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04화 (204/858)

제204화

한편, 주운환이 떠나자 엽연채는 맥이 좀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나무술을 몇 모금 들이켜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역시 송무주가 더 맛있네요.”

“당연하지. 그 술은 우리 추씨 가문의 보배란다.”

추랑이 자랑스러운 투로 대꾸하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혜연이 안주를 들고 돌아왔다. 술에 절인 오리 혀 한 접시와 삶은 닭발 두 접시, 그리고 방 안에서 가져온 튀긴 땅콩까지 더해져 술안주로는 충분하고도 남는 양이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설탕에 재워 말린 과일을 두 개 먹더니 더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추경은 축 처져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우리도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엽미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배웅했다.

“추길아, 경인이와 함께 미채를 데려다주고 오너라.”

추길은 대답하고선 엽미채와 함께 채비를 해 궁명헌을 떠났다.

엽미채는 수화문에서 마차에 오른 후, 추씨 가문 형제들과 함께 문을 나섰다.

가는 내내 추경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는 오늘 일과 주운환의 반응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자신이 보기에 주운환은 분명 엽연채를 좋아했다. 좋아하는데 어째서 그녀와 부부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려는 걸까?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두 사람이 이혼하려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자신은 남의 아내를 넘보는 게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 이혼을 하겠다니 자신이 사랑을 쟁취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대로를 벗어나자마자 그들은 엽미채가 타고 있는 마차와 다른 길로 들어섰다.

* * *

손님들이 모두 떠나자 주씨 가문 저택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딱 한곳만은 그러지 못했다. 바로 주 백야의 서재였다. 비 이낭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또 소란을 피우는 겐가?”

주 백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곧 있으면 종과 도련님과 설옥인의 혼례식 날입니다.”

비 이낭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 설옥인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월 스무날에 주종과에게 시집을 와야 하는 몸이니 외출을 삼가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주씨 가문에 경사가 있는 날이니, 설씨 가문 사람들은 집사를 시켜 선물을 보냄으로써 간소하게나마 성의 표시를 했다. 비 이낭은 설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오자 자신들 모자가 원치 않는 이 혼사를 빨리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진 것이었다.

“혼례식이 얼마 안 남았으면 준비를 잘하시게나. 이 일은 자네가 직접 맡는 게 어떤가?”

주 백야가 ‘에휴’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싫습니다! 종과 도련님이 어떻게 설옥인을 아내로 맞이합니까!”

비 이낭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매번 종과 도련님이 손해를 봐야 합니까? 지난번에 셋째 마님을 며느리로 들이실 때도 말입니다. 분명 종과 도련님이 형이니 정말로 그분을 집안으로 들이실 거였으면 종과 도련님의 아내로 들이셨어야죠! 그런데 나리께서는 종과 도련님이 집에 없는 틈에 셋째 도련님이 이득을 보게 하셨잖아요. 이제 셋째 도련님은 거인이 되어 공명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왜 또 종과 도련님에게 손해를 보라고 하십니까!”

주 백야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또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겐가? 둘째는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네! 셋째 며느리 일은 말해 봤자 소용없으니 꺼내지 말게.

그리고 공명 같은 건 누가 누구 것을 빼앗은 게 아니네. 셋째는 시험에 붙고 둘째는 시험에 붙지 말라고 누가 기원이라도 했단 말인가. 기회는 공평했네. 둘째가 실력이 없는 걸 누구 탓한다는 말인가?”

“지금 종과 도련님이 실력이 없다고 하셨어요?”

비 이낭이 날 선 목소리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전에 나리께서 직접 저희 가문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 종과 도련님이라고 하셨어요. 서원의 스승님들도 종과 도련님이 셋째 도련님보다 훨씬 실력 있다고 하셨고요. 그런데 이제 와 갑자기 종과 도련님이 실력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건가요? 왜요? 셋째 도련님이 거인이 되어서요? 쳇! 그래 봤자 다 요행으로 붙은 겁니다.”

“이, 이, 이런……!”

주 백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집안에서 어렵사리 거인이 나왔는데 비 이낭은 그를 죽어라 헐뜯어 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한 것이 사실처럼 느껴지니 더더욱 성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주 백야는 대로한 음색으로 반박에 나섰다.

“그래, 지금 운이라고 했소? 그런데 운도 실력이네. 누가 셋째는 얻은 그 운을 둘째에게는 얻지 말라고 했는가?”

“종과 도련님이 셋째 도련님보다 운이 나쁜 게 아닙니다. 조상님께서 한 번에 한 사람밖에 돌봐 주지 못하셔서 그런 겁니다.

종과 도련님은 원래부터 향시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도련님이 향시를 한 달 앞두고 갑자기 시험을 보겠다고 했죠. 그래서 운을 모두 빼앗긴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공명을 빼앗아 간 거죠.”

비 이낭은 끝까지 억지를 부렸다.

