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98화 (198/858)

제198화

은정랑 모자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잉어가 용문龍門을 뛰어올라 용이 되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병풍이 서 있었다. 이 병풍을 돌아가자 커다란 원탁 하나가 놓였고, 그 위로 붉은 비단이 깔려 있었다.

창문 아래에는 목란 문양이 조각된 녹나무 재질의 태사의 두 개가 놓였고, 야위어 보이는 한 사람이 그들을 등진 채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사내는 머리에 치포관緇布冠(단순한 재질과 형태의 검은색 관冠)을 쓰고, 둥근 꽃문양이 들어간 짙은 남색 비단 금포를 입고 있었다. 등이 살짝 굽은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몸을 돌렸는데 다름 아닌 엽학문이었다.

엽학문은 허서 모자를 보더니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허서와 이렇게 만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 역시 당연히 처음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허서는 옷깃과 소매, 밑단 부분이 푸른, 서생들이 주로 입는 회백색 도포를 입었고, 머리에는 역시 서생들이 쓰는 검은색 연모軟帽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은정랑을 조금 닮았고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한눈에도 시와 서책을 많이 읽은 학자의 풍채였다. 엽학문이 꿈에도 그리던 손자의 모습이었다.

엽학문은 가슴이 벅차 순간 눈언저리가 조금 붉어졌다. 그는 허서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입술이 꿈틀거렸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 꾹 참았다. 그런데 이때, 허서가 앞으로 다가서더니 감동 어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읍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는 소리에 엽학문의 자존심은 봄눈 녹듯 사라지더니 얼른 앞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예의가 바른 아이로구나……. 그래도 이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아닙니다.”

허서는 코를 훌쩍이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손자는 늘 할아버지를 그리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평온한 할아버지 댁에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되니 평생 입적할 수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전 슬펐지만… 그저 할아버지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고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아버지께서 절 알아봐 주시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허서는 그리 말하며 몸을 낮추더니 엽학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그러자 엽학문은 코가 다 시큰거렸다. 그는 한껏 예를 갖춘 허서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기특해했다.

“그래, 그래! 넌 내 손자다!”

그는 그리 말하며 허서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가 뒤에 서 있는 은정랑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줄곧 은정랑을 원수같이 보아 왔는데 이제 그녀와 잘 지내야 하게 생겼으니 좀 어색하기도 하고, 아무튼 어찌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때 허서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는 그동안 농촌에서 고생하며 지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중간에 학업도 중단할 뻔했지요. 어머니께서 매일같이 대갓집의 빨래를 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계속 공부하지 못했을 거고, 그럼 오늘 같은 날도 없었을 겁니다.”

엽학문은 은정랑의 가냘픈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둘 다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거라.”

엽학문과 은정랑 모자는 원탁에 앉았다.

“성적은 어떻느냐?”

엽학문이 물었다.

“상주에서는 총 백서른세 명의 거인이 나왔는데 전 77등을 했습니다.”

주운환보다 못한 등수였지만 허서는 자신의 손자이니 엽학문에게는 당연히 허서가 주운환보다 훌륭한 인재였다. 그리고 어제 장씨 가문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주운환은 그저 운이 억세게 좋았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신의 손자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

“서야, 정말 대단하구나.”

엽학문이 그를 칭찬했다.

허서는 자신이 고향에서 얼마나 고생하며 공부를 했는지 또 시험장에 들어가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등등을 이야기했고, 엽학문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간을 찌푸리기도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는 감개에 젖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손자와 할아버지가 나누는 제대로 된 대화 아니겠는가.

“네가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니 원래는 집안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어 너를 섭섭하게 하는구나.”

엽학문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할아버지께서 절 이리 알아봐 주셨으니 전 이미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겁니다.”

허서가 개의치 않자 엽학문은 본론을 꺼냈다.

“이제 향시에도 합격했으니 입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꾸나.”

엽학문은 한층 설레고 흥분되었다. 어서 허서를 집으로 데려가 자신에게도 학문에 재능이 있는 손자가 있다고 온 천하에 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이미 향시에 합격했으니 다른 집안 자식들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 손자도 어서 입적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허서도 엽학문처럼 기대에 부푼 얼굴을 했으나 이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 보니 지금 입적하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말썽을 일으킬까 봐 걱정이 됩니다.”

“누가 감히 말썽을 일으킨다는 말이냐?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엽학문은 콧방귀를 뀌면서 가장 먼저 엽연채와 온씨를 떠올렸다.

“게다가 이 일은 어려울 게 전혀 없다. 나와 네 할머니가 인정하면 네 어미는 네 아버지의 첩이고, 너는 우리 엽씨 가문의 핏줄인 거다. 그것들이 날뛰어도 우리를 어찌하지는 못할 테지.”

