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06화 (206/858)

제206화

이튿날 아침, 엽연채가 단장을 마친 후 동쪽 측문으로 가 보니 진씨 모녀가 벌써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언니, 왜 이렇게 늦게 와요.”

“마차에 오르거라.”

세 여인이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좁은 골목 밖으로 나와 도성 중심으로 향했다. 그들은 계획한 대로 먼저 태자부부터 들리기로 했다.

주묘서는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문발을 걷어 올린 채 밖을 내다봤다.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긴장이 되면서도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마침내 마차는 태자부의 동쪽 측문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엽연채가 문을 지키는 시위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밝히자 시위가 안으로 들어가 말을 전달했다.

잠시 후, 화려한 복장의 한 궁녀가 걸어 나왔다. 바로 금슬이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셨군요.”

금슬은 그리 말하며 조롱 가득한 눈빛으로 주묘서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자 주묘서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주 부인께서 이리 마음을 다 써 주시네요. 한데 섣달그믐이 가까워졌잖습니까. 저희 마마께서는 궁과 태자부 일을 신경 써야 하시니 짬을 낼 겨를이 없으십니다.”

금슬의 말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건넸다.

“마마께서 내 마음만 알아주시면 된다.”

“주 부인,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금슬은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예를 올렸다.

진씨는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아 안색이 확 변했다.

엽연채 일행은 마차에 오른 뒤 바로 태자부를 떠났다. 금슬은 멀어져 가는 마차를 지켜보더니 수화문으로 들어가 곧장 정화원으로 향했다.

태자비는 정말로 바빴다. 궁에서 열리는 연회를 준비하는 중이던 그녀는 금슬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됐느냐? 엽연채가 왔느냐?”

“예, 마마.”

금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자비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참을성이 참 대단한 아이더구나.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찾아오는 걸 보니 말이다. 태자 전하도 백여언 그 여우같은 계집애에게 시들해지고 계시니… 춘절이 지날 때까지만 기다리자꾸나! 지금은 엽연채를 제쳐 두고 혼자서 마음 졸이게 해야 할 때다.”

금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

한편, 엽연채와 진씨 모녀가 탄 마차는 대로 밖으로 나왔다. 주묘서는 이동하는 내내 손수건을 꽉 쥐고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 전만 해도 그녀는 그곳의 귀한 손님이었는데 이제는 문안으로 들어설 수조차 없었다.

양왕부에 보낸 초대장에는 오후에 가겠다고 적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양왕부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요릿집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 식사를 했다.

엽연채 일행은 오후가 되고 나서야 양왕부로 향했다. 양왕부의 동쪽 측문에 도착한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화원에 설치된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시녀는 차와 간식거리를 내온 후 육 측비에게 엽연채 일행의 방문을 알리러 갔다.

엽연채 일행은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을 찾아온 사람은 의복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마마媽媽였다. 그 마마는 세 사람 곁에 잠깐 자리하더니 ‘바쁜 연말이다 보니 육 측비 마마께서 여러분을 직접 접대할 시간이 없으십니다.’라고 설명하며 마음은 잘 받았다는 등의 인사치레를 건넸다.

엽연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했다. 반면, 진씨와 주묘서는 또다시 만나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들은 속으로 수완 없는 엽연채를 한껏 원망했다.

그들이 시녀에게 이끌려 응접실 밖으로 나오는데 멀리서 소매가 없는 진홍색 외투를 입은 한 소녀가 수구繡球(수놓은 공 모양의 장식물)를 들고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엽연채 일행을 보더니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바로 조앵기였다.

‘이런, 야단났구나!’

엽연채의 마음속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조앵기는 그녀를 보더니 기쁜 얼굴로 인사를 건네려 했다.

“연…….”

“왕비 마마, 여기서 뭐 하십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러나 때마침 검은 옷을 입은 마마가 나타났다. 조앵기는 주눅 든 모습으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저분은 양왕비 마마가 아니시더냐?”

진씨가 엽연채에게 물었다.

“널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저 양왕비… 마마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요.”

엽연채가 대꾸하기도 전에 주묘서가 조롱기 가득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것 같구나.”

진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평민 출신이라지.”

“맞아요!”

콧방귀를 뀌는 주묘서의 눈엔 질투가 담겨 있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양왕 전하께 어울리는 사람이겠어요. 양왕 전하께서도 저분을 좋아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번 양왕 전하 생신 축하연 때는 양왕 전하께서 아끼시는 첩실을 물속으로 밀어 버리기까지 했어요. 악독한 사람이에요.”

주묘서는 매력적이고 풍류가 넘치는 양왕을 만나 그를 사모하게 됐다. 하여 양왕에 대해 알아보자 항간엔 양왕부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저런 출신으로 그런 못된 짓까지 벌이다니. 듣자 하니 밖에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니 처소로 돌아가 시녀들에게 괜히 화풀이한다더라고요. 그래서 처소의 시녀들도 이삼 개월마다 무더기로 교체된다고요.”

