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얼굴을 봤는데 신분을 묻지 않는 것도 이상하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모친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분들은 어디에서 오신 귀한 손님입니까?”
신양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전에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을 두 번 도와준 적이 있어 감사 인사를 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넌 어서 가 보거라.”
그 말에 하가는 미소를 지으며 그곳을 떠났다.
진씨의 눈은 하가의 뒤를 쫓으며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더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신양 공주는 그런 진씨의 모습에 기가 막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좋게 내보냈다.
“내가 잠시 후에 외출을 해야 하오. 그대들의 마음은 내 잘 알았으니 이제 그만들 가 보시오.”
진씨와 주묘서는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비쳤다.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투지를 활활 불태웠다.
엽연채 일행은 아죽을 따라 본채에서 나온 후 수화문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앉은 진씨는 가슴이 벅차올라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뗐다.
“춘절을 쇤 다음 다시 선물을 들고 와서 마마를 만나 뵙자꾸나.”
엽연채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 일에 끼고 싶지 않아 그저 웃으며 돌려 말했다.
“이제 어머님도 공주 마마와 안면을 트셨으니, 다음에 오실 땐 어머님과 아가씨가 함께 오시면 되겠네요.”
진씨와 주묘서는 그 말에 안색이 확 변했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지난번 태자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주묘서가 엽연채를 떼어 놓고 혼자 가는 바람에 그런 결말을 맞게 되었다. 안 그랬다면 그녀는 여전히 태자부의 귀한 손님일 것이다.
진씨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공주 마마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너다. 그러니 네가 직접 와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
엽연채는 이 일에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아예 대놓고 말했다.
“어머님, 설마 하소군왕을 사위로 삼겠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진씨는 그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지적하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하소군왕이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던데 그럼 딱 혼담이 오갈 나이이지 않느냐. 네가 공주 마마의 은혜를 입은 일이 계기가 되어 네 큰시누이가 하소군왕과 인연을 맺게 된다면 내 너의 크나큰 은혜는 잊지 않으마.”
주묘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움츠러들었지만 그러면서도 또 궁금증을 못 이겨 슬며시 엽연채와 진씨의 표정을 살펴봤다.
엽연채는 진씨의 말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하소군왕을 마음에 품고 있다니, 정말이지 여전히 꿈 한번 야무지구나!’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 마마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신 거지, 제가 공주 마마께 은혜를 베푼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가 있습니까? 마마의 아드님마저 염두에 두신 겁니까?”
말문이 막힌 진씨는 성이 난 목소리로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그게… 이런 크나큰 은혜를 입었는데 공주 마마께서는 부족한 게 하나도 없으신 분이니 우리가 무엇으로 보답을 할 수 있겠느냐? 네 큰시누이가 하소군왕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수밖에 없는 게지.”
엽연채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진씨의 얼굴에 차를 뿜었을 것이다. 저런 뻔뻔스러운 말마저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다니.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그럼 어머님께서 다음번에 공주 마마를 뵐 때 방금 하신 말씀을 그대로 마마께 전해 보시지요.”
과연 그렇게 나갈 수 있을지 한번 보고 싶었다. 진씨는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이 확 굳지더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 * *
그날, 집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서둘러 온씨와 외할머니께 드릴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납팔臘八(음력 12월 8일) 전에 완성된 새 옷을 들고 정안후부로 가서 온씨에게 건넸다.
섣달그믐날 밤엔 모두 모여 함께 식사를 한 뒤 처소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쓸쓸한 방 안에 앉아 밖에서 사람들이 터뜨리는 폭죽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전에 춘절을 쇨 때는 곁에 엽영교, 엽미채 그리고 그 시절의 엽이채가 함께해 즐겁게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월 초이튿날, 엽연채는 친정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찬바람을 쐰 탓인지 잔병을 앓게 됐다. 진씨는 공주부에 다시 가자고 엽연채를 재촉했지만 그녀는 병을 이유로 시간을 미루었고, 정월 대보름이 지나서야 그녀는 완전히 회복했다.
보름 후면 삼 년에 한 번 있는 춘시가 열리니, 도성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고 곳곳엔 서생들이 넘쳐났다. 객줏집의 숙박료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렇게 정월 열여드레,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여로에 지친 서생들의 발걸음을 쫓아 성문으로 들어섰다. 마차의 발이 살짝 걷히자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그녀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붉은 입술을 씩 올렸다. 다름 아닌 은정랑이었다.
“드디어 돌아왔네요.”
은정랑은 발을 내리더니 고개를 돌려 엽승덕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군.”
엽승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난 상주에서의 생활이 끝난 게 못내 아쉽구려. 거기엔 우리 세 가족만 있고 성가시게 구는 것들이 없었잖소.”
“아버지,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춘시에만 붙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으실 겁니다.”
허서가 장담했다. 그동안 피로가 쌓여 그는 몰라보게 수척했지만, 인상은 전보다 더 성숙하고 듬직해져 있었다.
