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그런데 둘째 언니는 안 보이시네요?”
이리 물어 오는 엽미채의 눈빛엔 옅은 조롱기가 묻어 있었다. 평소 엽이채는 자신들을 있는 힘껏 짓밟아 왔는데, 어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망신을 톡톡히 당했으니 고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게… 원래는 오려고 했었어. 그런데 아침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속이 거북해 오지 못했어.”
장만만이 살짝 웃으며 둘러댔다. 뻔한 핑계에 엽연채와 엽미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참 배불리도 먹었나 보네!’
장박원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도 엽이채가 정말로 속이 안 좋아서 못 온 건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지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등수가 낮은 게 창피해서 오고 싶어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장박원이 심란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가 미소를 머금고 장만만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그녀는 눈이 부시도록 맑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자 장박원은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여긴 다리이니 여기 서서 길을 막지 맙시다.”
이에 장박원은 가식적인 미소를 짓더니 돌아서서 정자 쪽을 향해 걸어갔다. 걷다 보니 백로 정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정교하고 아름다운 구조였지만 좀 낡고 허름해 보였다. 주변 경치도 아름답기는 했지만 잎과 가지가 말라비틀어져 아무리 봐도 을씨년스러웠다. 몰락한 가문의 곤궁하고 초라한 분위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장박원의 얼굴에 어린 조롱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가 보니 정자 안은 사람들로 가득해 그는 정자를 지나 다리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오라버니.”
장만만이 그의 뒤를 쫓아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뭐라고 당부하셨는지 잊었어요? 주 공자와 앙금을 풀고 잘 지내라고 하셨잖아요.”
장박원은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넌 네 일이나 신경 쓰거라!”
“제 일이요? 제 혼사를 말하는 거예요? 제 혼사는 오라버니 내외가 망쳤잖아요!”
장만만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되받더니 음산하고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장박원 역시 얼굴이 더더욱 굳었다. 부끄럽고 분한 마음도 들고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진사로 합격하면 우리 집안은… 더 이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 게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문은 청렴하고 고귀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으니 네가 원하는 곳에 시집갈 수 있을 테지.”
장만만은 아예 혼인을 못 할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자 측비처럼 좋은 혼처를 다시 구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평판 문제로 제명되지 않았던가. 장만만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붙고 나면 이야기해요.”
“너 그게 무슨 뜻이냐?”
장박원은 잘생긴 얼굴을 확 굳히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동생을 힐난했다.
“만만아, 너 어떻게 이렇게 변해 버린 게냐? 전에는 부드러운 아이였는데 가면 갈수록 악독해지는구나!”
“제가 악독해진 건 다 오라버니 내외 때문이에요!”
장만만은 기가 차서 허허 웃더니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장박원은 화가 나고 속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사람은 성현이 아니니 누군들 잘못 하나 없겠느냐? 그런데 넌 어째서 도량이 이리도 좁은 것이냐? 됐다. 너랑 말씨름하지 않으련다.
지난번 향시를 보기 전에 넌 내가 합격하지 못할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지. 그런데 결과가 어떻더냐. 난 향시에 붙었다. 그런데 이번 춘시를 보기 전에도 넌 악담을 퍼붓는구나. 고맙다. 네 덕분에 난 이번 춘시에도 합격하겠구나!”
그 말에 장만만은 냉소만 짓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다 되어 가자 민주에 사는 진씨의 친정 식구가 도착했는데, 서자인 넷째 공자 한 명뿐이었다. 온씨 가문에서는 며느리인 진씨와 그녀의 아들 온남풍이 왔다. 온남아는 시월 중순이면 출가할 몸이었기에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진씨가 주묘서와 주묘화를 데리고 정자로 왔다.
주묘서는 해당화 문양이 짜인 흰색 바탕의 배자를 입고 있었고, 원보계元寶髻 머리에 연꽃 모양 화승華勝을 꽂고 있었다. 차림새는 고와도 태자부 일로 여전히 의기소침한 탓에 표정은 퍽 어두웠다. 아리땁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에 근심과 슬픔이 묻어나니 보는 이들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진씨는 친정집의 넷째 공자와 돌탁자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주묘서와 주묘화는 정자의 난간에서 멍한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추환은 주묘서를 보더니 두 눈을 번뜩였다. 마침 계수나무 꽃을 따고 돌아온 그는 찻잔에 펄펄 끓는 물을 붓더니 그 찻잔을 들고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주 소저, 계수나무 꽃차를 드셔 보실래요?”
주묘서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잘생긴 소년이 서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지인인데 이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걸 보니 분명 엽연채 큰이모의 아들임이 분명했다. 상인의 아들 말이다.
