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정혼자가 있는 사람이 어째서 홀몸인 것처럼 그 집에 있었다는 말이냐? 이건 도를 지나친 행동이 아니더냐?”
묘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봅니다.”
황씨가 얼른 묘기화를 감쌌다.
“중요한 일이라고 했는가?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밀회였나 보네!”
묘씨는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극도로 화가 나니 오히려 웃음이 나와 그녀는 웃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린 친척이니 묘씨 가문에서 뭘 어떻게 해 주길 바라지 않아요. 그냥 파혼하면 됩니다. 이걸로 두 가문은 서로 빚진 것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겁니다.”
“그건 안 됩니다!”
황씨가 새파란 얼굴로 말했다.
“고모님, 이미 청첩장을 모두 발송했는데 이제 와서 또 바꾸다니요? 엽씨 가문은 이런 일에 익숙할지 모르지만, 저희 묘씨 가문은 더 이상 망신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가 말한 ‘이런 일’이란 엽이채와 엽연채의 혼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안후부는 초대장을 잘못 썼다고 했다가 또 원래 맺어진 짝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을 바꾸는 통에 체면이 깎일 대로 깎였었다.
황씨는 대뜸 젊은 소저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 사는 사람이냐? 어째서 우리 둘째 공자께 매달리는 것이냐!”
병약해 보이는 그 미인은 깜짝 놀라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제… 제 이름은…….”
“네 이름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말 못 하는 게냐?”
묘씨가 ‘픽’ 냉소를 지었다.
“제 이름은… 매소쌍입니다.”
이에 그 여인은 겁에 질린 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밝혔다.
엽연채는 매소쌍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순간 멍해졌다. 매소쌍이라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 있던 여종이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후부 나리, 주인마님. 밖에 간씨 가문 여섯째 공자께서…….”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밖에 걸린 발이 누군가에 의해 차르륵 소리를 내며 확 걷혔고, 이십 대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검붉은 비단옷을 입고 금관으로 머리를 묶은 차림이었다.
엽승신은 그 사내를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로 내기만 하면 이긴다던 그 ‘간 공자’였다. 일만 냥가량 되는 엽이채의 혼수를 몽땅 날려 먹게 만든 사내 말이다.
너무 다급히 달려온 나머지 간 공자는 안으로 들어와서도 숨을 헐떡거렸다.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매소쌍에게 향했다.
간사동은 그녀가 묘기화와 함께 무릎을 꿇은 채 묶여 있는 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얼른 그녀에게 걸어가 밧줄을 풀어 주려고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어?”
묘씨는 화가 나 버럭 호통을 쳤다.
간사동은 포박된 채 새파랗게 질린 매소쌍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몹시도 아팠지만 자신이 유난스럽게 행동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상석에 앉아 있는 묘씨와 엽학문에게 예부터 올렸다.
“후야, 부인.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하인을 통해 전부 들었습니다. 한데 두 분께서 정말로 오해하신 겁니다. 이 사람은 제 정혼녀인 매소쌍이며 묘 공자는 저희의 절친한 벗입니다. 오늘 묘 공자는 저희를 보러 왔는데, 제가 잠시 물건을 사러 밖에 나가는 바람에 두 사람만 그 집에 남아 있던 겁니다.”
그 말에 팽씨와 묘기전 부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씨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보세요. 다 오해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해? 난 저 말을 믿지 않네!”
묘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백한 사람이 왜 어멈을 시켜 집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는 말인가? 현장을 포착했는데 어떻게 한 사람 말만 듣고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간사동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대꾸를 하지 못했다.
“고모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너무 억지가 아닙니까?”
황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냉큼 끼어들었다.
“현장을 포착했다니요? 둘째 도련님은 그저 벗의 집에 손님으로 놀러 가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뭐 낯부끄러운 짓을 벌이는 걸 포착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고모님이야말로 말 한마디로 둘째 도련님이 밖에서 허튼짓을 하고 돌아다녔다고 단정 짓고 계신데, 이건 너무 주관적인 판단 아닙니까?”
황씨는 그리 말하더니 고개를 돌려 간사동을 쳐다보며 물었다.
“공자, 공자는 어느 가문 사람이십니까?”
그녀는 부티 나게 차려입은 간사동을 보더니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가 뱉은 말에도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사동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거렸다.
“회양후부의 여섯째 공자입니다.”
이때, 엽승신이 음흉한 목소리로 대신 그의 신분을 밝혔다.
간사동도 당연히 엽승신을 알아봤다. 지난번 자신이 함정에 빠뜨렸던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엽승신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를 못 알아보는 척했다.
“회양후부 사람이 어째서 정혼녀를 밖에 둔다는 말이냐?”
“이건 저희 집안일이니 부인과는 무관합니다.”
묘씨가 추궁하자 간사동은 선을 딱 그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말씀드렸으니 소쌍과 묘 공자는 결백한 겁니다.”
