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전생에서도 이러지 않았겠는가? 윤강부가 달려드는 바람에 묘기화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분명 윤강부의 바지도 지금처럼 벗겨졌겠지만, 대부분 ‘묘기화가 왜 실족사했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을 것이었다. 벗겨진 바지 따위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몇이나 됐겠나. 심지어…….
아무튼 자신이 몰라서 그렇지, 당시 윤강부와 묘기화에 관한 유언비어가 돌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내가 정을 통했다는 그러한 소문 말이다.
그래서 팽씨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엽씨 가문으로 달려가 엽영교에게 묘기화를 위해 수절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엽영교라는 정혼녀의 존재를 마구 떠벌림으로써 사람들이 묘기화가 단수가 아니라고 믿게 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묘기화가 죽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분명 관심을 가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도성엔 윤강부와 묘기화의 일이 파다하게 펴졌고 사람들은 묘기화가 단수라고 떠들어댔다. 윤강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묘기화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두베 공자, 신선의 분위기를 풍기는 공자라는 그의 명성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엽영교는 머리가 윙윙 울렸고 조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엽학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안녕당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나리, 이제 이 혼사는 물리실 거죠. 우리 가문은 단수 사위는 필요 없어요!”
탑상에 앉아 있던 묘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려야겠군!”
엽학문이 소맷부리를 뿌리치며 동조했다. 엽영교가 정말로 단수에게 시집을 가 버리면 사람들이 엽씨 가문을 얼마나 비웃겠는가.
“전 마마, 자네는 유이를 불러 함께 사주단자를 들고 묘씨 가문에 가서 바꿔 오게나.”
묘씨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두 집안 사람들은 만날 필요도 없었다. 하인을 시켜 사주단자를 바꿔 오라고 하면 됐다. 저쪽도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이니 분명 바꿔 줄 것이다.
전 마마는 방으로 돌아가 사주단자와 혼인 증서를 챙긴 후 서둘러 문을 나섰다.
* * *
그 시각 묘씨 가문. 묘기화를 제외한 모든 가족은 침울한 얼굴로 본채에 앉아 있었다.
“고약한 놈! 그런 낯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건 그냥 넘어간다 하더라도 불효까지 저지르다니! 내 그 녀석에게 혼사도 잘 맺어 줬는데 혼인하기 싫다며 기어코 이런 짓을 벌이며 소란을 피우는구나!”
팽씨는 이 말을 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사실 묘기화의 재능과 용모라면 더 수준 높은 가문과 혼사를 맺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수였다. 어느 집안의 규수가 단수와 혼인하겠는가.
팽씨는 이에 지레 겁을 먹고는 권신의 여식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대신 자기 시누이의 집안을 혼처로 구했다. 친척이기도 하고 서로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사이니까.
엽영교를 묘기화와 혼인시킨 뒤 둘을 본가에서 살게 하면 그를 단속할 사람이 있는 셈이었다. 설령 그의 결함이 드러나더라도 엽영교는 이미 아내가 된 몸이니 있는 힘을 다해 그를 감싸 주지 않겠는가? 그럼 묘기화의 평판에 먹칠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며, 도성의 관리인 묘기전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흘러갔어야 할 일인데, 묘기화가 혼인을 원치 않아 혼례식을 계속해서 미룰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공교롭게도 엽영교가 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말았다. 아니었으면 진작에 혼례식을 올렸을 테니 어디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났겠는가.
열이 받을 대로 받은 팽씨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때, 여종 하나가 뛰어 들어오더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했다.
“마님, 엽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시누이가 온 것이냐?”
팽씨가 황급히 물었다.
“아닙니다. 전 마마와 하인 한 명만 왔습니다. 지금 수화문에 있는데, 우선 그곳에서 저희가 막고 있습니다. 마님…….”
여종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팽씨를 쳐다봤다.
“분명 파혼 이야기를 꺼내러 왔을 겁니다! 지금 도성은 그 이야기로 떠들썩한데 양가가 파혼을 해 버리면 그 소문이 사실이 되어 버립니다. 둘째 도련님이 정말로… 그렇다고 인정해 버리는 셈 아닙니까.”
황씨가 콧방귀를 뀌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밖에 걸린 모란 문양의 발이 걷히더니 전 마마와 유이가 굳은 표정을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 마마는 일단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부인.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저희가 찾아온 건 파혼 소식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들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 거라니? 난 전혀 모르겠구나!”
팽씨는 탁자를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가에 문제가 없으니 곧 있으면 이월 스물엿새에 혼례식을 올린다고 청첩장도 모두 보냈는데 이제 와서 파혼을 하겠다니!”
그러자 전 마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묘씨 가문 둘째 공자가…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했느냐? 내가 모른다!”
팽씨는 대로해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밖을 향해 침을 ‘퉤’ 뱉으며 말을 이었다.
“누가 밖에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고 다니며 내 아들과 우리 묘씨 가문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건지는 모르겠구나. 방금 내 아들을 단수라고 했지? 그럼 증거를 내놓거라!