마차는 장명가를 지나 동대가로 들어섰고, 일각이 더 지나자 송화 골목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존거로 들어선 마차는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나리, 마님. 돌아오셨습니까?”
일찌감치 나와 있던 어멈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큰공자님께서 하루에 몇 번이고 이곳에 들리셨어요.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두 분이 마침내 돌아오셨네요.”
먼저 내린 엽승덕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은정랑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럼 어서 사람을 보내 큰도련님에게 알리거라.”
“후야께도 알리거라.”
“예!”
엽승덕의 분부에 봉춘은 히히 웃으며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정안후부에 도착한 봉춘은 우선 엽학문에게 그들의 도착을 알리고 다시 엽균에게 소식을 알리러 갔다.
엽학문은 자신의 금쪽같은 손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벅차올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보러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손윗사람인 그가 무작정 방문하는 건 보기 좋지 않으니, 손아랫사람인 그들이 자리를 마련해 그를 불러야 했다.
그 시각, 엽균은 영귀원에 발이 묶여 『금강경』을 필사하고 있었다. 온씨는 요 며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몇 차례 악몽을 꾸었다. 그 말을 들은 묘씨는 사소한 일이 아니라며 엽균이 그녀를 찾아가 경서를 필사하면서 액땜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엽균은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묘씨가 고함을 치며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온씨 곁에서 경서를 필사하고 있었다.
온씨는 온몸이 나른해졌다. 엽균이 자신을 대신해 경문을 필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좀 좋아진 그녀는 침실에서 누워 눈을 붙였다.
엽균은 응접실에서 경서를 필사하고 있었고 추풍은 그에게 먹을 갈아 주고 있었다. 엽균은 속으로 이렇게 투덜댔다.
‘평소 어머니께 가장 효도하는 사람이 연채 아니었나? 그런데 이번엔 왜 안 와서 내가 이런 걸 해야 하냐는 말이야.’
“이제 두 번만 더 쓰시면 됩니다!”
추풍이 옆에서 격려하며 그가 쓴 글자의 먹물을 ‘후’ 불었다.
“앞으로 두 번이면… 해가 질 때까지 해야겠네…….”
엽균은 이리 한탄하며 치통을 앓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유의 일을 가장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있어 필사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엽균과 추풍이 그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한 어린 여종이 머리를 내밀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엽균은 그 여종이 밖에서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는 막일을 하는 하급 여종임을 알아봤다.
엽균이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거기서 뭐 하느냐?”
막일을 하는 여종들은 보통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종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안으로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그쪽 봉춘이가 왔습니다…….”
“봉춘이가?”
엽균은 두 눈을 번쩍 떴다. 흥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봉춘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상주에 갔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왔다면? 게다가 오늘이 정월 열여드레이고 춘시는 이월 초하룻날이니 정랑과 허서가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알겠다……!”
엽균이 설레는 마음에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추풍이 그에게 ‘쉿’ 하더니 슬며시 침실 쪽을 가리켰다. 엽균은 그쪽을 흘끗 쳐다보았고 아무런 기척도 없자 온씨가 자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도련님, 어서 마저 필사하세요!”
“그래!”
엽균은 의욕이 철철 넘쳐 붓을 집어 들더니 진지하게 필사를 했다. 그는 『금강경』을 총 세 번 필사해야 했는데, 첫 번째 필사를 할 때는 오전 한나절이 걸렸다. 그런데 나머지 두 편을 필사할 때는 의욕이 넘쳐 한 시진 만에 끝내 버렸다.
“다했다!”
엽균이 환호성을 지르며 붓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옷을 툭툭 치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곧 온씨와 채 마마가 침실에서 나왔다. 온씨는 문 입구에 서서 멀어져 가는 엽균의 뒷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
“마님.”
채 마마가 서차간에서 필사된 『금강경』 세 장을 가지고 나왔다. 온씨가 필사된 금강경을 받아보니, 첫 번째로 필사된 금강경은 대충 휘갈겨 써서 글씨가 깔끔하지 않은 데 반해 나중에 쓰인 금강경의 글씨는 놀라울 정도로 깔끔했다. 나중에 쓰인 두 장은 매우 공을 들여 적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세 장 모두 엽균의 필체로 쓰여 있어 직접 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온씨의 얼굴에서는 기쁜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위해 경서를 필사하라고 할 때는 그렇게 하기 싫어하며 꾸물대더니 그 인간말짜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기운을 내더구나.”
“마님…….”
채 마마는 옅은 한숨을 쉴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모습에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곧 있으면 춘시인데 사위는 준비가 잘되어 가는지 모르겠구나. 맞다, 지난번에 녹용을 좀 얻지 않았느냐? 그걸 좀 보내면 좋겠구나.”
그러자 채 마마가 염려를 표했다.
“녹용은 먹었다가 몸에 열이 오를 수도 있으니 차라리 혈연血燕(최고급 제비집)을 좀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원기를 돋우는 데 좋은 반면, 몸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니까요.”
그 말에 온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채 마마는 혈연을 챙긴 후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