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매소쌍의 본명은 유상상으로 본래 간사동의 정혼녀였다. 그런데 유씨 가문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당하자 당연히 간씨 가문은 칼로 무 자르듯이 유씨 가문과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런데 유씨 가문 사람들 중 ‘그물을 빠져나간 물고기’가 있었다. 도망간 사람이 바로 모든 일의 원흉인 유상상이었다. 간사동이 그 유상상을 찾아내 오정 골목의 한 가택에 숨겨 두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매소쌍은 떳떳하지 않은 신분이었고, 이에 간사동은 그녀를 위해 지금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전생에서는 간사동이 점점 나이를 먹자 마음이 조급해진 간씨 가문은 그에게 장가를 들라고 재촉을 했다. 하나 그는 끝끝내 장가를 들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간씨 가문은 그의 뒤를 캐 간사동이 밖에 여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집안에서는 밖에 숨겨 두고 집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걸 보니 신분이 천한, 수준 미달의 여인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사동이 없을 때를 틈타 간 부인이 하인들을 데리고 오정 골목으로 가서 매소쌍을 끌어낸 뒤 길거리에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구경꾼 중 한 사람이 매소쌍을 알아보더니 그녀가 탈주범이라고 떠들었다. 그런데 우스운 건 이 간 부인이라는 사람은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지 간사동의 전 정혼녀를 알아보지 못해 이렇듯 그녀를 길가로 끌고 나와 뺨을 때렸던 것이다. 이런 아둔한 사람이 또 있을까.
여하튼 그 사람은 관아에 매소쌍을 고발했고, 결국 부윤이 그녀를 끌고 가 버렸다. 그리고 매소쌍을 숨겨 준 사람이 간사동이었기에 윗선에서는 크게 진노하여 간씨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작위를 박탈했으며, 간사동은 매소쌍과 함께 참수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뺨 한 대 갈기는 바람에 아들의 목숨과 작위를 날려 버렸다고 간 부인을 비웃었다.
“매소쌍이 밖에서 어떻게 생활하겠소? 그 사람은 세상천지에 의지할 데 하나 없는 고아요!”
간사동은 매소쌍과 함께 도피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장남인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신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사촌 형제들이었다. 자신이 그녀와 함께 떠나 버리면 부모와 누이동생은 어떡한단 말인가?
“그럼 제대로 대비하세요. 그쪽은 나이가 많으니 어머니가 분명 혼인을 하라고 재촉하실 거예요. 그런데도 꿋꿋이 버티면 밖에 여인이 있다고 생각하겠죠.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정말 괴로워질 겁니다.”
간사동은 그 말을 듣고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떠나갔다.
그 후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묘기화는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엽연채는 그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춘시 셋째 날,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엽영교 일로 집에 있기 싫었던 엽연채는 추씨 가문 저택으로 가서 온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월 초닷샛날 미시未時(오후 1시~3시)쯤 엽연채와 혜연은 추씨 가문 저택에서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추길이 그들을 맞이하며 소식을 전했다.
“아가씨, 건달들을 사서 그분을 주시하라고 하셨잖아요. 알아낸 게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길 묘 공자님이 벽수루에 가서 귀빈실을 예약했다고 해요.”
‘벽수루?’
엽연채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묘기화가 실족사했던 곳이 바로 벽수루였다.
“어느 귀빈실을 예약했다고 하더냐? 언제 간다고 하더냐?”
“경인이가 은화를 무려 오십 냥이나 건네자 그제야 거기 점원이 정보를 알려 줬다고 해요. 날짜는 이월 초이렛날 미시이고 훼의 귀빈실로 예약했다고 해요.”
사실 제대로 된 요릿집에서는 함부로 손님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다. 특히 도성 내 권세가들이 모이는 곳은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알아낸 건 운이 좋았다 할 수 있었다.
“아 참, 추길아, 얼른 정안후부로 가서 할머니께 이월 초이렛날에 벽수루에 간다고 알려 드리거라.”
“네?”
엽연채의 말에 추길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월 초이렛날은 묘 공자님이 누군가와 약속한 날이 아닙니까?”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은 고모의 인생이 걸린 문제다. 할머니는 고모의 어머니이시니 우리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 사람과 상의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할머니께 알려 드려야 한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추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그럼 몇 시로 예약할까요?”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 이각으로 하자꾸나.”
추길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 * *
이월 초이렛날은 날씨가 아주 따뜻했다. 엽연채는 소매 없는 외투를 입지 않고 옷의 가장자리에 진홍색 깃털 장식이 달린 겉옷만 걸친 뒤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섰다.
삼각쯤 지나 마차는 벽수루에 도착했다. 벽수루는 도성에서 유명한 요릿집답게 내부 설계가 퍽 고아한 운치를 풍겼다.
엽연채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고, 좌우에는 녹나무로 만든 계산대와 대당大堂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당에는 아치형 다리가 달린 크고 작은 홍목 원탁이 가득 자리했고, 벽 쪽으로는 병풍으로 공간을 격리한 귀빈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귀빈실은 좌우로 병풍이 자리하고 대당과 마주하는 쪽에는 주렴이 걸려 있는 구조였다. 주렴 때문에 내부는 보일 듯 말 듯했고 시끌벅적한 실내와 달리 상대적으로 조용히 있을 수 있었다.
