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그렇게 주운환의 과거 급제 축하연을 여는 날이 되었다. 당연히 주 백야는 신바람이 났다. 그는 본래 축하연을 성대하게 치르고, 그 김에 관계가 소원했던 친척과 벗들도 모두 초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씨가 뜻밖에도 이런 말을 꺼냈다.
“이제 향시에 합격했을 뿐인데 그렇게 성대하게 치르시려고요? 저희 가문 일이니까 나리께서 귀하게 생각하시는 거지, 다른 사람들 눈엔 그저 거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장원이라도 나온 것처럼 행동하면 사람들의 비웃음만 살 겁니다. 정 성대하게 치르고 싶으시면 내년 춘시에서 진사나 장원으로 합격하면 그때 그리하시죠.”
진씨의 조롱기 가득한 말과 목소리에 주 백야는 어안이 벙벙했다. 진사나 장원으로 합격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아마 평생 합격할 수 없을 것이기에 주 백야는 이번 연회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씨가 한 말은 구구절절 옳은 데다가 그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결국 단념하고 진씨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자처해서 도성의 웃음거리가 될 필요는 없었다.
진씨는 민주에 있는 자신의 친정집에만 초대장을 보냈고 그 외에는 엽씨 가문, 온씨 가문, 추씨 가문, 장씨 가문 사람들만이 초대를 받았다.
그조차도 각 집안에서 참석할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예상해 상은 다섯 개만 준비했다. 진씨는 엽연채에게 일상원 근처 호숫가에 자리한 ‘백로 정자’에서 손님들을 대접하게 했다.
아침이 밝자마자 정안후부 사람들이 도착했는데, 손님은 온씨, 엽미채, 엽승신 부부, 엽승강뿐이었다. 진씨는 백로 정자에서 잠시 머물다가 머리가 어지럽다며 처소로 돌아갔고, 주 백야는 주운환에게 엽승신, 엽승강과 함께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라고 했다.
엽연채는 엽미채를 끌고 다리로 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왜 고모는 안 오셨니? 저번 장씨 가문 연회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으셨잖아.”
엽미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팔월 초에 묘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뒤로는 고모가 영 기운이 없어 보이시긴 해요. 전에는 저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는데 요즘엔 통 안 오셔요. 제가 찾아가도 항상 안 계시고요.”
이에 엽연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묘기화를 언급했다.
“참, 표숙께서는 변경 지역으로 가셨니?”
“그건… 제가 신경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엽미채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즐겁게 웃으며 엽연채를 불렀다.
“연채야!”
엽연채와 엽미채가 고개를 돌려보니 온사월이 아들들을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이모.”
엽연채는 얼른 다가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온사월은 그녀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이내 잰걸음으로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주운환을 끌어당기며 아주 귀한 사람을 본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유, 조카사위가 갈수록 큰 인물이 돼 가는구나!”
엽연채는 민망함에 표정이 살짝 굳었다.
‘누가 친이모 아니랄까 봐!’
온사월 뒤에 서 있던 그녀의 아들들은 활짝 웃으며 엽연채를 쳐다봤고, 특히 추랑은 그녀를 보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엽연채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한편, 추경은 주운환과 인사를 나눈 뒤 다리 위에 서 있는 엽연채에게 다가왔다.
“연채야.”
“거인과 이야기를 나누지 그러세요?”
엽연채가 입을 실룩거리며 말하자 추경은 빙긋 웃어 보였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거인을 둘러싸고 있으니 나 하나쯤은 빠져도 문제없단다. 참, 이따가 줄 것이 있다. 이곳에 가져오기는 좀 그래서.”
“뭔데요?”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다.”
추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제 것도 있나요?”
엽미채가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네 언니에게 물어보거라. 네 언니가 나눠 주겠다고 하면 네 것도 생길 게다.”
이때, 정자에 있는 주운환은 추씨 가문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질문을 받고 있었다.
추환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추켜세웠다.
“매부는 나보다 겨우 두세 살 많은데 벌써 거인이 되었네요. 난 여러 번 시험을 쳤지만 수재로 합격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이 말에 곁에 있던 온씨가 온사월에게 물었다.
“환이도 시험을 봤어요?”
“그래! 환이와 곡이도 학문을 익히고 있어.”
온사월은 고개를 끄덕인 후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타고난 자질은 그냥 그렇지만 말이야.”
“아직 어리잖아요. 열여섯도 안 된걸요.”
추환은 주운환에게 팔고문八股文(명·청 양대에서 과거의 답안용으로 채택된 특별한 형식의 문체)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고 주운환은 그에게 답변을 해 주다가 다리 위를 곁눈질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엽연채와 엽미채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주운환은 더는 팔고문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제가 방금 전에 말한 그 부분 말이에요. 파제破題(팔고문의 첫 문장. 한두 구절로써 제목의 중요한 내용을 밝힘) 다음에 승제承題(팔고문의 두 번째 단계로 파제破題를 이어 주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가 나오는데 두 부분을 연결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추환이 재차 묻는데도 주운환의 시선은 그를 넘어 다리 위로 향해 있었다. 주운환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 부분은 짧은 시간 안에 제대로 설명하기 힘드니 식사를 한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시죠. 저는 일이 있어 저쪽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주운환은 말을 마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큰언니, 언니 집애는 왜 원앙새가 한 마리밖에 없어요?”