주묘서는 분수를 모르는 그가 꼴도 보기 싫어 고개를 쳐들고 쌀쌀맞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내가 왜 차를 마셔야 돼요!”
그녀의 날 선 반응에 추환은 순간 멍해지더니 찻잔을 들고 가 버렸다.
진씨는 진작부터 그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상황을 지켜보더니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씨는 태자부 쪽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런 작자는 자신의 고명딸에게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어찌 됐든 간에 그녀의 딸은 귀인과 왕래를 한 적도 있으니 반드시 그 정도 급의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지난번에 구혼해 왔던 진씨 가문 아들도 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는데, 이깟 상인의 자식은 어림도 없었다. 진씨는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일단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성질을 부렸다가는 딸의 평판에 흠집이 날지도 몰랐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온씨는 진씨에게 이끌려 일상원으로 향했다. 온씨는 이미 추길을 통해 엽연채가 주묘서 때문에 태자비에게 밉보여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진씨가 진씨 가문의 청혼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진씨는 자리에 앉더니 뜻밖에도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안사돈, 저희는 모두 한 식구이니 돌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 저희는 진씨 가문조차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추씨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안사돈 언니분께 단념하시라고 전해 주시지요!”
“그게 무슨……?”
온씨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잠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사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 큰언니는 주씨 가문을 혼처로 고려해 본 적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으십니다.”
“그런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전 말씀드렸습니다.”
진씨는 찻잔을 집어 들더니 ‘체면이 깎일까 봐 부정하는 거겠지.’ 하며 온씨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온씨는 기가 막혀 그저 헛웃음을 치며 자리를 떨쳤다.
“늦었으니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진씨는 콧방귀를 뀌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수화문을 나온 온씨는 마차에 오른 뒤 마부에게 장명가에 있는 추씨 가문 저택으로 가자고 일렀다. 그곳에 도착한 온씨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온사월의 처소로 달려갔다.
먼저 집에 도착한 온사월은 추환, 추곡과 함께 큰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개를 들던 그녀는 온씨가 그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얘야? 방금 전에 헤어졌는데 왜 또 온 거니?”
“이 집 차가 맛있어서 얻어 마시러 왔죠.”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농담하자 온사월은 의아해했다.
“사돈댁과 이야기를 나누는 거 아니었어?”
“이야기하다가 일이 생겨 버렸어요. 그쪽에서 큰언니에게 그 댁 여식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언니, 혹시 그쪽에 그런 이야기를 건넨 적이 있어요?”
그 말에 온사월은 깜짝 놀라더니 추환을 홱 쏘아보았다. 그녀도 다 봤던 것이다.
추환은 잘생긴 얼굴을 붉히더니 혀를 쏙 내밀며 변명했다.
“귀여워 보이기에 좀 쳐다보다가 차를 건네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됐다. 저쪽에서 그리 말했으니 단념하거라.”
온사월이 당부하자 추환이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헤헤 웃으며 말했다.
“차를 건넸더니 절 노려보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포기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겠어요!”
온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사월은 그녀를 끌어당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좌우간 너도 희망이 생겼구나. 내년 춘시에 합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직 창창한 나이이니 좋은 기회가 많을 게다.”
주운환 이야기였다.
“네. 저도 이제서야 마음이 놓여요.”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온사월이 한마디 더 보탰다.
“출신이 좀 미천…해도 뭐 어떻느냐. 행복한 삶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란다.”
이때, 온씨가 쓱 주변을 보며 물었다.
“참, 경이와 랑이는 왜 안 보여요?”
“아, 그 녀석들 말이지. 뭔가를 연채에게 주려나 보더라. 좀 이따가 오겠다고 했어.”
“그게 뭔데요?”
“새로 개발한 술인 것 같더라.”
* * *
온사월의 예상대로 추경은 엽연채에게 새로 개발한 술을 주려는 것이 맞았다. 그것도 커다란 술독을 두 개나 준비했는데, 들고 왔다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면 나눠 마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마차 안에 놔뒀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자 그제야 술독을 들고 궁명헌으로 향했다.
추씨 형제가 술독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난죽거에서 본 주운환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안 간 게냐?”
그가 싸늘한 얼굴로 묻자 계단에 앉아 있던 여양이 답했다.
“셋째 마님께 선물을 드리려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그 선물이 술독 두 개더라고요! 과연 술을 판매하는 집안다워요! 또 맛 좋은 술이 생겼어요, 헤헤.”
기뻐하는 여양과 달리 주운환은 술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위기감이 든 주운환은 병서兵書를 내려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