 고했다.

“마님……. 밖에 무슨 일이 난 걸까요? 가산이라도 몰수당하는 걸까요?”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묘씨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밖에서 힘깨나 쓰는 어멈 몇 명이 달려오더니 저를 밀어 넣으며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전 마마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묘씨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반쯤 만든 구럭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문발을 걷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과연 열 명 좀 안 되는 어멈들이 문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어?”

아연실색한 묘씨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어멈들이 그녀를 안으로 밀며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님, 집안에 일이 있어 당분간 밖으로 나오실 수 없습니다.”

묘씨는 놀랍고 또 두려웠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설마 집안에 정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묘씨는 차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집안에 화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그저 안에 머무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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