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허서는 기분이 영 별로였지만 그저 문 앞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저녁 무렵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이계가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허서는 이계를 보자마자 얼른 다가가 인사했다.
“어르신.”
“자네는…….”
사람을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한 이계는 허서를 보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여긴 뭐 하러 왔느냐?”
“오늘 춘시가 끝나 태자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전 전하께서 지금 어떤 일로 골치 아파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허서의 말에 이계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자가 지금 태자와 묘기화 사이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무슨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게냐? 어디 한번 말해 보겠느냐?”
“저… 어르신, 제가 직접 태자 전하께 아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허서는 간곡히 부탁했다. 이계가 자신의 공을 가로챌 수도 있으니 당연히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했다. 안 그러면 이계가 자기가 낸 계책처럼 태자에게 아뢸 것이다.
한편, 이계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허서가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어리석은 계책을 내놓는다면 어쩐단 말인가. 자신이 허서를 데리고 들어가면 재수 없는 일도 분명 함께 당하게 될 것이었다.
“어르신…….”
허서가 간절한 얼굴로 이계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계는 요 며칠 동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자의 모습이 떠올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너라. 이번 일도 그르치게 되면 내 너의 가죽을 벗겨 버릴 것이다!”
허서는 일개 환관이 자신에게 엄포를 놓자 기가 차 허허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허서는 싸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이계는 그래 봐야 환관 나부랭이 불과했다. 자신이 시험에 합격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면 이계를 가만두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후 태자의 서재 앞에 도착했다. 이계는 그에게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침울한 표정으로 기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태자는 이계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후 마마를 찾아뵈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째서 이리 빨리 돌아온 게냐?”
“전하, 소인이 측문에서 허서와 마주쳤습니다.”
이계가 몸을 굽히며 고했다.
“허서라니?”
태자는 이미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작년에 누구였더라……. 아, 생각났습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의 부친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이계가 이리 말하고 나서야 태자는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허서 말인가?
“그놈은 뭣 하러 데리고 들어왔느냐?”
태자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고 어둡게 변했다.
“그자가… 전하의 발등에 붙은 불을 꺼 드릴 계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계의 설명에 태자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이거라.”
태자의 모사와 황후 모두 태자에게 참으라고 했다. 그래 봐야 증거가 하나도 없는 유언비어에 불과하니 시간이 좀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태자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이런 오점은 한 번 생기고 나면 평생 동안 자신을 쫓아다닐 테니 태자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계책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 있으니 좋든 싫든 간에 우선 만나 보고 다시 이야기하면 될 것이었다.
이계가 허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허서는 우선 태자에게 예부터 올렸다.
“소생,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인사는 되었다.”
태자가 손사래를 치며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계책이 무엇이냐?”
“아주 간단합니다. 전하께서 평판만 되찾으시면 됩니다.”
이계는 허서의 대답을 듣고 표정이 확 어두워지더니 노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힐난했다.
“그걸 누가 모르냐? 네 말은 지금 전하께서 밖에 나가 선행을 베푸셔야 한다는 말이냐? 가난한 자에게 죽을 나누어 주는 뭐 그런 거 말이냐?
전하께서는 그런 일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평판에 흠집이 난 후에야 그런 일을 하면 평판을 되찾으려는 목적이 있음을 누가 모르겠느냐? 도리어 전하께서 정말… 그리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더냐?”
“아닙니다.”
허서는 단박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판은 전하께서 되찾으시는 게 아니라 묘 공자 쪽에서 되찾아야 합니다. 묘 공자가 아내만 얻으면 됩니다.”
“아내를 얻는다고? 이제 와서 또 누굴 얻는다는 말이냐? 게다가 얻더라도 사람들은 그저 이 일을 덮기 위해 그리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계는 딱 잘라 부정했다. 자신들이라고 그 수를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효과가 미미해 안 하느니만 못했다.
그러나 허서는 꿋꿋이 제 의견을 밝혀 나갔다.
“엽영교 소저 말입니다. 원래 묘 공자님의 정혼녀였던 그분이 혼사를 물리는 바람에 일이 더욱 심각해진 겁니다. 그분이 정해진 날짜에 혼례식을 올리겠다고 동의만 하면 문제는 바로 해결됩니다.
