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추경과 추랑이 궁명헌으로 들어와 보니 깔끔하고 널찍한 정원이 보였다. 정원 왼편에 심어진 파초나무 몇 그루 아래에는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도 놓여 있었다.
엽연채와 엽미채는 그곳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추씨 형제가 술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본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술일 줄 알았어요.”
이내 두 사내가 조그만 술 단지 두 개를 돌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생김새가 아주 독특했다. 벽옥으로 만든 이 단지는 검은 대나무 문양이 들어가 있는데, 딱 봐도 값진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모양새가 고아했다.
“지난번에 죽엽주와 죽순주를 먹고 싶다고 했지.”
추경의 말에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부드럽고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마음이 살짝 따뜻해진 그녀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대꾸했다.
“그냥 별생각 없이 말해 본 거예요.”
추경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말을 받았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빚을 줄을 모르고, 이것만 빚을 줄 알아 이것밖에 줄 수가 없구나.”
추경은 그리 말하며 술 단지를 열었다. 그러자 대나무의 산뜻한 향이 배어 있는 술 냄새가 엽연채의 코로 스며들었다. 순수하고 향긋한 냄새였다.
“조그만 화로가 있느냐?”
“네.”
추경의 물음에 혜연이 대답한 다음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조그만 화로를 들고 와 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술을 끓이는 데 쓰는 화로였다.
이어 혜연이 밥그릇 크기만 한 조그만 쇠 냄비를 가져와 화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추경은 벽옥 단지에 들어 있는 술을 국자로 떠서 백옥 주전자에 담았다.
술이 끓기를 기다리던 이때, 추길이 갑자기 주운환을 불렀다.
“셋째 도련님.”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주운환이 걸어오고 있었다. 구월이라 날씨가 이미 차갑고 서늘한데도 그는 단출한 연청색 도포만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걸어오는 그는 이 계절의 서늘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이목구비가 유난히 싸늘해 보였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부군, 마침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었거든요.”
주운환은 ‘그렇군요.’ 하고 대꾸하더니 엽연채 곁에 놓인 돌의자에 앉았다.
이 돌탁자는 크기가 작아 의자가 네 개만 놓여 있었다. 엽연채와 엽미채가 의자 두 개를 차지했고 추랑도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엽연채의 옆자리에 추경이 앉을 수 있도록 일부러 다른 자리에 앉은 차였다. 그런데 주운환이 갑자기 찾아와 엽연채의 옆자리에 앉을 줄은 몰랐다.
추랑은 기분이 언짢아져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끓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혜연이 얼른 방으로 달려가 아치형 다리가 달린 둥근 의자를 꺼내 와 추랑 옆에 두었다.
엽연채가 벽옥 술 단지를 쳐다보며 추경에게 물었다.
“이런 단지를 쓴 건 술을 차갑게 보관하기 위해서죠? 그럼 이 술은 차갑게 먹어야 맛있을 텐데요.”
“맞아.”
추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지금은 날씨가 쌀쌀하니 날것과 찬 음식은 먹지 않는 게 좋아. 지금은 따뜻하게 마셔 보고 내년 여름이 되면 차게 마시렴.”
“오라버니는 참 시어머니처럼 잔소리가 많으세요. 전 차가운 술을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지금이 겨울도 아니잖아요.”
“안 된다.”
엽연채가 볼멘소리를 하는데도 추경은 단칼에 거절했다.
“여인은 차가운 술을 자주 마시면 몸에 좋지 않다.”
“사촌 오라버니께서 다 언니를 위해서 이러시는 거예요.”
추경의 편을 들어 주던 엽미채는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시선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주운환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에 엽미채는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한 모양이라고 넘겼다.
주운환은 싸늘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의 가슴속에서는 격랑이 일고 있었다.
화로의 술이 따듯하게 데워지자 추경은 술 주전자를 들더니 전원의 술잔에 차례로 술을 따라 주었다.
엽연채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켜자 따뜻하고 순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느껴지더니 입 안 가득 대나무 특유의 싱그러운 향이 감돌았다. 그녀는 ‘음’ 소리를 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풍미를 칭찬했다.
“맛있어요. 일반적인 죽엽주와 죽순주보다 훨씬 맛있는 것 같아요.”
그러자 추랑이 뿌듯해하며 말을 받았다.
“그럼! 우리 둘째 형님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술이 평범한 대나무술이랑 같은 수준일 리가 있어? 이 새로운 술도 둘째 형님이 심혈을 기울여 빚으신 거야. 지금은 따뜻하게 마셔서 아무래도 본연의 맛이 좀 덜 느껴지겠지. 여름까지 기다렸다가 차갑게 마시면 이 술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게다. 그때 가면 우리 추씨 가문을 대표하는 또 다른 술이 탄생하는 셈이지.”
“지난번 별장에 갔을 때 송무주를 개량하느라 바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대나무술을 만들어 판매할 겨를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엽미채는 조그만 머리를 갸우뚱했다.
