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15화 (215/858)

제215화

그 말에 엽연채와 묘씨는 깜짝 놀랐다. 곧 두 사람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량도 서열이 있었다. 엽균은 그 축에 끼지도 못하는 반면, 승은공의 손자인 윤강부는 바로 그 유명한 도성 제일의 한량이었다. 그런데 그는 또 태후가 가장 총애하는 질손姪孫이었다.

태후가 수시로 그를 궁으로 불러 상을 내리니 윤강부는 이 총애를 믿고 점점 더 오만방자하고 거리낌 없이 굴었다. 그는 도성을 들쑤시고 다니지 못해 안달이 난 양, 온 동네를 싸다니며 말썽을 부리는 건 애교였고 행패를 부리며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그리고 그런 윤강부가 가장 좋아하는 짓이 바로 여인을 업신여기고 사내를 빼앗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는 여인을 업신여기고 사내를 빼앗았다. 왜냐하면 그는 단수斷袖(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잘생긴 사내라면 누구든, 그의 눈에 드는 순간 절대로 그의 마수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연채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묘기화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도성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자인 데다 뛰어난 재능에 신선 같은 분위기를 가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묘씨 가문은 가세가 그러하니 귀족의 자제나 권신 앞에서는 그저 ‘식탁 위에 차려진 요리’에 불과했다.

묘기화는 명성과 재능이 있고 황제의 총애도 받았던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오륙 년 전의 일이었다. 현재 황제는 병약한 상태이니 어디 그를 기억이나 하겠는가. 그러니 묘기화가 윤강부의 눈에 들었다면 그는 뼈조차도 남지 않을 것이다.

‘묘기화는 윤강부와 이미 정을 통했을까? 묘기화도 단수인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연채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조그마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묘기화는 단수이고 윤강부는 이미 그를 건드렸으며, 묘씨 가문도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묘씨 가문은 묘기화에게 혼사를 맺어 줘 그가 마음을 바로잡게 하려고 했지만 우여곡절을 거듭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엽영교가 파혼을 하겠다고 나오니, 묘씨 가문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더 질질 끌다가 큰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이 돼 최대한 빨리 묘기화가 혼인을 하도록 어떻게든 밀어붙일 심산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이렇게 정리된 엽연채의 낯빛이 훅 어두워졌다.

그리고 묘씨도 분명 윤강부가 누군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분통이 터져 씩씩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친정이고 내 큰새언니가 아니더냐? 기화가 그렇다는 걸 뻔히 알면서… 우리 영교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고 하다니!”

“주인마님…….”

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묘씨를 진정시켰다.

“일단은 단정 짓지 마세요. 지난번 일처럼 소란을 피웠다가 결국 오해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현장을 포착하지 않는 한 말이죠.”

“밖에서 그 녀석을 기다려야겠다. 이따가 어떻게 변명하는지 한번 보자꾸나.”

묘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차르륵 소리를 내며 주렴을 걷어 올려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얼른 옆자리의 커다란 베개를 집어 들어 품에 안은 뒤 그녀를 쫓아갔다.

고개를 돌린 묘씨는 커다란 베개를 챙겨 온 엽연채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베개는 왜 품에 안고 나오는 게냐? 추우면 손난로를 들고 와야지.”

그 말에 엽연채는 입을 씰룩거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묘기화가 넘어질 것을 대비해 커다란 베개를 미리 준비하여 그걸로 머리를 받쳐 줄 거라고 말해야 할까?

난감해진 엽연채가 말을 않고 다시 계단 입구를 쳐다보니 그곳엔 모서리가 날카로운 석조상이 놓여 있었다.

엽연채와 묘씨 등은 계단 입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탁자 앞에 앉았다. 이각쯤 지나자 계단 근처에 서 있던 추길이 갑자기 작게 소리쳤다.

“아가씨!”

깜짝 놀란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계단 입구에 묘기화가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윤강부가 대화 상대였는데,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윤강부가 갑자기 묘기화에게 달려들어 부딪쳤고 두 사람은 함께 계단 아래로 굴렀다.

“꺅!”

추길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엽연채는 얼른 손에 든 커다란 베개를 품에 안고 황급히 달려가 그 커다란 석조상에 베개를 던졌다. 묘기화는 굴러떨어지며 머리를 부딪혔지만, 다행히 석조상에 던져진 베개 덕분에 그저 눈앞에서 별이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으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윤강부도 바닥에 뻗어 버렸다.

묘씨 일행은 마침 그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가 묘기화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게다가 어떻게 넘어진 건지 굴러떨어질 때 바지도 함께 밑으로 내려갔다. 털이 숭숭 난 두 다리가 드러났다!

