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잠시 후, 그녀가 엽영교의 사주단자와 혼인 증서를 꺼내 왔다. 그러고 나서 전 마마 곁으로 걸어가 사주단자를 교환했다.
전 마마가 말했다.
“이 자리에서 혼인 증서를 찢어야 이 정혼이 무효가 됩니다. 그러고 나면 사내 쪽에서 다른 아내를 맞아들이고 여인 쪽에서 다른 집에 시집을 가도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거죠.”
황씨는 어두운 얼굴로 혼인 증서를 꽉 움켜쥐는 데 반해 전 마마는 손에 들고 있는 혼인 증서를 먼저 찍찍 소리가 나도록 찢어 버렸다. 황씨는 그제야 씩씩거리며 혼인 증서를 두 조각으로 찢어 땅에 집어 던진 후 뒤돌아서 가 버렸다.
전 마마는 그들의 마음이 바뀔까 봐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조각의 혼인 증서를 얼른 집어 들어 다시 갈기갈기 조각내 버렸다. 그리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 마마가 홱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팽씨는 전 마마의 뒷모습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묘씨 가문의 평판, 관리인 묘기전의 앞날 그리고 묘씨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니…….
과거 묘씨 가문의 노야老爺는 6품 소관小官에 불과했다. 가문은 한 걸음씩 내디디며 어렵사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고, 이제 큰아들은 4품 병부낭중兵部郎中에 부임했다. 젊은 나이라 앞길이 창창했는데 이젠 다 망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팽씨는 땅에 주저앉아 소리를 꽥 지르더니 통곡하기 시작했다.
* * *
전 마마가 정안후부에 돌아와 보니 시간은 이미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 있었다. 묘씨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묘씨는 전 마마가 무거운 짐을 내려 둔 듯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처리했느냐?”
“예.”
전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만… 앞으로 묘씨 가문과 친척 관계로 지내는 건…….”
묘씨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콧방귀를 뀌며 딱 잘랐다.
“친외조카마저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그런 친척은 그쪽에서 원한다 해도 내가 사절이다! 가서 영교나 보자꾸나.”
묘씨는 그리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엽영교의 처소로 향했다.
엽영교는 침실에서 여목黎木으로 만든 기다란 탑상에 앉아 구럭을 뜨는 중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완전히 딴 데에 가 있었다.
“영교야.”
이때, 묘씨가 안으로 들어와 미소를 지으며 소식을 전했다.
“혼사는 없던 일이 되었다.”
엽영교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
묘씨는 기뻐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옅은 한숨을 쉬더니 탑상에 앉아 딸을 도닥였다.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녀석이… 여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거다. 넌 그 녀석보다 더 좋은 짝을 찾을 것이다.”
이 말을 꺼낸 묘씨는 속으로 좀 찔렸다. 전에 묘기화도 이미 그녀에게 과분한 상대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니 지금 집안 상태로 어떻게 더 좋은 짝을 구한다는 말인가?
* * *
도성에는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자들이 넘쳐났다.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줄 만한 오락거리 역시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묘기화와 윤강부의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고, 그 일을 자신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큰 웃음거리로 생각했다.
엽연채는 이 사달의 뒷부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엽영교가 무사히 파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매일같이 공연장에서 연극을 보는 묘기화를 떠올리자 마음이 좀 편치 않았다. 그리고 그 윤강부는…….
엽연채는 윤강부를 떠올렸다. 둥근 꽃 문양이 들어간 보라색 비단옷을 입었던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한 잘생긴 사내였지만, 그 눈빛엔 음란함과 사악함이 가득했고 행동거지는 경박했다. 묘 공자는 어째서 그런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오늘이 벌써 초여드렛날이에요.”
혜연이 대추소가 들어간 떡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울적해 보이는 엽연채를 보더니 그녀의 기분을 달래 주고자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면 초아흐렛날이네요! 춘시의 마지막 날이죠. 저녁 무렵이면 셋째 공자님이 풀려나실 거예요!”
“그렇네!”
과연 엽연채는 그 말을 듣더니 아주 기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서 풀려나시겠구나.”
두 손을 비비며 안으로 들어오던 추길은 그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
‘감옥이라도 갔대? 풀려나다니!’
주운환이 시험장에서 나오기 전, 아침부터 거리에서 갑자기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 하나가 퍼졌다. 누군가가 초이렛날 벽수루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파헤쳤던 것이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날 묘기화는 한 여인을 데리고 훼의 귀빈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여인은 바로 회방루의 화단인 약란이었다.
당시 그곳엔 세 사내와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먼저 ‘두베’라는 칭호를 가진 뛰어난 재인인 묘기화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단수였고, 또 다른 이는 도성에서 한량에 개망나니로 유명한 자였는데 그 또한 단수였다. 거기에 오색잡놈이 다 모여드는 공연장의 배우인 약란도 있었다.
