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시간도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엽연채는 여유롭게 주종과의 혼례식을 기다렸는데 그쪽에서는 준비하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긴 해도 엽연채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추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큰나리께서 풀려났습니다.”
엽연채가 시간을 계산해 보니 과연 엽승덕이 이미 형기를 다 마쳤을 즈음이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만간 풀려날 줄 알았다.”
“그럼… 마님은…….”
추길이 얼굴에 걱정을 내비치자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대수롭잖게 말을 받았다.
“그자는 금세 떠날 테니 괜찮아.”
이 말에 어리둥절해진 추길은 곱씹어 봐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경인에게 밖에 나가 알아보라고 했다.
알아본 결과, 엽승덕은 정말로 정안후부에서 하룻밤만 보낸 후 이튿날 아침 바로 행장을 꾸려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당연히 은정랑을 보러 간 것이었다.
은정랑이 상주에서 공부하는 허서 곁에 함께 있으니 엽승덕은 일각도 도성에서 더 머무를 수 없었다.
엽학문도 엽승덕이 떠나는 것에 적극 동의했다. 감옥살이 때문에 남 보기 창피하니 우선 그곳에 피해 있으라는 심산이었다. 춘절을 쇠고 나면 이 일도 잠잠해질 테니 입적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었다.
엽승덕은 마차를 타고 도성 밖으로 나갔다. 가던 도중 장명가를 지나가게 되자 고개를 돌려 추씨 가문 저택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춘절을 쇤 다음 자신들 세 식구는 반격을 하러 돌아올 것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아 주마. 전부 은정랑과 허서의 것이어야만 하니까.’
엽승덕은 투지를 불태우며 도성을 떠났다. 그는 엽연채가 커다란 구덩이를 파 놓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줄은 전연 알지 못했다.
* * *
한편, 엽연채는 추길을 정안후부로 보내 시월 스무날에 주종과의 혼례식이 있다는 내용의 초대장을 전달했다. 그런데 주종과의 혼례식까지 열흘이 남은 시월 초열흘날 비 이낭 쪽에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비 이낭이 고열에 시달리더니 끝내 소리를 지르고 발작을 일으켰다. 유명한 스님을 모셔와 그녀의 상태를 보였더니 그 스님은 비 이낭이 귀신이 들렸다며 혼사는 내년 청명절이 지난 후에 치러야 한다고 했다.
비 이낭 쪽에서 정확히 무슨 난리를 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설씨 가문과 상의해 혼례식은 내년 청명절이 지난 후에 치르겠다고 했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쯤 뜬 해당화 모양의 구럭을 내려놓더니 추길에게 서둘러 정안후부로 가서 혼례식 날짜가 바뀌었으니 올 필요 없다고 전하라고 했다.
“셋째 도련님.”
그런데 방금 밖으로 나간 추길이 주운환을 불렀다.
나한상에 앉아 있던 엽연채가 그 소리를 듣고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밖을 내다보니 과연 주운환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응접실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곧장 그쪽으로 걸어왔다.
엽연채는 속으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지난번 축하연 후로 자신에게 점점 더 쌀쌀맞게 굴었다. 이에 추길은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셋째 공자님이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론 저희를 외면하고 계세요. 저희를 상대조차 안 하시잖아요.”
그럴 때마다 자신은 추길에게 호통을 치며 그녀를 나무랐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냉담해진 건 사실이었다. 일이 있어 찾아가도 그는 시간이 없다고 밀어내며 여한과 여양에게 자신을 돕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주운환이 직접 찾아왔으니 기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눈처럼 새하얀 옷 위로 짙은 먹같이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고, 그의 몸에서는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공자,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냥 와 봤습니다.”
주운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동안 바깥에 나와 보지 않아 좀 둘러보려고 왔습니다. 저녁은 여기에서 먹고 가겠습니다.”
엽연채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한동안 자신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그래도 그녀는 이내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그래요.”
엽연채는 주운환이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옆에 놓인 수돈에 앉더니 자신의 손에 들린 구럭을 가리키며 이리 물어 왔다.
“이거… 제게 줄 수 있겠습니까?”
엽연채는 또다시 어리둥절해졌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주운환을 잠시 바라본 뒤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이 구럭은 완성 직전이었다. 붉은색 자수실이 그녀의 섬섬옥수 사이로 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잠시 후, 엽연채는 실을 묶은 다음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내 금록석을 가지고 나오더니 구럭 위에 달린 얇은 실로 금록석을 꿰맸다.
엽연채는 완성된 구럭을 집어 들더니 주운환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하니 예쁘지 않나요?”
주운환은 물기를 머금은 듯 맑은 광택이 도는 청록색 금록석과 해당화 모양의 술을 살펴봤다. 우아하면서도 산뜻했지만, 엽연채의 위로 올라간 눈썹꼬리와 옅은 미소에서 느껴지는 고아한 아름다움엔 비할 바가 못 됐다.
“예쁘군요.”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엽연채는 살짝 허리를 굽히더니 그의 허리춤에 구럭을 단단히 묶어 주었다.
주운환은 그녀가 눈앞까지 다가오자 고개를 숙였다. 칠흑같이 까만 그녀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오면서 은은한 향기가 주위에서 맴돌아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공자, 저녁에는 무얼 드시고 싶으신가요?”
허리춤에 매단 구럭이 주운환을 한층 더 화사하고 산뜻하게 보이게 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소저께서 정하십시오.”
“그럼 훠궈火鍋(진하게 끓여 낸 육수에 양고기 또는 소고기를 담가 살짝 익혀 먹는 요리)로 하죠!”
