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이각 후, 마차는 정국백부에 도착했다. 경인과 소종이 서쪽 측문에 놓인 걸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기별도 없이 갑자기 정안후부 마차가 나타났다. 경인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마차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채 마마는 마차에서 내린 후 경인을 따라 궁명헌으로 향했다.
엽연채가 혜연과 함께 꽃무늬를 수놓고 있는데 밖에서 추길의 기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가씨, 채 마마가 왔어요.”
“그래?”
엽연채는 기뻐하며 얼른 손에 든 붓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채 마마가 추길의 안내를 받아 서차간으로 들어왔다. 엽연채는 얼른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고 혜연은 차를 내왔다.
“웬일로 이렇게 왔어요.”
“마님께서 곧 춘시를 보실 아가씨 부군을 생각하시며 이것들을 특별히 선물하셨습니다.”
엽연채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채 마마는 혈연이 담긴 봉투를 꺼내 건넸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다시 열었다.
“큰아가씨께 말씀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작년에 향시가 끝난 후 어떤 벼락 맞아 죽을 놈이 마님께 서찰 한 장을 집어 던졌는데, 은정랑의 자식놈도 향시에 합격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엽연채의 눈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채 마마는 씩씩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누구였는지야 말 안 해도 뻔하죠. 은정랑 그 빌어먹을 여편네가 사주한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은밀히 송화 골목에 가 봤더니 그자들은 이미 도성을 떠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감옥에서 풀려난 세자야도 집을 떠나셨죠.
아마 고향으로 돌아가 힘들게 공부하고 있을 그 빌어먹을 놈 곁에 계셨을 겁니다. 그놈이 춘시에 합격하게 되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입니다. 혹여나 마님께 해를 끼치려 들까 걱정입니다!”
채 마마도 엽승덕이 위쪽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들이 분수에 만족한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분수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온씨에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지도 몰랐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채 마마 생각은 뭐예요?”
“뭐랄 게 있습니까? 아가씨께서 전에 부리시던 여종들이 모두 별장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몇 명을 불러와 영귀원을 안전하게 지키게 하면 되죠. 음식도 더 꼼꼼하게 신경을 쓰고요.”
엽연채가 생각해 보니 전생에서 허서는 향시에 합격한 뒤 엽승덕 아래로 입적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엽승덕이 감옥살이를 하는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입적이 향시에 합격한 후가 아니라 춘시 후로 미뤄진 것이다.
이제 여기서 더 미뤄지게 되면 은정랑은 나이가 들어 버리고 허서 또한 나이가 적지 않으니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러니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방비할 필요 없어요. 그럼 얼마나 고생스러워요. 차라리 어머니한테 큰이모댁에서 지내시라고 하면 되죠.”
“그러면 되겠네요!”
엽연채의 제안에 채 마마가 두 눈을 번뜩이며 동조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큰아가씨.”
채 마마는 차를 다 마신 후 서둘러 궁명헌을 떠났다.
온사월은 원래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 정성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추경이 술을 한가득 담가 버린 참이었다. 술은 시간이 좀 흘러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보니 그들은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 * *
춘시가 가까워지자 도성 안엔 점점 더 많은 거인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분위기도 엄숙하게 변하고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월 초하룻날이 되었다. 꽃샘추위는 살을 에는 듯했고, 칼바람은 가지 위의 매화꽃을 흔들어 댔다.
도성 곳곳에서는 썰렁하면서도 시끌벅적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른 아침부터 거인들은 객줏집에서 나와 걷거나 혹은 마차를 타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화려하지만 좀 낡아 보이는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시험장 문 앞에 멈춰 섰다. 평범한 모양새라 그곳에 모여 있는 거인들과 마차들 사이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주운환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더니 엽연채를 부축해 주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주 백야도 그들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집안에서는 엽연채와 주 백야만 시험장에 들어가는 주운환을 배웅하러 왔다. 오는 내내 거인들이 길에 어찌나 많은지, 미리 출발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시辰時(오전 7시~9시)에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벌써 묘시卯時(오전 5시~7시) 끝 무렵이었다.
엽연채는 품에 안고 있던 커다란 종이봉투를 주운환에게 건네며 말했다.
“건량乾量(건조식품)이에요.”
주운환이 종이봉투를 열어 보니 안에는 소 없는 찐빵과 소병燒餠(밀가루를 반죽해 한쪽에 참깨를 뿌려 구운 것)이 들어 있었고, 봉투의 절반은 육포가 차지하고 있었다. 거인들의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음식은 찬합에 담을 수 없고 기름종이로만 감싸야 했다.
“충분하느냐?”
주 백야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에서 아흐레 동안 지내야 하니 말이다.
“최선만 다하면 되니 몸 상하지 않게 하거라. 올해 안 되면 내년도 있다. 설령 그리해서도 붙지 못한다 하더라도 넌 이미 거인이다.”