엽미채가 호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을 보니 회갈색 암컷 원앙새가 한 마리가 쓸쓸히 수면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엽연채는 평소 원앙새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기에 엽미채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예쁘게 생긴 원앙새는 연채가 잡아먹었나 보지.”
추경이 미소를 지으며 농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어떻게 저런 걸 잡아먹어요.”
엽연채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반박했다.
“아니야? 내 기억으론 네가 어렸을 때 원앙새를 잡아먹겠다고 자주 떼를 쓰곤 했는데. 그때 우리 집에서 원앙새 몇 쌍을 길렀는데 네가 제일 곱고 아름다운 원앙새를 잡아다 구워 먹겠다고 했어. 내가 안 된다고 했더니 네가 바닥에 누워 발버둥을 치더라.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몰래 한 마리를 잡아다가 너에게 가져다주었단다. 그런데 네가 한 번 먹고 나더니 또 먹겠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 집에서 기르던 수컷 원앙새는 전부 네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지.”
엽연채가 입을 삐죽거리며 그럴 리 없다고 대꾸하려는데 갑자기 어렴풋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어릴 적, 자신은 예쁜 원앙새를 먹겠다고 떼를 썼고 결국 정말로 원앙새를 먹었다. 하지만 누가 원앙새를 잡아다가 구워 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바닥에 누워 발버둥을 쳤다? 내가 바닥에 누워 발버둥까지 쳤을까?’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기억이 나든 안 나든, 그녀는 죽어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적 없어요…….”
이 반응을 보고 엽미채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짓궂게 핀잔했다.
“큰언니, 너무하세요! 다들 짝이 있는데 언니는 어떻게 한 마리만 잡아먹고 한 마리 혼자 남기실 수가 있어요.”
“그러게 말이다. 한 마리만 잡아먹고 한 마리는 남기면 안 되지. 차라리 다 먹어 버려야지.”
추경이 거들었다.
이때, 주운환이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엽연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들었고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알은체를 했다.
“부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주운환은 순간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티 내지 않고 무심하게 물었다.
“식사는 언제 준비됩니까?”
엽연채는 하늘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직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 전이라 다 준비되려면 멀었을 거예요. 부군, 많이 시장하세요?”
주운환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시간을 잘못 봤군요.”
엽연채는 그러잖아도 서늘한 주운환의 얼굴이 더욱 냉랭해 보이자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감지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추경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고개를 돌려 물고기 밥을 집어 들고선 연못에 던져 주었다. 하지만 연못 속 물고기들은 그쪽으로 헤엄쳐 오지 않았고 서로 밥을 먹겠다고 달려들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막 새로운 환경에 놓인 물고기들은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주씨 가문은 몰락한 집안인데 어디 한가하게 물고기나 기르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주 백야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이에 그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척하기 위해 어제 밖에 나가 물고기를 사 온 다음 연못에 풀어 놓았다. 다른 사람들이 ‘주씨 가문도 학자 가문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어어……!”
그때였다. 엽미채가 갑자기 작게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엽연채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장박원과 장만만이 여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박원의 수려한 얼굴은 어둡게 그늘이 져 있었고, 장만만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지만 두 눈에 초점이 없어 사람이 멍해 보였다. 아직도 측비 후보 탈락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장씨 남매는 다리 위에 서 있는 엽연채와 주운환을 보더니 그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장만만이 먼저 주운환에게 예를 행하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주 공자님, 축하드립니다.”
그러고는 엽연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연채야, 너에게 복이 있을 줄 알았다.”
그 말에 장박원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엽연채에게 복이 있다? 나에게 시집오지 않고 이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간 게 복이라는 말인가?’
그래 봐야 주운환은 그저 거인이 된 것뿐이었다. 장박원은 이제 막 희망의 불씨에 불이 붙은, 그래서 위로 올라서려고 하지만 오르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오라버니, 할아버지께서 분부하신 일이 뭐예요?”
이때 장만만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장박원은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뒤에 있는 시동을 쳐다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할… 내가 드리는 선물이오. 하하, 주 공자도 내년 춘시에서 힘내시오. 우리 함께 합격하십시다.”
장박원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견딜 수가 없어 자신이 주운환의 선물을 준비했다고 거짓말했다. 할아버지가 준비한 거라고 솔직히 털어놓으면 주운환을 추켜세워 주는 꼴이 되지 않는가.
그러니 차라리 자신이 준비한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어떻게 보면 할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우리 함께 합격하십시다.’라는 말을 꺼낼 땐 조롱과 멸시를 숨기지 못했다.
“고맙소.”
주운환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냉담하게 대꾸했다.
장박원도 주운환을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아 고개만 끄덕이고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