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이 때문에 태자는 묘기화를 죽이고 싶어도 지금까지 손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묘기화는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공연장에서 그 연극을 매일 공연하도록 했다. 그러는 바람에 손님이 모두 떨어졌는데도 계속 공연이 이어졌으며, 나중엔 아예 공연장을 사서 계속 그 연극을 공연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혼인까지 마다하면서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태자는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고, 위태롭다는 생각만 들었다. 묘기화가 이렇게 수작을 부리면 그 일이 폭로될지도 몰랐다. 태자는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며칠 전 묘기화가 또 서신을 한 통 보냈던 것이다.
혼례식 전에 그를 꼭 한 번 봐야겠다는 내용이었다. 태자는 할 수 없이 송초를 보내 묘기화를 만나게 했고 그에게 손을 쓰라는 지시도 함께 내렸다.
여기서 왜 윤강부가 관계됐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태자가 한동안 남색에 푹 빠지는 지경에 이른 것이 다 윤강부의 탓이었기 때문이다. 윤강부는 태자와 묘기화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고, 당시 이 관계를 빠르게 진전시킨 것도 윤강부였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니 태자는 그저 역겨움이 몰려올 뿐이었다. 그는 서재의 기다란 책상 앞에 앉아 두 손을 꽃무늬가 조각된 녹나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훤칠한 그의 얼굴에는 음산하고 매서운 기운이 가득했고 송초와 이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 게냐.”
태자의 날카롭고 싸늘한 눈빛이 송초에게 향했다. 그러자 송초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변명했다.
“윤 공자 때문입니다. 그때 그 위치에서 밀기만 했으면 됩니다. 설사 그분이 스스로 그곳까지 미끄러지지 못했더라도 윤 공자께서 그분을 밀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부딪혔을 겁니다. 그런데… 윤 공자께서 그렇게 뻔뻔스러운 행동을 하실 줄은…….”
그때 기억이 떠오르자 송초는 경멸의 눈빛을 보였고 낯빛이 매우 어두워졌다.
윤강부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줄만 아는 한량처럼 보이지만 실체는 달랐다. 사실 꾀가 없는 사람이면 어떻게 그리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윤강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태후가 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는 이미 나이가 많으니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윤강부는 앞으로도 이렇게 방종한 한량의 생활을 이어 나가기 위해 일찌감치 태자에게 빌붙었고, 암암리에 태자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주었다.
그러나 벽수루 일에서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윤강부를 불렀던 것이다. 윤강부는 전부터 묘기화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가 태자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감히 건들지 못했다.
이제 묘기화는 더 이상 태자의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묘기화를 건들기는 두려웠다. 묘기화가 크게 노하면 태자에게 위협이 되는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윤강부는 행동에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벽수루 귀빈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윤강부는 묘기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윤강부는 뜻밖에도 자신의 바지를 벗어 버렸다. 정말이지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후 윤강부는 급한 나머지 허리띠도 제대로 묶지 못했고, 결국 굴러떨어지며 바지가 벗겨졌던 것이다.
“그때 굴러떨어져 죽었다면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을 리 없습니다. 묘 공자는 왜 죽지 않아서!”
이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때 확실히 본 건 아니지만 누군가가 때마침 베개를 들고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굴러떨어지자 그 석조상에 베개를 던졌습니다.”
송초가 말했다. 그때 그는 의심을 살까 봐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저 묘기화가 명이 참 길어 굴러떨어졌는데도 죽지 않았다는 것만 알았다.
애초부터 이런 어설픈 방법을 쓰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태자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몰래 독살하든 자객을 보내 숨통을 끊어 놓든 간에, 묘기화는 태자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전에 태자는 저주를 담은 맹세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맹세를 저버리려 하니 태자는 영 찝찝했다.
묘기화가 속으로 이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그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자는 묘기화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고상한 인품에 넓은 도량을 가진, 성스러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태자이길 바랐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져 봤자 무슨 의미가 있느냐.”
태자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픽 냉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자객을 보내 그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 놓지 않은 걸 내심 후회했다. 지금 그는 묘기화 앞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온 도성 사람들 앞에서는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아무 증거도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물고 늘어져 봤자죠. 황제 폐하께서도 전하를 어떻게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송초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런 일의 전후관계를 누가 모르겠는가. 태자가 오랫동안 쌓아 온 평판은 이미 무참히 무너져 내린 후였다.
태자는 평판을 매우 신경 쓰는 사람이라 예전부터 평판이 좋았다. 사람들은 그가 군대를 부리는 책략에 능하고 재주와 인품을 두루 갖췄다고 칭송했고, 황제도 같은 이유로 그를 크게 칭찬했다.