엽연채는 그렇게 제안하며 얼른 혜연을 부르더니 밖에 나가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다.
겨울철에 접어들자 밤은 길어지고 낮은 짧아졌다. 이제 겨우 유시酉時(오후 5시~7시) 이각인데도 하늘이 퍽 어두웠다.
조금 후, 여양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훠궈를 준비해 왔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식사를 마치자 밖에서는 ‘쏴아’ 하고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 계절에 내리는 비는 유독 차가운 법이었다. 두 남녀는 나한상에 앉아 열린 창문 밖으로 빗줄기에 맞아 쉼 없이 흔들리는 파초나무를 쳐다봤다. 창밖의 풍경은 스산해도 방 안에는 화로가 놓여 있어 따스한 온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이날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비가 멈추자 주운환은 궁명헌을 떠났다. 그가 난죽거로 돌아오자마자 여양이 갑자기 양왕 이야기를 꺼냈다.
“올해는 양왕 전하께서 초미금蕉尾琴을 선물로 보내지 않으시네요.”
“이미 다른 걸 선물로 받았잖아.”
여한이 대신 대답했다.
매년 주운환의 생일이 되면 양왕은 초미금을 선물했는데 올해는 그 선물을 보내오지 않았다. 여양은 여한의 말을 듣고서야 이미 선물을 받았다는 걸 떠올렸다.
* * *
며칠이 지나 온남아의 혼례식 날이 되었다. 주운환은 볼일이 있어 엽연채 혼자 혼례식에 참석했다. 그저 친척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십일월이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추위를 잘 타는 엽연채는 방 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연말이라 집집은 춘절을 쇨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엽연채와 추길도 방 안에서 창문 장식에 사용하는 전지剪紙를 오리고 있었다.
“셋째 마님.”
이때, 밖에서 녹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정원에 서 있는 녹지의 모습이 보였다. 녹지는 귀에 거슬리는 말투로 전갈을 알렸다.
“마님께서 부르셔요.”
“알겠다.”
엽연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쟤가 왔으니 보나마나 안 좋은 일이네요.”
추길이 콧방귀를 뀌며 빈정댔다.
혜연은 소매가 없는 진홍색 두꺼운 외투를 가져와 엽연채에게 입혀 준 뒤 조그만 주머니 난로도 챙겨 주었다. 그런 다음 엽연채와 함께 문을 나섰다.
주씨 가문은 일손이 부족했다. 특히 서과원은 엽연채와 주운환이 지내는 뜰을 제외하곤 청소를 하는 사람이 없어 곳곳에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일상원에 도착해서야 좀 산뜻하고 밝은 느낌이 들었다. 눈길을 걸어온 엽연채가 방한용 문발 너머로 들어가니 온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차간으로 걸어가 보니 그곳에서는 은사탄銀絲炭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진씨는 탑상에 앉아 있었고 주묘서는 그녀 바로 옆에 놓인 수돈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가자 주묘서는 간절한 표정을 짓는 반면, 진씨는 불쾌한 기색을 띤 채 냉담한 얼굴을 했다.
“곧 연말이니 친분이 있는 가문에 선물을 보내며 안부 인사를 전해야 한다. 태자부에는 선물을 보냈느냐? 신양 공주부에도 보내야 한다.”
진씨는 이미 태자부에는 희망을 잃은 지 오래였다. 대신 신양 공주 쪽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저번에 네 아버지가 감옥살이를… 추씨 가문 술에 문제가 생겼을 때 네가 공주 마마께 부탁을 드렸다고 들었다.”
진씨는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어제서야 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강씨 가문 친척 중에 내무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추씨 가문 술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신양 공주가 그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했다고 했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렇다고 답했다.
“네. 그땐 도저히 방법이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주 마마께 부탁을 드렸죠. 부탁을 들어주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어떻게 공주 마마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마마께서 널 도와주셨으니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한다. 곧 연말이니 공주 마마께도 선물을 드리거라. 참, 양왕 전하의 측비 마마께서 네 친척분이시라고 했지? 지난번 양왕 전하 생신 축하연 때 널 잘 보살펴 주셨으니 그분께 드릴 선물도 준비하거라.”
진씨는 엽연채의 대꾸가 끝나기 무섭게 활용해야 할 인맥을 모두 언급했다. 춘절이 지나고 삼월이 되면 주묘서는 열여섯이 되니 혼사를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진씨는 관계란 관계는 다 이용해 딸을 좋은 곳에 시집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머님 말씀이 맞습니다.”
엽연채는 바로 수긍했다. 진씨가 한 말은 도리에 맞는 이야기이니 트집을 잡을 게 전혀 없었다.
“그래. 그럼 선물을 제대로 준비하거라. 내일 오전에 태자부에 먼저 가고 오후에 양왕부에 들리자꾸나. 그리고 모레엔 공주부에 가자꾸나.”
진씨의 이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어느새 시간마저 다 정해져 버렸다. 거기다 ‘가자꾸나.’라는 말을 하는 걸 보니 분명 진씨도 함께 갈 모양이었다.
이에 엽연채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도 함께 가시니 그럼 선물은 어머님께서 준비하시지요! 어머님의 안목이면 분명 실수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진씨는 그만 벙찌고 말았다.
그러나 어이가 없기로 치면 엽연채가 더하면 덜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럼 전 돌아가서 서찰을 보내겠습니다.”
말을 마친 엽연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태자부 쪽에 언질을 보내야 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세 장의 서찰을 적은 뒤 추길에게 전달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