그러자 시선을 아래로 향한 허서의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가 감옥에 계신데 제가 입적하게 되면 또 난리가 나 집안이 무슨 꼴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내년에 춘시를 치러야 하니 밖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한 다음 당당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사실 엽학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빨리 손자를 입적하고 싶어 안달이 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허서가 이성적으로 나오자 엽학문은 그제야 단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자꾸나. 과연 내 손자답다. 진중한 면이 꼭 날 닮았구나!”

사실 정말로 그를 입적하면 아마 온 집안이 뒤집힐 터였다. 엽연채와 온씨뿐만 아니라 둘째 내외와 셋째 내외도 난리를 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리통에 허서는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없게 될 테니, 그래서는 곤란했다. 차라리 밖에서 공부해 춘시에 합격한 후 사실을 밝히는 편이 더 나았다.

춘시 합격까지 내다본 엽학문은 한층 흥분이 되어 또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춘시에서 진사로… 아니, 어쩌면 장원이나 탐화가 자신의 친손자일지도 모른다. 그럼 장찬 그 늙은이는 눈알이 빠질 정도로 깜짝 놀랄 것이다. 엽학문은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기쁘고 설레었다.

이때, 허서가 말머리를 틀었다.

“고향에 돌아가 공부를 하는 동안 정 스승님을 알게 되었는데, 요 스승님만큼 유명하시지는 않지만 뛰어난 학식을 갖고 계셔 요 스승님보다 저한테 더 도움을 주시면 주셨지 덜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며칠 쉰 다음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그분 아래서 학문에 매진할 생각입니다.”

허서의 눈빛에 확고한 의지가 비쳤다.

‘내년에 있을 춘시에 반드시 합격해야만 한다! 반드시!’

그래야 지난번 자신들을 관아에 고발해 곤경에 빠뜨렸던 엽연채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또 돌아간다는 말이냐?”

엽학문은 이제야 손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매일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손자는 다시 먼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엽학문은 손자의 장래를 떠올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럼 조심해야 한다. 네 시중을 들 사람을 몇 명 보내 주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이번에는 어머니도 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춘절을 쇤 다음 돌아와서 춘시에 참가할 겁니다.”

“노태야, 걱정 마십시오. 제가 허서를 잘 보살펴 노태야께 춘시에 합격한 손자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은정랑은 쭈뼛거리며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강인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그래!”

엽학문은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래야 이 엽학문의 손자 같지.”

엽학문은 저도 모르게 엽균과 엽영이 떠올렸고, 그러자 가슴 속에서 혐오감이 끓어올랐다.

“열심히 공부하거라. 그럼 우리 정안후부의 가업을 네 손에 넘겨줄 것이다.”

“그런…….”

그 말에 허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업은 큰형님께 물려주셔야죠.”

“그놈이 뭘 안다고!”

엽학문은 콧방귀를 뀌며 엽균을 헐뜯었다.

“현실에 안주하기만 하고 공부를 하려 하지도 않고, 온종일 싸돌아다니며 말썽이나 부리지 딱히 하는 일도 없는 한량이다. 그런 놈에게 집안을 맡겼다가는 집안을 말아먹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균이 공자께서는 어쨌든 장자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정랑이 질겁한 얼굴로 말했다.

“넌 너무 착해 빠졌구나!”

엽학문은 ‘흥’ 하고 재차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어리석을 정도로 착해 빠졌기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손자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지 않았느냐? 안 그랬으면 허서는 벌써 입적했을 게다.”

이에 은정랑은 고개를 숙인 채 떠듬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됐다. 내 그리하는 걸로 이미 결정했다.”

엽학문이 확고하게 의사를 밝히는 중에 점원이 문을 두드렸다. 엽학문이 안으로 들어오라 했고 점원은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상 위에 음식을 차렸다.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후 엽학문은 허서에게 유명하고 귀한 각종 자양제와 고이 보관해 왔던 붓과 먹, 벼루를 선물했다. 그러고서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더 나눈 후 오후 신시申時(오후 3시~5시)가 되어서야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엽학문이 먼저 밖으로 나갔고 허서와 은정랑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밖으로 나왔다.

엽학문이 회미천하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다름 아닌 엽균이었다.

엽균은 둥근 옷깃이 달린, 포문蒲紋(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세 개의 평행선이 교차하는 문양)이 들어간 감청색 항주 비단으로 만든 금포를 입고, 머리에는 은관을 쓰고 있었다. 훤칠한 그는 손에 팔각형 새장을 든 채 작은 노점 앞에 서서 상인에게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다.

엽학문은 그를 보자마자 마음속에서 혐오감이 다시 끓어올랐다. 그러자 서생들이 입는 수수한 도포를 입은, 온몸에서 학자풍이 배어나는 허서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두 손자를 비교해 보니 엽균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량의 모습이었다.

“아… 할,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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