“아가씨, 우리 가문에서 대체 뭘 그리 잘못했기에 이렇게 거듭 믿지를 못하는 겁니까. 이래서 앞으로 어떻게 사돈지간으로 지내겠습니까?”
팽씨가 얼굴을 찌푸리며 언짢아하자 묘씨가 굳은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때, 엽영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외숙모님께서도 사돈지간으로 못 지낼 것 같다고 하시니 그럼 그만두시죠!”
그 말에 팽씨의 얼굴이 말린 오이처럼 확 일그러지자 황씨가 역정을 냈다.
“영교 소저, 욱하지 마세요! 우리 둘째 공자는 재능과 평판을 모두 갖추고 있고 용모 또한 아주 출중해요. 그래서 밖에 나가면 소저들이 서로 시집오겠다고 줄을 서죠. 어릴 때부터 함께 커온 정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양가가 서로 속속들이 잘 알고 있으니 정혼을 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이 소리에 엽영교는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댔다.
“아, 알고 보니 제가 오라버니께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군요. 그럼 전 과분한 오라버니를 넘보지 말아야겠네요.”
낯빛이 확 변한 황씨 곁에서 팽씨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혼례식 날짜가 이미 정해졌는데 넌 또 왜 시집오지 않겠다는 소리를 하는 게냐! 그저 오해에 불과한 것을……!”
“오해라고요?”
엽영교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오랫동안 오라버니 뒤를 밟았어요. 그런데 저 소저가 나무에 붉은 천을 묶어둘 때마다 오라버니가 그다음 날 그곳에 가더라고요. 단순히 절친한 벗이라면 그렇게 비밀스럽게 만날 필요가 있나요?”
황씨와 팽씨는 또 한 번 안색이 확 변했다. 팽씨는 싸늘한 눈빛으로 매소쌍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소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러자 매소쌍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제가… 제가 지병인 두통이 있는데 묘 공자님이 <월강부月江賦>를 연주해 주시면 두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습니다.”
“됐네요. 명확히 설명이 됐군요.”
묘기전은 그리 말하며 엽학문을 쳐다봤다.
“고모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엽학문도 소란통에 골머리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엽영교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너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어서 방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출가 전까진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말거라!”
그 말에 엽영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집 안 갈 거예요! 전 오해라는 말 안 믿어요! 설령 정말 오해였다 하더라도 전 오라버니께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명확히 보이지 않고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짐작도 할 수 없는 상황에 갇히기 싫었다. 온종일 의심과 방황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두려웠다.
“나리, 새언니. 우린 사돈 관계를 맺으려는 거지 원수를 지려는 게 아닙니다!”
묘씨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두 아이가 서로 잘 맞지 않다는 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영교는 기화를 전혀 못 믿고 있는데 무슨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겁니까?”
“그 입 다무시오! 이 집안의 가장이 도대체 누구인 거요!”
엽학문은 싸늘한 목소리로 묘씨를 꾸짖고는 상황을 정리했다.
“그저 오해에 불과할 뿐이오.”
지난번 엽연채와 엽이채의 혼사로 집안은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또 여식이 시집을 안 가겠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 정안후부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웃음거리가 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허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아이는 엽승덕의 밑으로 입적해야 했다. 그때도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으면 허서의 일도 꼬여 버리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맞습니다!”
팽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혼약 증서도 있고 모든 게 다 갖춰졌습니다. 우리 기화가 잘못을 하지도 않았고요. 관아에 고발한다 하더라도 혼인을 깰 이유는 없습니다.”
묘씨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전부터 이 혼사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정혼할 때부터 엽영교에게 묘기화는 과분한 짝이었는데, 방금 전 황씨의 어투에서도 그녀가 엽영교를 깔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그럼 차라리 파혼해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막상 파혼하자고 했더니 저쪽에서 죽어라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지난번에 혼례식 날짜를 연기했던 일, 묘기화가 자신에게 쪽지를 건넸던 일에 이어 이번 일까지 터지자 묘씨는 드러나지 않은 내막과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게 분명한데 어떻게 딸을 그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겠는가.
설령 이 모든 게 자신의 망상이더라도, 그들이 그저 혼례식 날짜가 정해졌는데 파혼하는 게 창피해서 그런 거라 치더라도, 딸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저런 성격을 가진 묘기화에게 시집가면 딸은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묘기화의 허물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러면 이쪽의 주장을 관철할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이만 가죠!”
묘기전이 그리 말하더니 옷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향했다. 묘씨 가문에서 데려온 하인은 얼른 묘기화에게 다가가 밧줄을 풀어 준 뒤 그를 일으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곳에 끌려온 순간부터 떠나는 지금까지 묘기화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간사동도 매소쌍의 밧줄을 풀어 주더니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엽승신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의 마음속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원망과 분노가 들끓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엽승덕이 갑자기 엽학문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