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그 시각 장씨 가문.
장박원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장찬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장박원은 할아버지를 보더니 잔뜩 긴장해 두 손으로 책을 받쳐 들고 더 큰 목소리로 글을 읽었다.
“모레 주씨 가문에서 연회가 열린다.”
장찬이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으며 운을 뗐다.
그 말에 장박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어제 등수 때문에 제대로 망신당한 일이 절로 떠올랐다.
주운환의 등수가 자신보다 높은 것도 생각이 나자 장박원은 속으로 ‘다 운이 좋았던 덕이지.’라고 주운환을 깎아내리면서도 그를 질투하고 미워했다. 여하튼 장박원은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오는 ‘주운환’이란 세 글자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예!”
장박원은 장찬이 자신이 듣기 싫어할 이야기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그렇게 대답하면서 겨우 억지웃음을 지었다.
장찬이 밖을 쳐다보자 시동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녹나무로 만든 상자 두 개를 내려놓았다. 하나는 큰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상자였다.
장박원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걸어가 상자를 열어 보니 서진書鎭(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게 눌러 두는 물건)과 문방사우가 들어 있었다. 한눈에도 모두 귀중해 보였다. 특히 푸른 벽옥으로 만든 서진은 대단히 진귀한 것이었다.
장박원은 물건들을 확인하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게냐?”
장찬은 되묻더니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금 전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느냐? 이틀 뒤에 주씨 가문 셋째 공자의 축하연이 열리니 이것들을 선물로 가져가라는 게다.”
“예? 선물…이요?”
장박원은 어안이 벙벙했다가 이내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그 몰락한 집안의 서자에게 선물하라는 말인가?
“할아버지, 이 서진은… 정말 귀해 보이니 놔두었다가 할아버지께서 쓰십시오. 이 좋은 걸 굳이 그자에게 선물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게 한 치 앞도 못 봐서야 되겠느냐!”
장찬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장박원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주위를 서성이다가 말문을 뗐다.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게 행동해야 하며, 조급함과 교만함을 경계해야 한다. 박원아, 넌 어린 나이에 향시에 합격했으니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아이다. 그러나 네가 합격한 더 큰 이유는 요령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주 공자를 깔보는 게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 아이야말로 진짜 재능이 넘치고 너보다 자질도 훌륭하다. 그러니 너는 겸손하게 행동하거라! 너는 엽학문의 손녀사위이니 그자의 손자로도 볼 수 있지만, 정말로 손자가 된 양 그자의 행동이나 풍격을 배워서는 안 된다.”
‘지금 대체 뭐라고 하시는 거지?’
장박원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엽학문이 뭐가 어떤가. 그가 보기에 엽학문은 할아버지보다 관직만 낮을 뿐, 다른 부분은 다 괜찮았다.
“내일 주씨 가문에 방문해서 네가 직접 이 선물을 셋째 공자에게 전해 주거라. 너와 엽 대소저는… 이미 끝난 관계, 지나간 관계다. 그러니 더 이상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너와 주 공자는 동서지간이니 서로 의지해야 한다. 또 너희 둘 다 앞으로 벼슬길에 오를 것이니 서로 도움을 줘야 할 것이다.”
장찬은 이리 당부한 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장박원은 장찬의 매섭고 괄괄한 목소리에 귀가 다 윙윙거렸다. 이명이 사라지자 그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고, 이내 분노와 원망이 솟구쳤다.
‘방금 전 말씀이 대체 무슨 뜻이지? 정말로 주 공자가 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거기다 서로 도와야 한다고 했지만, 그 속에 숨겨진 뜻은 앞으로 주운환에게 내가 기대야 한다는 거 아닌가?! 그자가 나보다 더 재능이 있다고?’
평소 그의 할아버지는 자신에게는 칭찬 한마디 하는 것도 꺼려했는데, 주운환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좋은 선물까지 가져가 그의 비위를 맞추라고 했다. 장박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대체 왜 그래야 한다는 말인가?
장박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서책을 홱 집어 던졌다. 책상 위에 있는 선물은 더는 쳐다보기도 싫어 재빨리 서재 밖으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엽이채는 방 안에 서서 류아를 나무라고 있었다.
“지금 나더러 무슨 옷을 입을 거냐고 물은 거니? 어제 창피를 당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야? 내가 왜 내일 그곳에 가야 해? 갔다가 그 빌어먹을 계집애에게 비웃음당할 일 있어?”
류아는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에 주인마님께서 어제 주씨 가문에서도 셋째 공자와 셋째 부인 두 분만 참석하게 했으니 내일 연회엔 큰마님과 큰공자님만 가시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큰마님께서 안 가시면…….”
“내가 안 가면 뭐!”
엽이채는 잔뜩 화가 나 소리를 빽 질렀다. 주운환이 장박원보다 시험을 잘 봤으니 자신이 내일 그곳에 참석하면 엽연채에게 얼마나 멸시를 당하겠는가.