혼례식 날짜는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엽 소저가 묘 공자가 밖에 따로 여인을 두고 있다고 의심하는 바람에 엽씨 가문에서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죠. 그에 반해 묘씨 가문에서는 일찌감치 초대장을 돌렸습니다. 그 뒤 양가가 파혼을 했지만, 묘씨 가문은 수치스러운 나머지 지금도 초대장을 거둬들이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원래 정해졌던 날짜에 혼례식을 마치고 사람들에게 파혼한 적 없다고 이야기만 하면 뜬소문이 되어 버립니다. 정혼녀가 묘 공자에게 시집오겠다고 하고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 묘 공자과 윤강부 공자의 결백이 입증될 수밖에 없죠. 그럼 윤강부 공자의 행실이 단정치 않아 실수로 그분의 몸 위로 넘어진 것이 됩니다.”
이계와 태자는 그 말을 듣더니 실행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후에.”
허서가 계속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임 국공國公을 태자부로 초대하시면 됩니다. 임 국공은 유명한 유학자이십니다. 그분이 청렴하고 강직하신 데다 덕성과 명망도 높으신 분인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을 손님으로 초대하기만 하면 전하의 평판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될 거고, 그렇게 두 일이 합쳐지면 전하의 오명은 자연히 벗겨질 겁니다. 설령 완벽하게 벗겨지지는 않는대도 저희 쪽 사람을 거리로 내보내 세평世評을 주도하면 전하의 훌륭한 평판은 회복될 겁니다.”
태자는 두 눈을 번뜩이더니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훌륭한 계책이구나!”
이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자는 바로 자신이 데리고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들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었다.
태자의 칭찬을 받은 허서는 얼굴에 희색이 돌더니 용기를 내어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전하……. 소인이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거라!”
“소인이 엽씨 가문 적자로 입적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도와주십시오.”
뜻밖의 말에 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도와준다는 말이냐? 설마 엽… 아무개의 본처를 폐하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허서는 웃으며 태자를 안심시켰다.
“저희가 이미 대책은 마련해 두었으니 전하께서는 도와주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그러더니 허서는 자신의 계획을 태자에게 아뢰었고, 이야기를 듣던 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허서라는 놈, 정말이지 악랄한 놈이구나! 보통 악랄한 게 아니다!’
그러면서도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다면 내 한몫 거들어 주마.”
“황송하옵니다, 전하.”
허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데 아주 기뻐하며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이에 태자는 허서를 쳐다보며 그를 추켜세웠다.
“넌 그저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한낱 거인이 아니었구나. 나이도 어린데 이렇게 총명하고 재능과 지혜를 고루 갖췄다니.”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허서가 겸손한 얼굴로 사양했다.
“과찬은 무슨. 네가 내 모사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태자는 그가 마음에 들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그를 크게 칭찬했다.
허서는 가슴속에서 흥분이 밀려왔다. 자신은 이미 태자의 눈에 들었으니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분명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다. 물론 만에 하나 낙방한다 해도 그리될 것이다. 아무래도 진사로 합격하게 되면 더 많은 패를 손에 쥘 수 있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시작이 아주 좋았다.
“그럼 엽씨 가문 쪽은…….”
태자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꼬리를 흐렸다.
“제가 하겠습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허서는 호언장담했다.
“좋다. 그럼 어서 가 보거라!”
태자는 쾌활하게 웃으며 그를 내보냈다. 이 일은 빨리할수록 좋았다.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허서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태자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그가 진심 어린 미소를 보인 건 지금이 처음이었고, 마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전하, 이젠 두 다리 쭉 펴고 주무셔도 되겠습니다.”
이계가 말했다.
“두 다리 쭉 펴고 잔다고?”
그러나 태자는 이계의 말에 냉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는 묘기화를 확실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일시적으로 문제가 해결이 됐을 뿐이다. 이 일이 잠잠해지면 묘기화라는 후환을 뿌리째 뽑아 버릴 것이다.
“그런데…….”
태자가 아래턱을 매만지며 말머리를 돌렸다.
“난 전에 허서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었다. 태자비와 송초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 둘 때문에 하마터면 내가 훌륭한 신하를 잃을 뻔했구나.”
“태자비 마마의 의견은 어찌 됐든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지요. 어찌 태자 전하의 지략에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송 공자는…….”
이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송 공자는 전하의 모사이니 전하께서 허서의 능력을 높이 사시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겁니다.”
태자는 그 말에 픽 하고 냉소를 흘렸다.
한편, 허서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태자부를 나왔다. 그는 즉시 사람을 시켜 ‘내일 아침 회미천하에서 만나시죠.’라는 서찰을 엽학문에게 보냈다.
그 시각, 엽학문은 집에서 엽승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서는 어떤지, 시험은 어떻게 봤는지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엽승덕은 송화 골목에 틀어박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그의 손자가 서찰을 보내왔다. 엽학문은 당연히 흥분에 휩싸였다. 손자가 상주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손자를 만나지 못했다. 이제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엽학문은 기쁘기 한량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