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19화 (219/858)

제219화

“묘 공자와 윤 공자는 그저 우연히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을 뿐이오. 계단에서 미끄러질 때 실수로 바지가 벗겨진 게지.”

교 어사는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묘씨 가문도 인정했잖소. 그렇지 않으면 오래전에 혼약을 맺은 정혼녀마저 파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 일은 묘 시랑이 설명하시지요.”

“묘 시랑은 병가를 냈소.”

요양성이 묘기전을 찾자 사부상서史部尙書 자학전이 말했다. 이 소식에 교 어사는 정신이 번쩍 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묘 시랑이 켕기는 게 있나 보군! 그러니 얼굴을 들고 조정에 나올 수 없었던 게지.”

그러자 태자가 싸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물러서서는 안 되는 때인데 묘기전이 물러설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태자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교 어사는 참으로 한가하나 보오? 사실을 중시하지 않고 근거 없이 허튼소리를 하는 걸 보니 말이오.”

그 말에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그 역시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어사에게 화가 난 것이다. 그는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문은 무서운 것이니, 어사들은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 양왕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어사들은 소란을 피우는 게 즐겁나 보오. 평소에는 날 가지고 소란을 피우더니 이젠 나한테 질려서 형님의 일로 소란을 피우는구려.”

그 말에 어사들은 화가 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양왕은 정말로 방탕한 생활을 했고, 증거도 분명히 있었다.

이때, 사부상서가 공수하며 나섰다.

“황제 폐하 말씀이 옳습니다. 태자 전하의 일이든 묘기화와 윤강부의 일이든 간에, 증거가 없는 일은 쉬이 이야기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 두 사람은 그저 함께 굴러떨어진 것뿐이니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윤강부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은공의 손자가 사내들에게 화를 입히고 다닌다며 평소 승은공을 탄핵하는데, 이 또한 증거가 없는 일이옵니다.”

조회에 참석한 신하들은 앞의 이야기는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마지막 부분을 듣게 되자 말문이 막혀 버리며 표정이 미묘해졌다.

윤강부의 일은 확실히 증거는 없었으나 그건 그저 인정하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그의 총애를 받는 사내들은 그저 저녁에 그와 촛불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내들끼리 함께 목욕하며 서로 등을 밀어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가 들어도 명확하지 않은가.

태자 또한 묘 공자와 저녁에 촛불 아래 한 침상에서 함께 잠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들 또한 자신들이 단수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윤강부와 태자는 동일한 비밀을 갖고 있던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더는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지만 모두들 이 일에 대해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다 알고 있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자신과 묘기화에게 단수라는 낙인이 찍혔다고 생각해 한층 낯빛이 어두워졌다.

연로한 황제는 재차 마른기침을 하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조회를 파했다.

“됐으니 다들 이만 물러가거라! 오늘 춘시 합격자 명단을 공포할 것이니 그대들은 속히 그 준비를 하거라. 향후 전시殿試와 과거 시험 합격자를 위한 연회도 있을 것이니 태자는 이를 잘 준비하거라.”

전시와 과거 시험 합격자를 위한 연회는 요 몇 년간 태자가 준비해 왔다.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황제는 더더욱 그의 권한을 줄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소문을 묵인하는 꼴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황실은 그런 일로 체면이 깎여서는 결단코 안 됐다.

조회가 끝나자 방금 전 윤강부와 태자가 함께 거론됐던 일이 금세 거리로 퍼져 나갔다. 백성들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흥이 올라 더욱더 그 소문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비밀리에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윤강부가 아직도 자신이 단수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데! 그저 촛불 아래 밤에 이야기를 나눈 거고 함께 등을 밀어 주며 목욕을 한 거라고 했다지!”

“맞아. 흐흐. 태자 전하도 그 묘 공자와 함께 촛불 아래 담소를 나눴다고 하던데.”

물론 이런 대화는 감히 공개된 장소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들 뒤에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퍼뜨렸다.

결국 태자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평판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품위 있고 당당하며 격조 있던 예전의 모습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 심리라는 게 그랬다. 과거의 평판이 좋을수록 그 사람의 망가진 모습을 볼 때 더욱더 흥이 나곤 하는 법이었다.

* * *

유시酉時(오후 5시~7시), 마침내 춘시가 끝나고 거인들이 잇달아 시험장 밖으로 나왔다.

장장 8박 9일간 지속되는 시험을 치르고 나니 모두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으나, 그 노곤함이 그들의 얼굴 위로 교차하는 여러 가지 감정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멍한 눈빛을 보이는 이도 있고 후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도 있으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주씨 가문 마차는 진작부터 시험장 문 앞 공터에서 주운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 백야와 엽연채가 함께 그곳에 와 있었고 여한은 끌채에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주운환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청색 도포는 주름이 졌고 머리도 살짝 헝클어졌으며, 재능이 넘쳐 보이는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주 백야는 그를 보자마자 흥분한 모습으로 달려갔다.