배우로 일하는 여인들은 대부분 처신이 좋지 않았다. 그 두 사내와 한 여인이 귀빈실에서 무슨 좋지 않은 행동을 했을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이들 말고도 젊은 공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들과 같이 어울렸던 사람 말이다. 결국 또 어떤 사람이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자는 태자부의 장사長史(옛 중국의 관직명)이며 태자에게 가장 신임받는 모사謀士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송초이며, 전에 태자를 따라 자주 그곳에 들락거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송초도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는 말인가? 이어서 사람들은 묘기화와 송초가 자주 만났다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묘기화가 막 명성을 얻었을 무렵, 그는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고 자주 태자의 초대를 받아 태자부에 방문해 금을 연주했다.
묘기화가 한창 이름을 날릴 때, 태자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묘기화가 막역한 벗이라고 여러 번 말하곤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태자가 조정에서 일 처리도 신속한 데다 남다른 고상함과 풍치가 있어 금 연주 천재와도 절친한 벗이라며 그를 칭송했고, 당연히 이 이야기는 미담으로 회자됐다.
사람들은 이렇게 연결해 보니 태자와 묘기화가 한 쌍이고 송초는 심부름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은 묘기화와 윤강부의 관계에서 시작되어 묘기화와 송초의 관계로 옮겨 갔고, 결국 묘기화와 태자의 관계로 번졌다.
사건에 대해 잘 모르면서 떠들거나 구경하는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상상이 가득했고, 그를 통해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능력 역시 수준급이었다.
태자는 그 소문을 듣고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자신에게는 그동안 수많은 미인들이 있었지만 개중 묘기화처럼 역겨운 인간은 없었다. 그는 죽기 살기로 자신에게 매달리며 아무리 떼어 내려 해도 거머리처럼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당시 자신이 왜 이런 자를 마음에 들어 했던 걸까?
6년 전, 묘기화는 적성대에서 이름을 날리며 단번에 ‘두베’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하얀 옷을 흩날리며 금을 품에 안고 무대 위에 서 있던 그 소년은 그림 같은 용모에 신선 같은 풍채를 갖고 있었다. 눈썹꼬리에서는 차갑고 오만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속세를 초월한 듯한 모습이었다.
당시 태자는 그에게 바로 호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그는 금 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묘기화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래서 묘기화를 자주 태자부로 초대해 함께 금을 탔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오랜 친구 못지않게 친해졌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진작에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사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태자는 그 시절을 떠올리더니 불가사의한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자신은 정말로 묘기화를 좋아했고 그의 재주와 뛰어난 용모를 흠모했으며, 북연에서 온 사자使者와의 도전에 응할 때 보였던 그 늠름한 기개에 놀라워했다.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이 소년이 손을 움직이며 금의 현을 튕기면 맑은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현 사이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 뭇 새들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 보면 아주 순진하고 서툰 면을 보였다. 놀라움을 자아내는 재능과 우러러보게 되는 용모, 자꾸 떠올리게 하는 어수룩한 성격까지, 그 어떤 부분을 봐도 태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연스레 그런 관계로 발전했고 달콤함에 흠뻑 취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정도 점차 시들해졌고, 이에 태자는 그가 결국 사내인지라 여인의 아름다움엔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들의 관계는 여러 번 들킬 뻔했는데, 이 관계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다.
종내 태자는 방법을 생각해 내 그가 스스로 떠나도록 설득했다. 그런데 곁을 떠난 묘기화가 수시로 자신에게 서찰을 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무심하게 한두 번 답장해 줄 뿐이었고, 그 이후엔 묘기화가 아무리 서신을 계속 보내도 웬만해선 읽지도 않았다.
이쯤에서 그만했으면 됐는데 묘기화는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통극으로 만들어 그에게 보러 오라고까지 했다. 그러자 태자는 순간 구역질이 일더니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으나, 차마 제 손으로 제 뺨을 때리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어딜 가든 함께 했던 그 시절에 묘기화는 이런 말을 했었다.
“저희의 관계가 전하의 앞날에 누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는 저를 죽이실 겁니까?”
태자는 그 당시 애정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라 바로 이렇게 답했다.
“그럴 리가 있느냐! 내가 그런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이더냐? 난 네가 내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생에 나는 제위와는 인연이 없을 것이며 만 개의 화살이 내 가슴을 뚫어 숨통이 끊어질 것이다.”
그 당시 어떻게 그리도 지독하고 끔찍한 저주를 받을 거라고 맹세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태자였다. 앞으로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맹세를 한 이상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일국의 황태자가 가진 긍지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