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할아버지, 할머니.”
엽연채가 그들에게 예를 올리자 묘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부군도 어제 시험을 보러 갔지?”
“예.”
이때 엽영교가 얼른 말을 가로채며 이렇게 말했다.
“연채가 긴장을 하기에 제가 기분 전환이라도 시켜 줄 겸 데리고 나온 거예요. 같이 식사하면 되겠네요. 사람이 많을수록 시끌벅적하고 좋잖아요.”
“사람이 많은 게 좋으면 네 큰오라비나 둘째 오라비를 부르면 되지.”
엽학문이 툭 뱉었다. 그 말에 엽영교의 표정이 살짝 차갑게 변했다. 지난번 추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운 후로 어떤 연유에서인지 아버지는 엽승덕을 점점 더 좋게 보고 있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그를 찾으니 확실히 그 전과는 달랐다.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죠.”
묘씨가 설전을 일단락하고 일행을 데리고 요릿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장식은 우아한 편이었고 널찍한 대당大堂에는 무려 서른 개가 넘는 식탁이 놓여 있었다. 장사도 퍽 잘되는지 그중 절반은 손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점원이 얼른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손님, 자리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대당이면 되네.”
엽학문은 엽영교의 대꾸를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귀빈실이 좋지 않느냐?”
“매번 귀빈실에서 먹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더했다.
“가끔 시끌벅적한 대당에서 먹는 것도 좋지 않나요?”
엽학문은 그래도 탐탁지 않아 하는데 묘씨가 엽영교의 미간을 콩 쥐어박으며 말했다.
“그래. 그리하자꾸나. 고 녀석 참.”
엽영교가 곧 출가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눈빛은 더욱 자애롭게 변했다.
그들은 점원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 식탁 앞에 앉았고 점원은 그들에게 요리를 고르라고 했다.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이곳의 간판 음식인 통닭구이를 골랐고, 다른 요리도 몇 개 더 주문했다. 일각쯤 지나자 완성된 요리가 나왔다.
엽영교는 일부러 부모를 불러 이곳의 간판 요리인 통닭구이를 먹게 했다. 그런데 잘라서 먹어 볼수록 엽학문은 그저 그런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건지 모르겠고, 집안 요리사가 만든 음식에도 못 미친다 싶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왜 이곳으로 자신을 부른 건지 알겠다 싶었다. 분명 손녀가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엽영교에게 자신들과 약속을 잡아 이곳에서 식사를 하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밉살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엽연채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엽연채는 젓가락을 든 채 입을 삐죽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가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이 건들지 마! 도와줘요! 인신매매범이 내 아이를 유괴하려고 해요!”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창밖을 내다보니 사람들로 북적대는 큰길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안고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고, 한 부인이 그 뒤를 쫓아가며 비통한 목소리로 거리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 거리에서 아이를 유괴하는 인신매매범이 있나 봐요. 저희도 어서 보러 가요!”
엽영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쓸데없이 참견 말거라. 보긴 뭘 보겠다는 게냐.”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타박했다.
“아버지, 아버지도 어쨌든 관리이십니다. 이 일을 담당하지 않으시더라도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인데, 어떻게 이렇게 내버려 두실 수가 있어요!”
엽영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독촉했다. 엽연채는 금방이라도 진땀을 쏟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거들었다.
“방금 전에 보니 낯익은 사람이 불의를 보고 용감하게 그 인신매매범의 뒤를 쫓던데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불의를 보고 용감하게 뛰어든 사람이 있으니 우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엽학문은 조금도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쫓아간다 하더라도 이 늙은 몸으론 따라잡지 못할 게다.”
“하지만…….”
엽영교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엽연채가 만류하듯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묘씨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이런 일은 젊은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다. 우린 별 도움도 주지 못할 테니 유이를 보내면 된다.”
엽연채는 방금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완자를 하나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생선 완자 정말 개운한 맛이 나네요.”
그녀는 생선 완자를 먹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불의를 보고 용감하게 뛰어든 사람이 허서 그 파렴치한 놈과 닮았던데…….”
‘허서?’
엽학문은 그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엽연채가 자신의 가장 귀하고 능력 있는 손자를 파렴치한 놈이라고 욕할 줄은 몰랐다. 그는 화가 나 낯빛이 확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엽연채를 나무랐다.
“넌 상스럽게 무슨 그런 말을 뱉는 게냐? 잠깐. 너 방금 그자가…….”
엽학문은 아주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춘시 첫날인 어제, 자신의 손자는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별말 안 했는데요. 그냥 밖에서 사람을 쫓던 그 사람이 어떤 파렴치한 놈을 닮았다고 했을 뿐이에요.”
엽연채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서생들이 입는 도포를 입었던데……. 부정행위를 해서 시험장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르죠.”
이리 말을 더한 엽연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런!”