주묘서가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떠들어 대자 엽연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꾸짖었다.

“큰아가씨께서는 그분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험담을 하시는 겁니까.”

“이…….”

주묘서는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내일 신양 공주부에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꾹 참았다.

“세 분, 아직도 안 가셨어요?”

이때 그들을 안내했던 시녀가 걸어오며 말했다.

“지금 가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그 시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주묘서와 진씨는 하는 수 없이 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양왕부에서 나와 바로 집으로 향했다.

* * *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 일행은 신양 공주부로 향했다. 공주부의 동쪽 측문에 도착한 후 방문한 목적을 알리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화문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니 한 시녀가 그곳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 분, 이쪽으로 오세요.”

엽연채는 이 아리땁게 생긴 시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신양 공주를 곁에서 모시는 아죽이었다.

엽연채는 신양 공주를 두 번 만나 봤다. 첫 번째는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인데, 그때 태자비의 눈에 띄면서 양왕의 함정에 발을 들여놓았다.

두 번째는 추씨 가문 술이 궁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인데, 엽연채는 예의를 갖춰 공주에게 서찰을 보냈고 이곳 시녀의 안내를 받아 부로 들어갔다. 엽연채는 공주 앞에서 사실을 이야기했고 공주는 선심을 베풀어 그녀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엽연채는 공주와 말이 너무 잘 통한다는 생각에 미심쩍어했다. 신양 공주는 분명 양왕 쪽 사람일 것이었다.

진씨와 주묘서는 드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자 기쁨에 두 눈을 번쩍이더니 급히 아죽의 뒤를 쫓아갔다.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걸어가다 보니 주위에는 정자와 누각이 늘어서 있고 꽃과 나무가 가득했다.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길을 얼마간 더 걸어가니 처소의 본채에 도착했다.

진씨와 주묘서가 아죽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글반반한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한 부인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와 진씨 모녀는 그녀에게 예를 올린 후 들고 있던 선물을 올렸다. 백옥나한白玉羅漢 한 쌍과 취옥翠玉(에메랄드)과 묘안석으로 장식된 분경 두 개였다.

신양 공주는 아죽에게 선물을 건네받으라고 한 후 고마움을 전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뭘 이런 걸 다 준비했소.”

어제부터 발품을 들였지만 이제서야 진짜 권력자를 만나게 된 진씨와 주묘서는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그들은 권력자와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주 마마께서 저희에게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이런 약소한 선물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진씨가 미소를 지으며 아양을 떨자 신양 공주는 눈을 내리깔며 내심 불편해했다.

‘뭐지, 이자는.’

자신에게 들러붙으려는 진씨의 모습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쫓아내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녀는 이내 양왕을 떠올렸고 또 엽연채가 양왕의 사람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주씨 가문과는 왕래를 하고 지내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앞으로 일하기가 쉬워질 것이었다.

신양 공주가 불편함을 참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을 쳐다보니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년이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청록색 금포를 입고 있는 이 소년은 허리춤에 불두佛頭와 파랑새 문양이 들어간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차림새도 근사했지만 맑고 투명한 눈빛과 훤칠한 외모를 가져 더더욱 시선을 끌었다. 그는 바로 신양 공주의 아들인 하가로, 군왕郡王의 봉호를 받았기에 보통 사람들은 그를 하소군왕賀小郡王이라고 불렀다.

“어머니.”

하가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와 신양 공주에게 예를 올렸다.

“소자,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리옵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신양 공주가 물었다.

“용왕부容王府에서 외숙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눈을 맞아 몸이 젖었으니 돌아가서 의복을 갈아입도록 하거라.”

신양 공주가 그를 내보내려 했으나 하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엽연채와 진씨 모녀가 있는 쪽을 쓱 쳐다봤다.

진씨는 그를 보더니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의 기억으론 지난번 주묘서가 양왕부에서 돌아왔을 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냐고 물어봤더니 양왕과 태자에게 홀딱 빠져 있던 주묘서는 다들 거기서 거기였다고 답했었다. 그러나 녹지는 한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고 했고, 그 사람이 바로 하가였다.

지금 진씨는 주묘서와 함께 처음으로 신양 공주부에 방문했는데 마침 딱 그와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고귀한 출신에 황실의 혈통이고 작위도 받은 데다 외모 또한 준수하니, 그녀가 생각하는 사위의 조건에 딱 맞아떨어졌다.

주묘서도 여러모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소군왕은 양왕만큼 수려한 외모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게 생겼으니 그녀도 저런 사람이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가가 또다시 자신들을 쳐다보자 주묘서는 그가 자신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하가의 눈빛은 엽연채에게 향해 있었다. 하가는 엽연채를 보더니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놀라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두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혼인한 여인들이 하는 그녀의 머리를 보더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더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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