“셋째야, 시험은 어떻게 봤느냐? 어?”

“그럭저럭 봤습니다.”

주운환은 걸어오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럭저럭 봤다는 게 무슨 뜻이냐?”

주 백야는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아 다시 캐물었다.

“책론은 어떻게 썼느냐? 팔고문 제목은 무엇이었고?”

그러나 주운환은 또 대강 대꾸할 뿐이었다.

“지금 물어보셔도 소용없습니다. 시험은 이미 끝났으니까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시험에 붙지 않아도 이미 거인입니다. 그러니 결과를 기다리시지요.”

마음이 초조해 미칠 것 같은 주 백야는 그의 말을 듣더니 표정이 확 굳었고 이어서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보아하니 시험을 못 본 게 분명했다.

저 멀리 부자가 걸어오는 모습을 본 추길은 주운환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셋째 도련님의 저 표정을 보니… 분명 떨어지실 거예요.”

그러자 엽연채가 그녀를 홱 쏘아보며 반박했다.

“공자께서는 늘 저런 냉담한 표정을 지으셔. 그리고 공자께서 설령 신바람이 나서 뛰어오시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 다른 거인들을 봐. 대부분 자신감 충만한 얼굴을 하고 의기양양해하며 걸어 나오고 있지. 그건 그저 저들이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답을 적었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그런 거야.

하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다고 정말로 가장 좋겠어? 저렇게 기뻐하고 우쭐대는 사람들은 모두 시험에 붙겠고? 그런 거라면 개나 소나 다 장원이겠구나.”

그 말에 혜연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 주운환과 주 백야는 이미 그들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도련님!”

마차에서 뛰어내린 여한은 주운환을 끌어당겨 먼 곳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닥거렸다. 그러자 주운환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한아, 뭐 하는 것이냐? 셋째는 아흐레 동안 고생을 했다. 어서 가자꾸나.”

주 백야가 마차 곁에 서서 소리를 쳤다.

그러자 주씨 가문 사람들은 얼른 마차에 올랐고 여한이 말채찍을 내려침과 동시에 마차는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후 검은 덮개가 달린 마차도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엽승덕, 은정랑, 엽균이었다.

오고 가는 거인들 틈에서 세 사람이 한참을 기다리니 그제야 절뚝거리며 걸어 나오는 허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입고 있는 도포는 지저분하게 변해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으며 얼굴도 꾀죄죄했다.

“서가 나왔어요!”

엽균은 그를 보더니 제일 먼저 달려갔다. 이어 엽승덕과 은정랑도 그에게 다가갔고 세 사람은 앞다투어 그를 부축하겠다고 했지만 엽승덕과 은정랑은 결국 엽균을 당해 내지 못했다.

“서야, 괜찮으냐?”

엽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전… 괜찮아요.”

허서는 한숨을 돌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에 내내 갇혀 있는 게 너무 힘들었을 뿐이에요.”

그 말에 은정랑과 엽승덕은 마음이 아려 왔다.

응시생이 답안을 쓰는 방은 매우 비좁았다. 안에는 답안을 작성할 때 사용하라고 제공된 높이가 다른 두 개의 판지板紙가 있었는데, 밤에는 그 위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또 안에는 변기도 하나밖에 없었고 아흐레 동안 먹고 싸는 일을 모두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이라 허약한 응시생은 심지어 그 안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시험은 어떻게 봤느냐?”

은정랑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허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엔 잘 본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은정랑과 엽승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엽균은 소리까지 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서야, 난 네가 최고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험에 반드시 붙을 게다!”

“가시죠! 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은정랑이 말했다.

그들은 우르르 달라붙어 허서가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해 준 후, 곧장 송화 골목의 영존거로 향했다.

허서는 목욕을 마친 후 식사를 하며 그가 없는 동안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을 엽승덕을 통해 들었다. 그는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서둘러 문을 나섰다. 허서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태자부였다.

작년에 엽승덕이 감옥에 들어갈 상황에 처하자 허서는 그 패자牌子를 들고 태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며 추씨 가문을 날려 버릴 계책을 내놓았다. 이에 태자는 허서를 눈여겨봤고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태자가 자신을 정말로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자신이 중요한 일을 부탁할 때 아마 도와줄 것이었다.

태자부 동쪽 측문에 도착한 허서는 서찰을 건넸다. 잠시 후, 한 시녀가 나오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전하께서는 당신 같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시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허서는 어리둥절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작년에 태자는 분명 자신을 아주 높이 평가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참, 아버지께서 최근 태자부가 다사다난한 시기를 겪고 있다고 알려 주셨지. 태자 전하께서 유언비어에 시달리시니 나를 만날 기분이 아니신가 보군.’

자신에게는 그 일을 해결할 계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태자를 만날 수조차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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