“연채가 대나무를 좋아한다고 했잖니!”
추랑이 말했다.
“우리 추씨 가문에서 새로운 술을 출시하게 되면 다 먹는 것을 밝히는 연채 덕분인 게다.”
그 말에 엽연채와 엽미채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추랑의 온화한 눈빛이 엽연채의 미소 어린 얼굴로 향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눈빛은 더욱더 부드럽게 변했고 입가엔 살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엽연채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그런데 엽연채는 술잔을 들더니 주운환을 쳐다보며 말했다.
“부군, 술 안 드세요?”
그러자 주운환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 따뜻한 술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술잔을 엽연채 앞으로 밀어 줬다.
“부인께서 드시지요.”
엽연채는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는 그가 내민 술을 마시더니 벽옥 단지를 들어 차가운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럼 이걸 드세요.”
주운환은 조그만 백옥 잔을 들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차가운 이슬 같은 술이 목구멍을 쓸고 내려가자 후끈거리는 느낌이 들면서 진하고 향긋한 향이 풍겨 왔다. 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상쾌한 기분이 들더니 이어 머리가 띵한 느낌을 받았다. 온몸에 싸한 찬 기운이 퍼지더니 정신이 맑아지고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좋은 술이었다. 그러나 이 대나무 특유의 상쾌한 향과 살을 에는 듯한 차디찬 기운에 주운환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갔다.
이때, 엽연채가 그에게 감상을 물었다.
“어때요?”
주운환은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흠, 좋군요.”
그리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부군?”
“다들 마저 드십시오. 전 아직 해야 할 공부가 남아 있어서.”
주운환은 그리 말한 후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편에 서 있던 여양이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주운환은 푸른 대나무처럼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꼿꼿한 자세로 자리를 떴다. 엽연채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그의 등 뒤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은 단청수묵화의 차가운 색채가 물들어 있는 듯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춘시 준비로 바쁘나 보네. 우리끼리 마시죠.”
추랑은 그리 말하더니 미소 띤 얼굴로 혜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안주는 없느냐?”
“주방에 있습니다. 지금 가서 가져올게요.”
혜연은 그리 말하고선 문밖으로 나갔다. 난죽거를 지나며 흘깃하니 대문은 어느새 굳게 잠겨 있었다.
주운환은 정원을 지나 곧장 서재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여한은 두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다가 여양이 대문을 걸어 잠그자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주운환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여양에게 달려가 물었다.
“도련님께서 왜 저러시는 거야?”
여양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결국 불평 어린 목소리로 이리 말했다.
“셋째 마님께서 강가降嫁할 상대를 찾으셨거든.”
“강가할 상대를 찾아? 그게 무슨 말이야?”
여한은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되물었다.
“재가할 상대를 찾았다고.”
대답하는 여양은 울적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허튼소리가 아니야.”
여한이 깜짝 놀라자 여양이 아까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추씨 가문 공자들이 셋째 마님 처소에서 술을 마시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나와 셋째 도련님도 그쪽으로 갔지. 한데 그 추경이란 사람이 셋째 마님께 지극 정성인 걸 딱 봐도 알겠더라.”
이에 여한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랐다.
“알았으니 그만 이야기해.”
그리 말하고선 물조리개를 집어 던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운환은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 있어 있었다. 방금 마셨던 그 대나무술이 정말로 대단한 명주名酒라서 지금까지 영향을 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자신은 추경이 엽연채에게 공을 들이고 살뜰히 신경을 쓰는 모습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남편이 있는 여인인 걸 분명히 알면서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걸까? 그녀를 꾀어내어 바람이라도 피우고 싶은 걸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추경이 이렇게 버젓이 자신의 앞에서 대담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사내는 그녀가 이혼할 줄 알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줬을까? 엽연채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주운환은 씁쓸한 기분이 들며 마음이 아려 왔다. 그녀가 지금 추경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걸까?
여한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셋째 마님이 그 추경이라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설령 셋째 마님이 그 사람에게 이혼한다는 사실을 알리셨다더라도… 그저 시름을 달래려고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도련님, 불안해하지 마세요.”
그 말에 주운환은 순간 멍해지더니 감정을 억누르며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불안해한다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주운환은 그리 톡 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책장에서 『중용中庸』을 꺼낸 다음 탑상에 기대어 앉아 책을 펼쳤다.
그 모습에 여한은 입을 삐죽거렸다. 주인에게 책을 거꾸로 들고 있다고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잠시 생각한 후에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는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더니 여양과 함께 계단에 앉아 넋을 놓았다.
여한과 여양은 자신들의 새로운 여주인 엽연채에게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출신도 좋고 외모도 아름다우며 돈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주운환을 업신여기지 않고 늘 그에게 잘해 주었다.
엽연채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니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내년에 춘시를 치르고 나면 언제 시체가 즐비한, 황량한 전장으로 가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리되면 성한 몸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