어제 벽수루에서 기화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윤강부도 위에 있었다지. 그자가 조심성 없이 계단에서 굴러 기화의 몸 위로 떨어졌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사고에 불과하다. 하늘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사람을 깔아뭉갠 거랑 같은 게지. 그런데 어찌 그것이 깔린 사람의 잘못이더냐? 그런 건 불의의 재난이라고 하는 거다!”
전 마마는 이런 상황에도 그녀가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는 걸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침 어제 저희 마님께서도 벽수루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눈으로 직접 두 사람이 같은 귀빈실로 들어가는 걸 보셨죠. 그 뒤 두 사람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고 그 윤강부 공자는 바지마저 벗겨졌죠. 털이 숭숭 난 양쪽 허벅지가 드러났고요!”
“같은 귀빈실에 들어간 게 뭐? 둘이 뭘 하는 걸 본 것도 아니잖느냐!”
“부인!”
전 마마가 성이 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어찌 됐든 영교 아가씨는 부인의 친외조카이십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감싸고돌아도 모자랐을 판에, 마님과 묘씨 가문 분들은 어떻게 외조카를 이리 곤경에 빠뜨리시려는 겁니까?”
전 마마의 한마디 한마디가 사리에 다 맞아떨어지니 팽씨는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굴복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도리어 목을 빳빳이 세우고 목청을 드높였다.
“난 여전히 영교의 친외숙모이고 묘씨의 친시누이다! 이제 보니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우리 기화를 헐뜯으려는 게 분명하구나. 그런데 너희 엽씨 가문은 도와주는 건 고사하고 파혼을 하겠다고 하다니. 이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셈 아니냐!”
“오해였으면 저희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둘째 공자님 입으로 직접 이 일을 인정하셨습니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묘기화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인정했다는 말을 전해 듣자 팽씨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헛, 헛소리 말거라!”
“이보게. 무슨 일이든 간에 증거가 중요한 거 아니겠나?”
보다 못한 황씨가 전 마마에게 다가서더니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우린 혼인 증서와 사주단자를 가지고 있으니 혼례식을 치를 거네. 따르지 못하겠으면 관아에 가서 고발하든가! 그것도 안 되겠으면 그 윤강부를 끌고 와 증언을 하라고 하든지. 그래서 그자가 둘째 도련님과 부적절한 관계인지 아닌지 알아보면 되겠네.”
전 마마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윤강부가 단수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아 했다.
그러나 윤강부에게 단수이냐고 공개적으로 물어보면 그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승은공부承恩公府와 태후 모두 체면을 중시했다. 윤강부가 그렇게 놀 수는 있지만 절대로 자신의 입으로 사실을 실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만 돌아가시게! 가서 고모님과 영교 아가씨에게 혼례식 준비를 잘하시라고 전하고. 이번 달 스물엿새에 신부를 맞이하러 갈 거네.”
전 마마는 어이가 없어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꿈도 꾸지 마세요! 저희 정안후부를 정말 물로 보시는 겁니까?”
“어머니!”
이때, 방 밖에서 갑자기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팽씨와 황씨는 동시에 안색이 확 변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물론 묘기화였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혼하십시오!”
“이 고얀 놈!”
팽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런데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보다 더 차가웠다.
“고집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혼례식 날 신부를 맞이하지 못하고 꽃가마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면 더욱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그리되면 사람들은 제가 단수였는데 기어코 남의 집 귀한 여식에게 화를 입히려 했다고, 묘씨 가문은 추접하고 불결한 데다 후안무치하고 악독하기까지 하다고 떠들어 대겠지요.”
그 말에 팽씨는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전 마마가 깜짝 놀라 그녀의 뒤를 급히 쫓아가 보니, 흰옷을 입은 묘기화가 아무 표정도 없는 냉담한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이어 팽씨가 그에게 냅다 달려들어 짝 소리가 나게 뺨을 후려쳤다.
묘기화는 옆으로 휘청거렸고 새까만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그의 한쪽 얼굴을 가려 버렸다. 손자국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모습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
“이 몹쓸 놈.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릴 것을!”
팽씨는 울부짖었고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틀어쥐더니 짝짝 소리를 내며 뺨을 몇 대 더 후려갈겼다. 그런데 묘기화는 되레 헛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전에는 왜 제게 죽으라고 하실 생각을 안 하셨어요?”
“이, 이놈……!”
팽씨는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더욱 힘껏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전 마마는 묘기화가 역겹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래도 팽씨에게 이렇게 얻어맞는 걸 보니 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팽씨에게 달려가 그녀를 뜯어말렸다.
“부인, 이제 그만하시죠! 둘째 공자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떳떳하게 물리시지요. 안 그러면 모두에게 좋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
계단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묘기전에게는 관리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묘기화를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파혼하거라.”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황씨에게 말했다.
“가서 사주단자와 혼인 증서를 가져오시오.”
황씨는 이를 꽉 물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