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2층으로 올라가 회자형回字形 구조를 따라 모퉁이를 도니, 도화 귀빈실이 나왔다. 여기도 문은 없었고 귀빈실 내부와 외부를 격리하는 커다란 병풍만 세워져 있었다. 병풍 위에는 흩날리는 복숭아꽃과 활짝 핀 화사한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엽연채가 병풍 안으로 들어가니 등진 채 탑상에 앉아 있는 엽영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복숭아꽃이 수놓인 수홍색 윗옷와 치마를 입고 있었고 옥패는 한쪽에 서 있었다. 한편엔 불이 지펴진 훈롱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모.”
엽연채가 엽영교 옆에 앉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구나, 연채야.”
엽영교는 인사에 화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귀엽고 아리따운 그녀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어리고, 살짝 동그란 계란형 얼굴은 칼로 깎은 듯이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해쓱해지니 묘씨와 더 닮아 보였다.
“고모,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시면 저한테 이야기해 보세요.”
엽연채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그동안 엽영교에게 여러 차례 서찰을 보냈지만, 엽영교는 항상 걱정할 필요 없다며 자신의 일이고 자신에게 생각이 다 있다고만 답해 왔다.
엽연채는 엽영교도 주관이 있는 사람이니 그녀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수척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내 걱정거리가 뭔지 모른단 말이야?”
엽영교는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표숙 일이죠? 고모, 그동안 그분 일로 계속 고민하셨잖아요. 해답은 얻으셨어요?”
엽영교는 옅은 미소와 함께 이리 답했다.
“해답은 무슨. 오라버니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안 적이 한 번도 없는걸.”
“참, 변경 지역에는 가셨어요?”
엽연채가 묻자 엽영교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냉소를 지었다.
“갔을 리가 있겠니?”
엽연채는 그 말을 듣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확 찌푸렸다. 지난번 묘기화는 변경 지역에 가기 위해 엽영교에게 혼례식 날짜를 미뤄 달라고 했었다. 이후 그 소동이 벌어지자 묘씨는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니 그의 뜻에 따라 주겠다며 혼례식을 다음 해로 미루었다.
“내가 말이지, 그동안 사람을 시켜 오라버니를 몰래 지켜봤거든.”
“어떻던가요?”
엽연채가 얼른 물었다.
“우선 연극부터 보자꾸나. 곧 시작하겠구나.”
아래층 무대를 쳐다보는 엽영교의 입가엔 조롱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일각이 되자 제시간에 딱 맞춰 <제화부용>의 막이 올랐다.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대에 시선을 두었고, 엽영교는 공연을 보며 이렇게 운을 뗐다.
“이 연극 참 대단하지. 연초부터 연말까지 공연되니 말이야. 그런데 다들 훌륭한 연극이라고 하지만 온종일 공연하니 누구라도 질리게 마련이지. 아래에 있는 관객들 좀 봐…….”
그리 말하며 손가락으로 아래층을 가리켰다. 엽연채와 혜연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쳐다보니 아래층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몇몇 관객들조차 연극엔 전연 관심이 없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질린 게지. 손님이 줄어든 건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주야장천 이 연극만 공연되니 누가 더 보려고 하겠니. 그런데도 계속 이 공연을 하고 있어. 매일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정각이 되면 무대 위로 배우가 나온단다.”
그리 말하는 엽영교의 눈빛엔 조롱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묘 공자도 매일같이 이곳에 와서 배우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단다. 마치 이 연극이 그 한 사람만을 위해 공연되는 것처럼 말이야.”
엽연채의 안색이 먹장구름처럼 어두워졌다.
“나중에 돈을 써서 알아보니 심부름꾼이 이렇게 말하더구나. 원래는 작년 구월이 지난 후 이 연극을 내리려고 했대. 그런데 묘 공자가 극단의 단장에게 큰돈을 주며 계속 공연을 하라고 해서 보름을 더 했다지.
하지만 지겨워진 손님들이 모두 떠나 버렸고, 이에 단장은 더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더구나. 그런데 웬걸. 묘 공자가 아예 큰돈을 써서 이 공연장을 통째로 구입했다는 거야. 이 연극이 계속 공연되게 하려고 말이지.”
사정을 설명하는 엽영교의 눈빛엔 차디찬 야유가 감돌았다.
“그 인간이 그렇게 돈이 많은 줄은 이제야 알았다.”
엽연채는 실망감에 숨을 ‘훅’ 내쉬며 물었다.
“그 뒤로는요?”
“절절한 사랑 이야기지!”
엽영교는 기가 찬 듯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후에 또 알아보니 이 연극의 극본을 쓴 사람이 꽃처럼 아름다운 소저이며, 묘 공자는 며칠에 한 번씩 몰래 찾아와 그 소저를 보고 간다고 하더구나.”
그 말에 엽연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도 엽승덕과 같은 과였군요.”
“그러게 말이다!”
엽영교는 더욱 빈정대는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이 연극은 바로 묘 공자, 그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란다! 연극에 등장하는 명문대가의 공자가 바로 오라버니이고 무방舞坊의 간판 배우가 바로 그 소저인 게지. 두 사람의 정은 이리도 깊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거야. 왜? 각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어 함께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연극 속 남주인공의 아내인 거고.”