“태자는 재능이 있으며 어질고 자제력이 강하다. 마음을 수련하여 성품이 마치 비가 갠 하늘의 밝은 달과 맑고 신선한 바람 같으니, 국가의 중임을 맡기에 적합한 인재다. 다른 형제들은 비교도 안 되는구나.”
황제의 그 말에 태자는 지금까지 자긍심을 갖고 살아 왔고, 그 말을 자신의 행동 준칙으로 삼았다.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그 평판이 이리 한순간에 처참히 무너져 내릴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일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 묘 시랑도 입 꽉 다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한동안 현상을 유지하면서 닥쳐올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면 됩니다. 일단 참으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백성들도 잊어버릴 겁니다.”
송초가 재차 태자를 위로하자 매처럼 날카로운 태자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성에 차지 않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태자는 정사를 논하기 위해 조정에 나갔다. 금란전金鸞殿 밖의 금칠한 기둥과 조각된 난간, 아홉 층계로 이루어진 옥계단이 그를 맞이했다.
태자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한 계단씩 올라갔고 관원들은 그를 보더니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그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알랑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는 관원들이 분명 자신과 묘기화가 정을 통했다고 생각할 것이라 여겼다. 그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이럴 때는 해명하면 할수록 더욱 감추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가장 훌륭한 대응 방법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행동하는 것이었다.
금란전 밖 회랑에서 보니 저 멀리 매끈한 사람 형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친왕親王이 입는 이무기가 수놓아진 자주색 포복袍服(상·하의 구분 없이 종아리까지 길게 내려 입는 옷)을 입으니 더욱 존귀해 보였다. 매력적인 외모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가늘고 긴 눈엔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바로 양왕이었다.
양왕은 태자를 보더니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형님.”
“그래.”
태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양왕이 자신을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양왕은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시죠!”
태자는 성큼성큼 금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 뒤에 선 양왕은 붉은 입술을 쓱 올리며 비웃음을 날렸다. 이런 일은 구태여 자신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어사가 어련히 알아서 그의 잘못을 들추어낼 테니 말이다.
조정에 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어사가 나와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 어사들은 자신들을 고결한 선비라고 여겨 온종일 이것저것 탄핵을 했다.
최근 소란스러운 일이 많았으니 더욱 활발히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어찌 자신들이 ‘황제의 거울’이라는 존재처럼 보이겠는가.
게다가 태자의 그 일은 도성 전체가 다 알 정도로 떠들썩하게 퍼졌다. 탄핵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사들이 실질적인 일은 하지 않고 아첨이나 한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상주문으로 올라온 중요한 안건들이 처리된 뒤, 염소수염을 기른 한 어사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태자 전하께서 무절제하게 방탕한 생활을 하며 남색을 밝히고 계시니 이 얼마나 파렴치한 행동이옵니까. 하오니 황제 폐하께서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연로한 황제는 옥좌에 힘없이 기댄 채 흐리멍덩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는 이 일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했지만, 진위에 상관없이 이 일은 그저 조용히 넘겨야 하는 문제였다.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황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밖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사옵니다. 묘 시랑의 동생인 두베 공자는 5년 전 북연에서 온 사자와 금 연주 대결을 펼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묘 공자가 남색을 탐한다고 합니다.
그저께 벽수루에서 승은공의 손자인 윤강부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파렴치한 짓을 벌이면서 이 사실이 밝혀졌사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전에 묘 공자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그자와 한 침상에서 잠자리에 드는 걸 여러 번 동의하셨다고 합니다.”
‘저 노인네는 죽지도 않고 이날까지 살아서는!’
어사의 답변을 듣던 태자의 눈빛이 분노로 일렁였다.
태자는 탁월한 평판을 등에 업고 대외적으로는 늘 자제력이 강하고 마음을 수련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묘기화 또한 조용하고 아름다운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전에는 그들이 밤낮으로 함께 있고 심지어 서로 막역한 사이라 한 침상에서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퍼져도 그저 미담으로 회자될 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고상한 태자가 야심한 시각까지 묘 공자와 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고 여겼고, 또 고귀한 태자가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고 덕망이 높고 어진 사람을 예우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묘기화가 단수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전에 그들 사이에 있던 일이 말하기 곤란한 일로 돌변해 버렸다.
“교 어사, 그 이야기는 옳지 않소.”
이때, 오십 대로 보이는 한 중년 사내가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기린麒麟(성인이 세상에 나오면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 속의 동물로 길상吉祥을 상징함) 문양이 들어간 붉은색 관복을 입고, 머리에는 박모璞帽(두 가닥의 검은 끈을 뒤로 내린 관모)를 쓰고 있었다. 이 사내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요양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