엽학문은 호통과 함께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할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엽연채는 고개를 들더니 무섭고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전 원수 놈을 좀 욕한 것뿐인데요.”
엽학문은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손자를 번번이 욕하다니! 그러나 어떻게 친자 관계를 인정할지 그 방법에 대해 아직 상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갑자기 허서가 자신의 친손자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엽학문은 엽연채를 혼내 줄 구실을 찾으면서 그녀가 했던 말을 천천히 더듬어 보았다. 불의를 보고 용감하게 뛰어든 사람이, 인신매매범을 쫓던 그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손자라면? 진짜로 부정행위를 저질러서 시험장에서 쫓겨났다면?
물론 엽학문은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엽연채가 저주를 하니 가슴이 조마조마해져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네가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구나. 가 보자꾸나. 나가서 한번 봐야겠다.”
엽학문은 콧방귀를 뀌더니 대문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어……?”
묘씨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맹한 소리를 흘렸다.
“어머니, 저희도 어서 가 봐요.”
엽영교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묘씨를 잡아당기더니 엽연채를 끌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이 큰길로 나와 보니 이미 많은 백성들이 그곳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벌건 대낮에 아이를 유괴하려고 하다니.”
“누가 아니래요!”
엽학문이 노점 상인 앞으로 다가가 황급히 물었다.
“그 인신매매범은 어디로 갔소?”
노점 상인은 어리둥절해하더니 남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을 돕겠다며 꽤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엽학문은 얼른 그쪽으로 걸음을 재촉했고, 엽연채와 묘씨 모녀도 서둘러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그들은 구불거리는 길을 지나 마침내 육수가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묘기화가 들어갔던 그 집은 이미 꽤 많은 백성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헝겊 조각으로 기운 옷을 입고 있는, 행색이 초라한 부인이 문 앞에 앉아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둥글고 큰 얼굴을 가진 회색 옷의 어멈이 서서 굳은 표정으로 그 앞을 막고 있었다.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신매매범이, 유괴범이 길에서 내 아이를 유괴했다고! 그런데 당신들은 그놈을 숨겨 주는 거야? 어서 비켜! 비키라고!”
가난한 부인이 울부짖었다. 그 부인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 대며 어멈을 부여잡았다.
“여기에 무슨 인신매매범이 있다는 거요? 당신 아이는 더더욱 없어.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요?”
어멈은 굳은 얼굴로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내가 분명 인신매매범이 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걸 봤어!”
가난한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반박했다.
“내가 들어가서 찾지 못하게 하고 있잖아. 그게 바로 당신들이 그자를 숨기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지!”
“그 말이 맞네! 어서 저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 아이를 찾게 하시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이 덩달아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군가 이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걸 보진 못했지만, 어머니가 초조한 모습으로 아이를 찾고 있으니 설마 거짓말을 할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고 부인 편에 섰다.
“당신들……! 이곳은 우리 집이요. 당신들이 뭔데 들어가서 찾으라고 하는 겁니까!”
어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필사적으로 문 앞을 막아섰다.
“여보시게. 그쪽이 결백하다면 저 사람을 좀 도와주게나!”
사람들 사이에 있던 한 노부인이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지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쪽 집에 들어갔다면 저 부인을 도와 공덕을 쌓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그쪽 집에 들어간 게 아니라면 저 부인이 그걸 똑똑히 알게 될 거고, 그럼 다른 곳을 뒤질 시간을 벌게 되니 이 또한 공덕을 쌓는 게 아니겠소.”
“그 말이 맞지!”
백성들이 한목소리로 아우성쳤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집 전체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인신매매범이 뒷문이나 측문으로 도망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벌써 그 부인을 안으로 들여보내 아이를 찾게 했을 텐데, 회색 옷의 어멈은 뜻밖에도 여전히 양보하지 않았다.
“그렇든 아니든, 이곳은 살림집인데 당신들이 찾고 싶다고 막 그리해도 된단 말이오? 우리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요? 그리고 당신들은 관아 사람도 아니잖소.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요?”
이때, 사람들 사이로 싸늘한 호통 소리가 들렸다.
“후작위를 받은 내가 있는데 이런 조그만 사택도 수색하지 못한다는 게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보니 비단옷을 입은 나이 든 사내가 위엄이 서린 얼굴로 앞으로 나왔다. 바로 엽학문이었다.
그러자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가난한 부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흐느끼며 물었다.
“나리께서는 누구신지…….”
“난 후작위를 받은 정안후靖安侯이며 조정의 비서소감이다. 인신매매는 내 소관이 아니라지만 어쨌든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인데 이런 일을 보고 어떻게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엽학문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후부 나리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백성들은 잇따라 엽학문을 칭송했다.
엽학문은 주위를 살펴보고는 허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다음 뿌듯함을 만끽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니 그는 정의감이 샘솟고 위엄이 풍겨 나와 순간 자신이 영웅이라도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