“아이구, 저기 뭔 일 일어났나 본데?”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잇따라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땅바닥엔 두 사람이 뒤엉켜 있었는데 흰옷을 입은 사람은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반면,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사내는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가장 경악스러운 부분은 위쪽에 엎어진 사내의 바지가 벗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풍기문란하게 사람들이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바지를 벗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주위에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여인들은 모두 눈을 가렸다.

“저… 저분은 승은공의 손자분이 아니십니까?”

갑자기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저 흰옷을 입은 사내는 묘 공자이죠?”

“저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건…….”

말을 하다 말고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감히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윤강부는 태후가 가장 총애하는 질손이 아니던가.

윤강부의 악명은 도성에 자자했다. 도성 사람들 중 그가 단수인 걸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묘 공자는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미남이니 지금…….

사람들이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자 윤강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얼른 바지를 추켜올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삿대질하며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뭘 쳐다보는 것이냐? 앙?”

몰렸던 사람들은 그의 호통에 깜짝 놀라 몸을 덜덜 떨더니 얼른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묘기화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새파란 얼굴을 한 묘씨가 그의 곁으로 걸어왔다.

“기화야.”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묘기화가 고개를 돌려보니 묘씨가 보였다. 그는 새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감각했다.

“표숙, 괜찮으세요?”

엽연채가 앞으로 다가서더니 석조상을 깔고 있는 그 커다란 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행히도 제가 오늘 외출할 때 베개를 가… 가져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석조상에 부딪혀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묘기화는 그 말을 듣고 또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낯빛이 새하얘지며 망연자실한 눈빛을 보였다. 그는 이내 뒤돌아서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나 묘씨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쫓아가 문 앞에 서서 그를 가로막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너 윤강부와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어떻게 저런 자와 친분을 맺는 것이냐? 너 설마…….”

“예!”

묘기화가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었다. 묘씨는 그 대답에 충격을 받아 머리가 어질어질하더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너 어떻게……!”

“돌아가서 어머니를 설득해 파혼하겠습니다. 절대로 영교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묘기화는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묘씨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가 파혼을 받아들이니 기뻤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도 피어올랐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친조카이자 지금껏 예비 사위로 여겨 마음을 쏟았던 사람 아닌가. 그런데 그가 이런 잘못된 길에 발을 들이고 만 것이다.

“마님, 묘 공자님이 파혼에 동의했습니까?”

전 마마가 잽싸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묘씨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다가 갑자기 낯빛이 확 변했다.

“그 애가 동의한 게 무슨 소용이라는 말이냐? 그 애 부모가 동의하겠느냐? 내가 보기에 저 아이는 계속 혼사를 물리고 싶어 했다. 내 큰시누이가 동의하지 않아 그렇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윤강부 공자의 바지가 벗겨졌습니다! 그런데도 묘씨 가문에서 뻔뻔하게 파혼하지 않겠다고 한다고요?”

전 마마는 흥분해 콧방귀를 뀌었다. 묘씨는 그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안색은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어쨌든 묘씨 가문은 자신의 친정집 아닌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이때, 엽연채가 안에서 걸어 나오자 묘씨가 고개를 돌리며 이리 말했다.

“연채야, 우린 먼저 돌아가 보마.”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고 묘씨는 전 마마를 데리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그들 뒤를 따라 마차를 세워 둔 벽수루의 뒤뜰로 갔고 그녀도 마차에 오른 후 정국백부로 향했다.

“아가씨, 커다란 베개는 왜 가지고 나오신 거예요?”

추길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엽연채가 외출에 나설 당시, 추길은 손난로를 가져가라고 했지만 그녀는 필요 없다면서 수납장으로 가서 안을 뒤적거리다가 커다란 베개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그러고는 가는 내내 그 베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추길과 혜연은 처음엔 그녀가 손난로가 너무 뜨거워 베개로 대신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베개는 따뜻하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니까.

그랬을 뿐이지, 묘기화가 굴러떨어질 때 그녀가 안고 있던 베개를 석조상으로 던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 석조상은 고슴도치 석조상이라 모서리가 날카롭고 가시 부분이 아주 뾰족했다. 만약 정통으로 부딪혔다면 가볍게는 머리가 찢어져 피를 흘렸을 것이고, 심하게는 아예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아가씨, 설마 묘 공자님이 넘어져서 석조상에 부딪히실 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추길의 말에 엽연채가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런 꿈을 꿨거든.”

그러자 추길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두 손을 모아 머리에 올리고 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분명 주공周公(중국 성현이자 공자의 우상. 공자는 늘 주공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길을 제시했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 사이에 ‘주공해몽周公解夢’의 미신이 퍼졌고 그를 ‘인생의 예언가’라고 칭하게 됨)께서 아가씨의 꿈에 현몽現夢하신 거겠죠. 그 덕분에 한 생명을 살린 거예요!”

엽연채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생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일을 떠올리며 순간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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