이에 주운환은 입꼬리를 쓱 올리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쳐다보니 그녀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두 눈이 아련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희고 보드라운 얼굴은 쌀쌀한 봄바람을 맞아 홍조를 띠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루만져 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운환은 꾹 참고 돌아서서 시험장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금세 거인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으나 주 백야는 여전히 그곳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때, 추길이 갑자기 엽연채를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아가씨.”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추길이 한곳을 쳐다보며 입짓을 해댔다. 이에 엽연채가 추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검은 덮개가 달린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서생들이 입는 회백색 도포를 입은 허서가 서 있었다. 그리고 은정랑, 엽승덕, 엽균이 그의 곁에 서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건량을 건네받은 허서는 돌아서서 시험장을 향해 걸어갔고, 이내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엽승덕이 엽연채를 발견하고는 기품 있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엽균은 엽승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엽연채가 눈에 들어오자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예전의 그였다면 은정랑, 허서와 함께 있는 모습을 엽연채에게 들켰다고 난감해하며 이후의 상황을 두려워했을 테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은정랑과 허서와 함께 있는 게 떳떳했기 때문이다. 엽균은 자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악독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원망했다. 모녀는 은정랑과 허서를 정안후부로 들여 그들을 괴롭히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마저 감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친아버지를 공경하지 않고 불효하는 자는 인간이 될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가시죠…….”
은정랑만이 당혹감을 내비쳤다.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이 살짝 창백해진 그녀는 황급히 이 말을 하며 마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엽균과 엽승덕이 잇달아 마차에 올랐고, 이내 그들은 시험장을 떠났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엽연채의 곱고 아리따운 눈동자엔 조롱기가 스쳤다.
* * *
엽연채가 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일각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엽연채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비로소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 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한상에 앉아 훈롱燻籠(손을 쬐는 작은 화로에 씌우는 바구니 모양의 덮개) 위에 언 손을 올려놓고 녹였다.
“아가씨, 영교 아가씨께서 아가씨에게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혜연이 쟁반을 들고 걸어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따뜻한 차와 옅은 꽃문양이 들어간 서찰이 있었다.
엽연채는 서찰을 집어 펼쳐 보았다. 추길은 그녀 맞은편에 놓인 수돈에 웅크리고 앉아 훈롱에 손을 녹이던 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귀찮은 추길이 앉은 채로 물었다.
“아가씨, 뭐라고 적혀 있어요?”
“내일 연극을 보러 가자고 하셔.”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무슨 연극이요?”
추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더니 이내 만류했다.
“봄이기는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요. 그냥 집에서 자수를 놓으며 편하게 계시는 편이 더 나을 거예요.”
“하여튼 게을러 빠졌어. 내가 아가씨와 함께 갈 테니 넌 집이나 봐라.”
혜연이 나한상 한쪽에 앉으며 추길을 타박했다. 그러고는 엽연채에게 소식을 마저 전했다.
“참, 서찰을 전해 주러 온 옥패가 영교 아가씨의 혼례식 날짜가 정해졌다고 했어요. 이번 달 스물엿새예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지?”
엽연채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두 분의 혼사는 벌써 준비한 지 몇 년이나 되었으니까요. 원래는 작년 팔월 말이었는데 결국……. 아무튼 필요한 건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삼월은 영교 아가씨와 상극이고, 사월은 혼례식을 기피하는 달이지요.
그리고 오월은 독월毒月(과거 중국 북방의 일부 지역에서 오월을 가장 주의해야 하는 달로 여겼음)이니 더 늦춰지면 팔월에 혼례식을 치러야 해요. 그러니 차라리 이번 달 말로 정한 거죠.”
혜연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의 손에 손난로를 쥐여 주었다.
* * *
춘시 이틀째 날, 기온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낮았다. 마차 한 대가 회방루의 뒤뜰에 멈춰 서고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이 땅에 내려졌다. 엽연채는 그걸 밟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엽연채는 오리털로 만든 소매 없는 진홍색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추워서 손을 비비다가 불현듯 ‘시험장은 얼마나 추울까.’ 하는 생각이 들어 주운환이 걱정되었다.
“아가씨, 가시죠!”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뜰에서 나가 회랑을 따라 걸어갔다. 그러자 예의 그 희곡사로 장식된 커다란 벽이 보였고, 벽을 돌아가니 고아한 운치가 느껴지는 넓은 회관이 나타났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아니면 연극에 대한 사람들의 열기가 식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득 놓인 팔선상은 대부분 빈 상태였다. 나이 든 사람 몇 명만이 드문드문 띄어 앉아 연극을 보고 있었다.
“부인, 어느 자리를 원하십니까?”
심부름꾼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손님이 적어서인지 그의 태도는 전보다 더욱 공손했다.
“2층 도화 귀빈실로 안내해 주시게.”
엽연채가 말했다.
“예.”
심부름꾼은 헤헤 웃으며 엽연채를 위층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