엽연채가 요릿집의 물시계를 보니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 정각이었다. 예약한 시간보다 이각이나 일찍 도착했던 것이다.
“부인, 자리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점원이 공손히 다가와 물었다.
“대당의 귀빈실로 하겠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한 곳을 가리킨 다음, 추길에게 일렀다.
“넌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할머니께서 도착하시면 이리로 모시고 오너라.”
그리 말한 후 엽연채는 점원을 따라 대당을 지나 문이 반쯤 열리는 귀빈실로 들어갔다. 귀빈실은 주렴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으나, 안에서는 바깥의 상황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엽연채가 커다란 원탁 앞에 잠깐 앉아 있으니 추길이 묘씨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원래도 홀쭉했던 묘씨의 얼굴은 더욱 야위어 칼로 깎은 듯이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게 분명했다.
“왜 자리를 이곳으로 했느냐? 2층 귀빈실이 더 조용할 게다.”
묘씨가 의아해하자 엽연채는 흰 바탕에 청록색의 무늬가 들어간 찻주전자를 들어 그녀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잠시 후에 묘 공자도 이곳에 올 거예요.”
“지금 뭐라 했느냐? 파혼하라고 설득하기 위해 그 녀석과 약속을 잡은 것이냐?”
묘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워했다.
“요 며칠 내가 그 녀석을 찾아갔었다. 근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녀석은 입도 뻥긋하지 않더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구나. 전에는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분과 약속 잡은 건 아니에요.”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며칠 동안 사람을 시켜 그분을 지켜봤는데 오늘 여기에 예약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와 약속을 잡은 거예요. 함께 지켜보려고요.”
“그 녀석이 누구와 만나느냐?”
묘씨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도 모르니 함께 보시죠. 우선 식사부터 하세요! 추길아, 나가서 요리 몇 가지를 주문해 줘.”
추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렴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점원이 요리를 내왔다. 엽연채와 묘씨가 식사를 하고 나니 어느덧 오시가 거의 절반 가까이 지나 있었다. 이제 이각 후면 미시未時(오후 1시~3시)였다.
점원이 품질 좋은 우전용정雨前龍井(서호西湖의 용정차龍井茶 중 하나)을 내왔지만 묘씨와 엽연채는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정신을 집중해 밖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문발 쪽에 앉아 있던 추길이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알려 왔다. 엽연채와 묘씨가 얼른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봤다.
묘기화는 이미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흰옷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그의 뒤에 앞섶이 교차하는 푸른색 유군을 입은 한 여인이 있었다. 너울을 쓰고 있는 그녀는 가을철 호수의 맑은 물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드러내고 있었고, 멀리서 얼핏 보니 몸매도 아름답고 미끈했다.
너울이 얼굴을 가렸지만 엽연채는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낯익은 여인은 다름 아닌 회방루의 간판 화단, 약란 소저였다.
두 남녀는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내 위층으로 올라갔다.
“저 녀석이 여인을 데리고 왔구나…….”
묘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아했다.
“할머니, 흥분하시면 안 돼요. 저희는 이미 두 번이나 오해했고 그 바람에 문제가 생겼었잖아요.”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며 묘씨를 다독였다.
첫 번째 오해는 묘기화와 약란의 관계를 의심한 것이었고, 두 번째 오해는 묘기화와 매소쌍의 관계를 의심했던 거였다.
“그 연극배우를 의심했던 건 영교가 경솔했던 게 맞지만, 그날 본 매소쌍은…….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들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게다. 그 둘을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묘씨의 반박에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실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묘기화와 약란이 위층으로 올라간 후, 수시로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엽연채 일행은 묘기화를 찾아온 사람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략 이각쯤 지나자 밖에서 혜연이 들어왔다. 그녀는 회색 옷을 입은 시동으로 분장을 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아까 그녀에게 2층 귀빈실이 있는 복도 끝으로 가서 누가 훼의 귀빈실로 들어가는지 지켜보라고 분부했었다.
“누가 더 들어갔는지 보았느냐?”
엽연채가 물었다.
“묘 공자님이 들어가시기 전에 감색 옷을 입은 한 사내가 들어갔습니다. 스물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사내였는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분이 먼저 훼의 귀빈실로 들어갔고 이어서 묘 공자님과 한 아가씨가 들어가셨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공자님이 한 분 더 들어가셨고요.”
“음……. 그냥 평범하게 벗들과 시간을 보내는 거 같구나.”
혜연의 대답을 들은 묘씨는 묘기화가 벗과 자리를 만든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엽연채의 생각은 달랐다. 전생에서 그가 실족사했다는 걸 몰랐다면 자신도 지금 상황을 대수롭잖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하게 벗과 어울리든 아니든, 어쨌든 그가 실족사하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운을 떼는 혜연의 표정이 어딘가 좀 이상했다.
“나중에 들어가신 화려한 비단옷의 그 공자님은 누구인지 압니다. 승은공承恩公 대인의 손자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