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아, 그럼 서재로 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엽학문은 엽승덕이 자신과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엉망진창이었던 기분이 순간 활짝 개었다. 그가 상의하자고 하는 일은 분명 허서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엽학문은 이제 그 귀한 손자 이야기만 나와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들뜬 채로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가 엽영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엽학문은 헛기침을 하더니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연채 너는 어서 가서 네 어머니를 뵈어라. 그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거라.”
여하튼 친정에 들렸으니 그는 엽연채에게 온씨를 보러 가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또 온씨를 보러 왔다는 핑계로 친정에 들를 것 아닌가.
“어머니께서는 큰이모님댁에서 지내고 계세요.”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엽학문은 큰이모라는 말을 듣더니 눈꺼풀을 떨며 말했다.
“그럼 그리로 자주 들리거라.”
별일 없으면 친정집에 들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리 말한 뒤 그는 옷소매를 탁 털며 밖으로 나갔다.
엽승덕은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온씨, 그 질투심 많은 여인은 분명 자신들이 자기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겁을 먹고 그곳으로 피했을 터였다.
‘순진하기는!’
자신이 왜 그런 방법을 쓰겠는가? 지금은 허서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곧 공명을 얻을 텐데, 이 상황에서 온씨가 세상을 떠나거나 다른 문제가 생겨 정실 자리에서 물러나면 어찌 되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을 의심할 테고 허서를 뚫어지게 주시할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미 허서와 정랑을 적자와 정실부인으로 만들 완벽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엽승덕은 엽학문과 함께 문을 나섰고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엽연채의 눈빛엔 조롱기가 스쳤다. 그가 무슨 방법을 쓰든 간에 자신은 그들을 냅다 내동댕이쳐 뼈가 가루가 되도록, 그야말로 부숴 버릴 것이다. 가짜는 가짜일 뿐, 영원히 진짜가 될 수 없는 법이다.
“어머니, 저 피곤해요. 돌아가서 쉴게요.”
이리 말하는 엽영교는 여전히 차가운 낯빛으로 무표정했다. 묘씨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마음이 아려 와 눈시울을 붉혔다.
“걱정 말거라. 이 어미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널 그곳에 시집보내지 않을 테니.”
그러나 엽영교는 이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혜연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묘씨에게 말했다.
“주인마님, 그 묘 공자님은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이 혼사는 절대로 치르면 안 됩니다! 묘씨 가문은 불구덩이와 다름없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으로선 물릴 방법이 전혀 없으니 큰일입니다!”
엽연채는 말없이 차갑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생에서 묘기화는 혼례식을 앞둔 팔월에 실족사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자신이 환생하면서 많은 일에 영향을 줬고 고모의 혼례식 날짜마저 변경됐다.
‘그럼, 묘기화가 죽지 않는 게 아닐까?’
많은 일을 겪어 보니 엽연채는 묘기화가 실족사한 그날이 그의 죽음에서 아주 결정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 추길은 두 사람이 그와 함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고 했는데 한 사람은 사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했다.
‘그럼 그 두 사람이 간사동과 매소쌍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절대로 그들일 리가 없다. 그들은 부부가 될 사이이고 매소쌍은 절대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몸이니, 묘기화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그 여인은 그녀일 리 없었다.
그런데 묘기화는 알고 지내는 여인이 별로 없었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묘씨에게 물었다.
“할머니, 묘 공자가 어떤 소저들과 친하게 지내는지 아세요?”
“그게… 이런 건 왜 묻는 게냐? 그 녀석이 좋은 집에 숨겨 놓은 여인이 다른 여인일까 의심하는 게냐?”
묘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내가 그 녀석에 대해 어떻게 알겠느냐! 내 아들도 아닌데.”
“그럼 고모에게 가서 물어볼게요.”
말을 마친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당을 나와 잠깐 걸어가니 엽연채는 이내 엽영교의 처소에 도착했다. 엽영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위로하러 오지 않아도 돼. 난 괜찮아.”
엽연채는 엽영교가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는 심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전 고모를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 단서를 찾으러 왔어요. 고모가 요즘 그분을 조사하고 계시잖아요. 그럼 그분이 어떤 소저와 가장 친한지도 아시죠?”
엽영교는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건 나도 제대로 조사해 봤지. 오라버니는 늘 혼자 다니고 가장 자주 가는 곳은 공연장이었어. 그리고 항상 약란 소저에게 격려 차원에서 돈을 주더라. 하지만 가장 친한 소저는 오늘 본 그 매소쌍이라는 사람이야.
“표숙은 냉담한 분이시죠?”
엽연채가 물었다.
“그럼.”
엽영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특정하기 쉽겠군요.”
엽연채가 특정한 사람은 약란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엽영교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이건 우선 제대로 검증을 해 봐야 돼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엽연채는 말을 마친 후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 * *
이튿날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 엽연채는 혜연을 데리고 다시 문을 나섰다.
