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엽균은 엽학문을 보더니 깜짝 놀라 눈알을 굴렸다. 당장이라도 꽁지 빠지게 도망치려는 모습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엽학문은 큰손자를 나무라거나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그래서 엽균은 평소 자기 할아버지를 가장 무서워했다.
그러나 엽학문은 그의 그런 꼬락서니를 보더니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그저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어…….”
엽균은 어리둥절했다.
‘할아버지가 오늘은 왜 이렇게 쉽게 나를 놓아주시는 걸까?’
어찌 됐든 살았단 생각에 엽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운이 엄청 좋은 날인가 봐.’
그는 기쁜 마음에 휘파람을 불려고 하다가 또다시 어리둥절해졌다. 허서와 은정랑이 회미천하의 대문을 열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엽균은 놀라서 얼른 그들 쪽으로 뛰어갔다.
“정랑, 서야.”
허서와 은정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형님.”
“두 사람 방금…….”
엽균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마주치지 않았어? 방금 전에 할아버지께서도 이곳에서 나오시던데. 깜짝 놀랐지 뭐야.”
그러자 허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마주쳤을 거 같아요?”
엽균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더니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아니겠지! 그랬다면 네가 어떻게 지금처럼 웃을 수 있겠니.”
‘지난번 온사월이 이들을 관아에 고발하며 난리를 쳤을 때, 아버지가 정랑이 자신을 구해 줬다고 하셔서 할아버지께서 은정랑 모자를 보호해 주셨지. 그렇긴 해도 할아버지의 평소 성정을 봤을 때 분명 여전히 정랑과 허서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세 사람이 마주쳤다면 할아버지는 둘을 책망했을 게 틀림없어.’
엽균이 화제를 돌렸다.
“참, 약속했던 사람은 갔어? 이번 식사는 아주 즐거웠겠네?”
“하하. 가셨어요. 자리는 당연히 즐거웠고요.”
허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에 엽균은 방금 전에 봤던 엽학문을 떠올리더니 허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서야, 걱정 말거라. 아버지가 나오시면 우리 함께 할아버지를 설득해 너와 정랑이 정안후부로 들어올 방법을 생각해 보자꾸나. 정안후부로 들어오면 내가 꼭 너를 지켜줄 거다.”
“형님은 저에게 정말 잘해 주세요. 한데 형님, 정말로 절 보호해 주실 수 있으세요?”
허서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엽균은 그에게 그런 질문을 받자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가슴팍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내가 왜 너랑 정랑을 보호하지 못하느냐? 설령 지금은… 지금은 좀 무리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절대 문제없을 거다. 어찌 됐든 난 적장자이며 이 집안의 후계자가 아니더냐? 집안 재산도 전부 내 것인데 왜 두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겠어?”
허서는 방금 전 엽학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더니 더욱 조롱 어린 눈빛을 보였다. 그는 기뻐하며 엽균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럼 형님, 사양하지 않을게요.”
“당연하지! 우리 사이에 사양은 무슨!”
옆에 서서 엽균을 쳐다보고 있던 은정랑은 갈수록 그가 우스워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갖고 놀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였다. 그녀는 기분이 아주 좋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균이 공자, 산약배골탕을 드시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바로 가서 갈비를 산 다음 집으로 돌아가 탕을 끓일게요.”
“오, 좋아요!”
엽균은 그녀가 자신에게 잘해 주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갑시다. 서야, 우리도 정랑과 함께 가서 갈비를 고르고 찬거리도 사자꾸나. 우리가 다 큰 사내이기는 하지만 연장자를 모시고 다녀야 효도를 하는 거 아니겠니!”
허서와 은정랑은 지금 기분이 정말로 좋아 더욱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엽균과 함께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뗐다.
한편, 경인이 만두를 파는 작은 노점에서 나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세 사람을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이봐요, 젊은이. 언제까지 여기 이렇게 숨어 있을 거요?”
노점 주인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갈 갑니다. 아저씨, 고기소가 든 만두 열 개와 찐 교자 3인분 주세요.”
“알겠어요!”
경인이 헤헤 웃으며 주문하자 주인은 헤벌쭉 웃으며 태도를 바꾸었다. 자기 가게에 몰래 숨어 있던 경인이 마뜩잖았는데 한번에 이렇게 많이 산다고 할 줄이야.
주인은 이내 경인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와 교자를 건네주었다. 경인은 고기소가 든 만두 열 개와 찐 교자 3인분을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그 시각 궁명헌.
엽연채와 혜연, 추길은 정원의 파초나무 아래에 앉아 부용소芙蓉酥(고기, 표고버섯, 목이버섯 등을 밀가루와 고루 섞은 후 계란물을 입혀 튀긴 요리)를 사러 회미천하에 간 경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경인은 뜻밖에도 만두와 찐 교자를 들고 돌아왔다.
엽연채는 상 위에 놓인 것들을 보고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경인아, 부용소가 없더라도 만두를 이렇게 많이 살 필요는 없지 않니?”