연극 속 평남후부 세자는 이미 본처가 있는데도 무희인 부용과 지기知己가 되었다. 그는 금琴을 연주하고 부용은 이에 맞춰 춤을 추었고, 이내 서로에게 감정이 싹트더니 두 남녀는 결국 제 발로는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남후부 세자에게는 이미 본처가 있었고, 가문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 역시 져야 했기에 부용은 그런 그를 위해 스스로 물러났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이별이라는 결말을 맞게 됐다.
엽영교가 이렇게 진실을 밝히자 엽연채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더니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과연 그래서 묘기화가 매번 이곳에 올 때마다 애정 어린 슬픈 눈으로 무대 위의 약란 소저를 쳐다봤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약란 소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연기하고 있는 그 인물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무대 위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은 비통해하며 천지 신령께 절을 올리고 있었다. 엽영교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길고 뾰족한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자!”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어디 가시게요?”
“가서… 그 사통하는 남녀를 잡아야지.”
엽영교는 그리 말하며 광기 어린 분노의 눈빛을 은근히 번뜩였다. 엽연채도 더는 말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도화 귀빈실을 나왔다.
그런데 둘은 아까 올라왔던 그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멀리 있는 또 다른 계단으로 돌아서 내려왔다. 깊은 사랑에 빠진 묘 공자가 오늘도 분명 빼먹지 않고 이곳에 와서 박수갈채를 보낼 줄 알기에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공연장을 나온 엽연채 일행은 바로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대명가大明街로 꺾어 들어갔다. 그런 뒤 ‘오곡주루五谷酒樓’라는 요릿집으로 들어가 그곳 뒤뜰에 멈춰 섰다.
그러나 이 요릿집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그곳을 바로 빠져나왔다. 엽영교는 길을 잘 아는 듯 이리저리 돌며 걸어가다가 마침내 한 작은 골목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엽연채가 바깥쪽을 내다보니 이곳은 ‘육수가六隨街’로 불리는 작은 골목이었다. 주변은 온통 자그마한 가옥뿐이었다.
이때, 마차 한 대가 조그만 눈송이를 튀기며 육수가를 내달리더니 한 가택 앞에 멈춰 섰다. 평범한 일진원一進院식 집인데 밖에서 보니 커다란 대추나무가 심어져 있고 나무 꼭대기엔 붉은색 천이 묶여 있었다.
엽영교는 골목에 숨어 비웃듯이 입꼬리를 추켜올리더니 그 나무 꼭대기에 매인 붉은 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붉은 천이 묶여 있을 때마다 그다음 날 묘 공자가 이곳에 와서 그 여인을 만나더라고.”
엽연채는 왠지 모르게 이 길이 좀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내 조그마한 집 문 앞에 멈춰 선 마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새하얀 도포를 입고 긴 머리칼을 등 뒤로 늘어뜨린 사내였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을 한 사내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며 신선이 따로 없는 풍모를 자랑했다. 바로 묘기화였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대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가자!”
엽영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엽연채를 데리고 사통하는 남녀를 잡으러 가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요릿집으로 돌아가자.”
엽연채는 그녀가 어느 정도 준비해 두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마차가 세워진 오곡주루로 돌아가 보니 저 멀리 사람들 사이로 엽학문과 묘씨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해. 내가 널 끌어들였어. 하지만 네가 곁에 없으면… 용기가 안 나서…….”
고개를 돌린 엽영교가 흐리멍덩한 눈빛을 한 채 흐느끼더니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엽연채는 그녀의 흐늑흐늑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파 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영교야… 어머, 연채도 있었구나.”
둥근 모란꽃 문양이 들어간, 소매가 없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는 묘씨는 손에 손난로를 들고 있었다. 전 마마와 여종 한 명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엽학문은 그 곁에서 뒷짐을 진 채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래는 기분이 대단히 좋았으나 엽연채를 보자마자 기분이 착 가라앉고 말았다.
엽영교와 엽연채가 오곡주루 대문 앞에 멈춰 서자 엽학문이 콧방귀를 뀌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조금 있으면 혼례식인데 왜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것이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집에 있는 주방 하인들에게 해 달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이곳에 직접 올 필요가 있느냐?”
“아버지, 그건 아니죠.”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엽연채가 보니 그녀는 마지못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버지도 자주 밖에 나오셔서 식사도 하시고 술도 드시잖아요. 밖에서 만든 요리는 그 나름의 독특한 맛이 있는걸요. 안 그러면 세상에 있는 모든 요릿집은 다 문을 닫아야겠죠.”
어제 춘시가 시작돼 허서가 시험장으로 들어간 후로 엽학문은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엽영교가 서쪽 거리에 위치한 한 요릿집의 간판 요리인 통닭구이가 꽤 맛있다며 엽학문과 묘씨에게 함께 밖에 나가 식사를 하자고 졸랐고,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던 엽학문은 그리하겠다고 응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장손녀를 보게 될 줄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