그녀는 요릿집에서 식사를 한 뒤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일각에 공연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는데 무대 아래에는 관객이 한 명도 없었다. 이젠 아무도 이 공연을 보지 않는 것이었다.
심부름꾼의 안내가 필요 없는 엽연채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난초 귀빈실로 향했다. 병풍을 돌아 들어가 보니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그녀를 등진 채 아래층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혼례복을 입은 약란 소저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애간장을 녹이는 목소리로 남주인공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엽연채는 사내의 곁에 앉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주 재미있으시나 보네요?”
그러자 묘기화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웃음이 어렸다.
“재미없다!”
그는 그리 대꾸하고선 손에 든 도화취桃花醉를 단숨에 다 마셔 버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새하얀 뒷모습은 빠르게 복도를 지나더니 계단을 내려가며 모습을 감추었다. 마침 복도에 있던 심부름꾼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묘 공자님…….”
“이보게, 왜 그러나?”
엽연채가 천천히 걸어오며 물었다. 그러자 심부름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묘 공자님은 한 번도 연극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신 적이 없습니다. 이번이 처음이에요.”
엽연채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며 말했다.
“묘 공자가 이 연극을 정말로 좋아하나 보군.”
“예! 다른 손님들은 전부 질렸다며 떠나셨는데 묘 공자님은 아무리 보셔도 질리지 않으셨죠. 그런데… 오늘 보니 묘 공자님도 질리신 것 같네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그에게 은전을 한 움큼 쥐어 주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며 혜연에게 이리 분부했다.
“가서 건달 몇 명을 구해 하루도 빠짐없이 묘기화를 주시하라고 하거라. 아 참, 그 약란 소저도 함께.”
혜연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묘씨 가문을 헐뜯었다.
“그런데… 어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묘씨 가문은 생각이 없는 건지 그분을 가둬 놓지도 않고 밖에서 활보하고 다니게 내버려 두네요.”
엽연채가 공연장에서 빠져나오니 묘기화와 간사동이 맞은편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큰길을 지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워지니 간사동이 하는 말이 들렸다.
“소쌍이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런데 사람을 시켜 그 애를 데리고 나오라고 하다니. 그랬다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묘기화는 차가운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쪽 입으로 그 여인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어째서 그 여인을 내보내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도성에 머물러 있으면 언젠간 간씨 가문도 말려들어 풍비박산 날 겁니다!”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사동은 엽연채를 보고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잘생긴 얼굴을 굳혔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이렇게 비아냥댔다.
“소저께서는 나이도 어린데 왜 그렇게 속이 시꺼먼 거요? 지난번에 하인을 시켜 내 앞길을 막더니 소쌍의 일로 날 협박해 그쪽 둘째 숙부를 모해하게 했지. 그자를 함정에 빠뜨려 은화 일 만 냥가량을 잃게 했고. 그런데 이번엔 직접 와서 내 일에 간섭하고 있구려.”
“아, 저인 줄 알았군요.”
엽연채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소?”
간사동은 기가 찬 듯 ‘허허’ 하고 웃었다.
“그때 정안후부 자매간에 혼사를 가로챈 일이 온 도성 안에 파다하게 펴졌고, 엽씨 가문 둘째 내외의 가장 큰 적이 바로 그쪽이었잖소. 게다가 그 둘째 내외의 여식이 가진 혼수를 몽땅 날려 먹게 했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뒤에서 이런 일을 꾸밀 사람은 그쪽밖에 없지.”
“전前 금위군 대장의 적차녀嫡次女인 유상상은 도적과 밀통해 비밀리에 도적들을 도성 안으로 들였지요. 그 바람에 온 집안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했고요. 유씨 가문 사람들 중 유일하게 참형을 피해 도망친 사람이 그 여인인데, 당신은 간 크게도 그 여인을 도성에 두었네요.”
엽연채가 매소쌍의 신분을 밝히자 간사동의 안색이 확 변했다. 사실 그는 그녀가 매소쌍 일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해 그 일을 하게 했을 때 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가 지금 이렇게 대놓고 말을 꺼내니 그는 몹시 놀랍고도 두려워 얼이 빠져 버렸다.
“그, 그래서 또 어쩌려고 이러는 거요?”
간사동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쩔 생각 없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의 정혼녀이고 당신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놓고 지금 남 탓을 하는 겁니까?”
엽연채의 말에 간사동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새파란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묘기화는 그의 절친한 벗인데, 뜻하지 않게 매소쌍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간사동은 지난번 엽연채의 일 때문에 매소쌍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고, 변고를 당한 그곳은 묘기화가 그들에게 찾아준 장소였다.
“충고하겠는데 어서 그 여인을 내보내세요. 안 그러면 그 여인의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간씨 가문도 통째로 연루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