“그래서 뭘 어쩌고 싶은 겐가? 못 받아들이겠으면 과거 시험장에 가서 방금 전에 했던 말을 해 보게나! 우리 가문의 조상님들께서 둘째가 시험에 합격하도록 돌봐 주지 않으셨다고 말이야. 그쪽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오게!”

주 백야는 화가 나서 낯빛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비 이낭은 말문이 막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 과거 시험장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 그렇게 몰지각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짓을 하는데도 몰지각하지 않다고?’

주 백야는 그야말로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비 이낭은 다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 말은 종과 도련님이 매번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이렇게 종과 도련님을 푸대접하면 안 된다는 거죠. 절대로 설옥인을 종과 도련님의 아내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한낱 시랑侍郞의 서제庶弟가 낳은 서녀가 어떻게 종과 도련님에게 어울리는 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네 말은 들어줄 수 없네!”

주 백야는 단칼에 비 이낭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에게는 혼사를 물리며 소란을 피울 면목도 기운도 없었다. 그는 사납게 비 이낭을 내쫓았다.

“나가게! 나가라고!”

“이!”

비 이낭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가 마구 할퀴었다. 주 백야는 그녀가 감히 자신에게 손찌검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 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를 확 밀쳐 버렸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자 밖에 있던 하인이 그 소리를 듣고 안으로 뛰어 들어와 비 이낭을 밀쳐 냈다. 그는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낸 다음 문을 걸어 잠갔다. 그래도 비 이낭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댔다.

“문 여세요! 문 여시라고요! 오늘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 버릴 거예요!”

“나리, 비 이낭이 갈수록 미쳐 가는 것 같습니다.”

하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런 막돼먹은 여인은 쫓아내면 그만입니다.”

“됐다. 쫓아내기는 무슨. 그냥 내버려 두거라!”

주 백야도 비 이낭이 감당이 안 되긴 했지만, 어찌 됐든 간에 그녀는 주종과의 생모였다. 어떻게 쫓아낼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진짜로 쫓아내면 또 무슨 소란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되면 골치 아픈 일이 한가득 생길 테고 집안은 소란통에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다. 주 백야는 골칫거리와 소란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비 이낭은 밖에서 한참 동안 소란을 피우다가 씩씩거리며 그곳을 떠났다. 그녀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보니 주종과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비 이낭을 보자마자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아버지께서 그리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비 이낭이 새파란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게 쉬울 리가 있겠느냐?”

그 말에 주종과는 불만과 증오가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왜 항상 제가 손해를 봐야 합니까? 왜 좋은 일은 항상 셋째 그 빌어먹을 놈이 다 가져가는 거예요? 전 죽어도 설옥인을 아내로 들이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주종과는 소매를 뿌리치더니 씩씩대며 그곳을 떠났다.

비 이낭이 소란을 피운 이야기가 일상원으로 전해지자 진씨는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요즘은 속 시끄러운 일투성이였다. 이 소식만이 그녀를 기쁘게 해 준 유일한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진씨는 비 이낭의 처소로 녹지를 보냈다. 녹지는 주종과의 혼사는 비 이낭이 직접 주관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저를 찾으면 된다고 그녀에게 전했다.

* * *

그 시각, 궁명원. 날씨가 점점 더 추워져 혜연과 추길은 겨울에 쓰는 두꺼운 이불을 꺼냈다. 이 이불들은 주운환의 것이 아니라 엽연채가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 이불이었다.

두 사람이 엽연채의 침상에 이불을 까는 동안, 엽연채는 엽영교가 걱정돼 탁자 앞에서 몸을 숙인 채 서찰을 적고 있었다.

“추길아, 이 서찰을 가져가 고모에게 전달해 주렴.”

추길은 다가와 서찰을 건네받은 후 슬쩍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한 시진 후, 추길이 돌아와 이렇게 고했다.

“가서 영교 아가씨를 뵈었어요. 조용히 수를 놓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서찰을 전해 드리자 영교 아가씨께서 자신은 괜찮으니 아가씨께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기면 아가씨한테 알리겠다고 덧붙이셨고요.”

추길은 이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 눈에는 영교 아가씨가 괜찮아 보이지 않으셨어요. 아가씨가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엽연채도 걱정이 되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고모도 생각이 있으신 분이니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게다. 우리는 일단 조용히 기다려 보자꾸나.”

이에 추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참. 추길아, 밖에 가서 이불 세 채만 해 오너라.”

엽연채가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 겨울용 이불을 깔면서 주운환이 생각났던 그녀는 창가에 있는 커다란 옷장에서 그의 겨울 이불을 살펴보았다. 날이 추워지면 얼어서 쓰지도 못할 이불이었다.

그길로 돈을 챙겨서 외출한 추길은 이튿날 이불을 가지고 돌아왔다. 홑청을 미리 준비해 놓은 엽연채는 두 여종에게 홑청을 겉에 씌우게 한 다음, 난죽거로 새 이불을 보냈다.

이불을 건네받은 주운환은 이불을 살펴보다가 홑청에 수놓아진 작은 꽃문양을 보았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 꽃문양을 어루만졌다. 이런 꽃문양이 그의 옷소매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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