“그러게 말이에요! 저녁에 밥을 안 지어도 되겠어요.”
추길이 거들었다.
“지금 다시 회미천하로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면 저녁이 되어도 못 돌아올지도 몰라요.”
경인의 이 말에 추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아침 일찍 나가지 않았니?”
“응, 그랬지! 근데 갔다가 아주 낯익은 사람들을 몇 명 봤어.”
경인이 헤헤 웃으며 자신이 본 광경을 전했다.
“후야와 은정랑 모자가 함께 회미천하에서 식사하는 걸 봤어. 밖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 나중에 식당 앞에서 큰도련님과 마주쳤는데, 후야께서는 상대도 안 하고 그냥 가 버리시고 그 뒤에 나온 은정랑과 허서는 큰도련님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더라.”
경인은 은정랑 모자와 엽균이 나눈 대화를 흉내 냈다.
“하!”
엽연채의 눈에 비웃음이 어렸다.
“보아하니 우리 잘난 할아버지께서 이미 허서를 ‘인정’해 주셨나 보네. 그 잘난 손자를 알게 됐으니 어디 내 어리석은 오라버니가 눈에 들어오겠어?”
“아가씨… 그럼 저희 계획은…….”
추길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 두 사람이 이렇게 빨리 정안후부로 들어오진 않을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단다.”
엽연채의 계획은 허서가 춘시에 붙어 정안후부로 들어올 때 허서가 엽학문의 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금 몰래 합격을 축하하는 걸 보니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나 보구나. 허서는 당분간 ‘입적’하지 않을 거야.”
“그럼 언제 폭로하시려고요?”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추길은 짜증이 났는지 조그만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혜연이 저쪽을 향해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주운환이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주운환은 걸어와 엽연채 맞은편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소저께서… 저에게 찾아봐 달라는 사람 있었죠. 그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네? 정말이에요?”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반짝였다.
“허대실을 말하는 거죠?”
“맞아요. 어디에 있는지도 이미 확인했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대실이 강왕康王이 다스리는 서북쪽 군대에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소저는 어떤 것을 원합니까?”
“어떤 거라니요?”
엽연채는 그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운환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엽연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역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갈수록 재미있어지네요. 그럼 허대실이 속한 군대는 언제 돌아오나요?”
“내년 이월입니다. 서북西北의 향주享州는 응성과 마찬가지로 서로西魯와 인접해 있지요. 서로는 가을과 겨울에 양식이 부족해 해마다 향주에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연말까지는 도성으로 상황을 보고하러 오지 않을 거예요. 내년 이월 봄이 시작될 즈음은 돼야 돌아올 겁니다. 그럼 이미 춘시가 지난 후겠지요.”
엽연채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 위에 있는 만두를 가리키며 권했다.
“공자, 만두 드실래요?”
주운환은 상 위에 올려진 만두를 보고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전 만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엽연채는 찐 교자가 담긴 접시를 그에게 건넸다.
“그럼 이걸 드세요.”
주운환은 하는 수 없이 교자 접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추길은 반쯤 베어 먹은 고기소가 든 만두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엽연채에게 물었다.
“사별했다는 은정랑의 남편을 정말 찾아낸 거예요?”
“그래.”
엽연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년 이월 춘시가 지난 후 돌아온다는구나.”
“그럼 허서는…….”
“기다렸다가 한번에 쓸어 버리면 되지!”
엽연채의 눈에 비웃음이 어렸다.
“난 그들이 이렇게 빨리 입적하려 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허서는 과거 시험을 봐야 하고 엽승덕은 아직 감옥에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겨우 서자로 집안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집념을 품고 있잖니. 그러니 분명 엽승덕이 감옥에서 나오고 내년 춘시가 끝난 후에 다시 계획을 세울 거야.”
그 말에 추길은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 거였군요. 적자가 되려 하다니! 자기가 어떻게 적자가 된대요?”
엽연채는 허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꿈 한번 야무지구나. 그래도 가지고 놀다 질릴 일은 없겠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파악했으니 이젠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허대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확인했고 게다가 아직 저쪽이 노는 걸 좋아하고 있으니, 자신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고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참, 아가씨. 셋째 공자께서는 어떻게 허대실을 찾으신 거래요? 저희조차도 찾기 어려웠는데 말이죠.”
“벗에게 도움을 청하셨어.”
추길이 화제를 돌리자 엽연채는 대충 얼버무렸다.
“어떤 벗인데요? 능력이 어찌 그리 대단하죠?”
“인맥을 이용했겠지. 이제 그만 물어봐.”
혜연은 그리 말하며 추길이 먹던 만두를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만두나 먹어!”
“웁.”
* * *
시간이 흘러 주운환을 위한 축하연을 이틀 앞두었다. 그러나 정국백부에서 초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엽씨 가문과 장씨 가문, 추씨 가문 사람들 정도만 초대되었고, 진씨는 민주에 있는 자기 친정집에만 초대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