“내 발로 찾아가 수모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류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움츠러든 채 감히 더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때, 밖에서 듣고 있던 장박원이 굳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제 당신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부, 부군…….”
엽이채는 깜짝 놀라 낯빛이 확 변하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그게 아니에요……. 제 말은…….”
장박원은 노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신은 그저 등수가 좀 낮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내라는 사람이 고작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로 창피해하다니?
이에 반해 엽연채는 몰락한 가문의 공자, 그것도 서자인 주운환에게 시집가 도성 사람들이 전부 그녀를 비웃었는데도 혼례식, 친정집, 묘씨의 생일 축하연 중 무엇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참석했다. 또 기꺼이 그녀의 서자 남편을 데리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엽이채는……. 두 사람을 비교해 본 장박원은 기분이 점점 더 언짢아졌다.
“부군, 전… 전 그저 기고만장한 그들이 미워서 그런 것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엽이채는 장박원이 자신을 나무라자 조그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장만만의 일이 생긴 후로 그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화를 냈었다. 지금 그가 또 소리를 지르자 엽이채는 너무나도 억울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혼인 전에 큰아버지께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손톱만큼의 억울함도 당하지 않게 해 주실 거라고요…….”
장박원은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 엽이채가 울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에 심기가 한층 불편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엽승덕에게 했던 약속이 있었다.
“방금 전엔 그저 말투가 좀 셌던 것뿐이오. 내가 당신을 뭐 어떻게 하기라도 했소? 할아버지께서 내일 주씨 가문에 방문해 그자에게 직접 선물을 전달하라고 하셨소. 그래서 기분이 좀 언짢아서 그런 거요.”
“왜 부군께서 직접 그자에게 선물을 전달해야 합니까?”
엽이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그녀는 주운환의 등수는 높고 장박원의 등수는 낮은 걸 떠올리더니 몹시도 화가 나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그저 요행으로 잘 본 거잖아요……. 게다가 서자잖아요. 그런데 왜 직접 줘야 돼요?”
‘그러게 말이다. 도대체 왜!’
장박원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장씨 가문의 적자이고 3품 고관인 대리시경의 적장손이며 소년수재였다. 또 어린 나이에 거인이 된 재자였다. 그런 자신이 왜 몰락한 가문 서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단 말인가?
‘주운환에게 그럴만한 자격이나 있다고? 등수가 높은 게 대체 뭐라고?’
주운환의 고향인 청주는 예로부터 자신의 고향인 칭주처럼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니 한마디로 그놈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할아버지야말로 노망이 든 게 틀림없었다. 할아버지는 늘 자신이 향시에 붙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떡하니 붙지 않았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는 그 서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자신이 이번 춘시를 통해 손자가 주운환보다 더 능력 있다는 걸 증명할 것이다.
장박원은 엽이채가 꺼냈던 말 때문에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을뿐더러 분노가 들끓었으며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는 홱 뒤돌아서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머, 부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엽이채가 얼른 장박원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다 문 앞에 서서는 휙 떠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또 제 탓을 하시는 거예요? 또 저에게 화를 내시는 거냐고요!”
장박원은 물기 섞인 목소리에 짜증이 몰려왔다. 전에는 그녀가 더없이 가냘프고 어여쁘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징징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장박원의 냉담한 뒷모습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엽이채는 그제야 방 안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한테 큰소리를 친 게 벌써 몇 번째야. 지난번 장만만의 일은 내 잘못도 아닌데…….’
자신의 잘못이긴 했지만 엽이채는 조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분에 겨워 원망 섞인 목소리로 장박원을 힐난했다.
“자기가 재능이 없어 시험을 잘 못 본 거면서 또 나한테 뭐라고 하네. 난 자기가 못났다고 볼멘소리를 한 적도 없는데!”
엽이채는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버린 정혼남이 장박원보다 시험을 더 잘 봤으니 말이다.
“큰마님, 걱정 마세요. 내년 춘시에서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류아가 얼른 그녀를 달랬다.
엽이채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꽉 움켜쥐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바라는 것이 아니라 꼭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큰도련님께서는 반드시 내년 춘시에 합격하실 거예요. 그럼 주 부인께 다시 반격하면 되죠.”
“반격이라고?”
류아의 말에 엽이채는 콧방귀를 뀌었다.
“난 장씨 가문의 적손 며느리이고 엽연채는 몰락한 가문의, 그것도 서자의 아내야! 지금 그 처지에서 벗어나야 하는 건 엽연채라고!
엽연채가 시궁창에서 벗어날 능력이 있는지 내 두고 볼 거야! 요행이 어디 두 번이나 따라 주겠어? 내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이야. 얼마나 까불어대고 소란을 피우는지 지켜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