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부, 내년 춘시에서는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기를 기원할게요.”
장박원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춘시에 별로 자신이 없던 그였으나 엽연채의 이 말을 듣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앞으로 몇 달 동안 독한 마음을 먹고 공부에 매진하면 분명 춘시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결과는 그 서자는 낙방하고 자신은 삼갑 안에 들어 이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는 것일 터였다.
“박원아, 너와 함께 수학하는 벗들이 모두 도착한 모양이구나. 함께 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려무나.”
맹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 공자, 이 공자, 밖으로 나갑시다.”
장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서생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이 공자가 공수하며 인사치레를 했다.
“장 공자가 그래도 참 대단하지요. 어린 나이에 향시에 붙었으니 적어도 여러 번 시험에서 떨어진 저희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어제의 장박원이었다면 이 소리에 득의양양해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어색하고 낯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들이 문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세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육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노인이 앞장서서 걸어오고 있었고,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 그 뒤를 따랐다. 다름 아닌 장찬과 엽학문, 주운환이었다.
“어디 가느냐?”
장찬이 엄숙한 얼굴을 한층 굳히며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박원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함께 수학하는 벗들이 와서 밖에 나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참이었습니다.”
장찬은 안색이 좋지 않은 장박원을 보더니 더는 묻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장박원은 고양이를 본 쥐처럼 재빨리 꽁무니를 뺐다.
장찬이 걸어오자 장굉은 얼른 자리를 양보했다. 장찬이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박원이가 왜 저러는 게냐?”
“그게 말이죠…….”
본래부터 장굉은 장찬 앞에서 사실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멋쩍은 얼굴로 방금 전에 있던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장찬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손자가 갈수록 상궤常軌(도리에 맞는 길, 즉 정도程度)를 벗어나는 짓을 벌여 댔다.
‘소년 수재에 재자는 무슨.’
이쯤 되니 진짜 훌륭한 재목인지도 긴가민가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수재가 되었으니 재능이 좀 있는 건 맞았다. 그러나 자신이 몸소 지도하며 지식을 전수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손자는 수재가 되더니 우쭐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만하는 때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다들 그런 단계를 거치며 시간이 좀 지나면 부풀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손자는 후에 열심히 공부하기는커녕 여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심지어는 혼례일에 도망을 쳐서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벌일 줄은 그도 생각지 못했다. 사람 됨됨이도 바르지 않은 녀석이 학문을 익혀서는 무엇에 쓰며, 과거 시험에 합격해 공명을 얻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장찬은 장박원에게 크게 실망했고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그가 벌인 돼먹지 못한 행동 때문에 결국 장만만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고 말았고, 앞으로 수십 년을 내다본 자신의 원대한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집안 또한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체면을 되찾으려면 장박원은 반드시 향시에 합격해야만 했다.
그래서 장찬은 시험 직전에 얼마 동안 그를 몸소 지도했고 채점을 맡은 관리의 취향을 분명하게 파악해 거기에 맞춰 글을 짓는 연습까지 시켰다. 그 결과, 장박원은 아슬아슬하게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방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게 되자 장찬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박원의 저런 심성으로 진사 합격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 어찌 되든 간에 자신은 장박원을 포기하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내년에 있을 전시殿試에서 장박원이 합격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 형,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게나. 박원이는 좋은 아이네.”
엽학문이 하좌에 앉으며 장찬을 위로했다. 그러고 나서는 또 말썽을 일으킨 엽연채를 홱 쏘아보았다.
“하하하. 엽 형에게 못볼 꼴을 보였구려.”
장찬은 그저 허허 웃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자네가 그런 심성과 머리를 가졌으니 평생토록 서책이나 관리하는 4품 한직에 머물러 있는 걸세. 아니지. 이젠 그마저도 강등됐지.’
그렇게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내 밥상이 차려졌다. 식사를 한 뒤 손님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엽학문과 묘씨가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가 말채찍을 가볍게 내리쳤다. 마차는 서서히 움직여 장씨 가문 동쪽 측문을 통해 대로로 나갔다. 엽학문은 떠들썩했던 연회의 풍경을 떠올리더니 기분이 영 불쾌하고 언짢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리, 왜 그렇게 한숨을 쉬세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묘씨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우리 가문에서는 왜 저런 연회를 열 수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엽학문은 자책과 분한 마음이 드러나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희 가문은 그런 복이 없나 봅니다. 그저 좀 더 오래 살아서 증손자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죠.”
그 말에 엽학문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자부심과 애환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묘씨가 몰라서 그렇지, 왜 자기 가문에 그런 복이 없단 말인가? 분명히 있었다. 귀한 손자인 허서가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입적하지 않아 연회를 열 수 없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엽학문이 서재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유이가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나리,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왔다고?”
엽학문은 크게 기뻐하며 수염을 매만졌다.
“좋다, 좋아. 정말이지 큰 경사가 아닐 수 없구나!”
엽학문은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 앉더니 서찰을 적어 유이의 편에 보냈다.
* * *
한편, 엽균은 허서가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접했다.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균은 허서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허서와 은정랑이 함께 짐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야, 돌아왔구나!”
엽균이 들뜬 모습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허서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 아래턱마저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엽균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형님!”
“네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너랑 아버지가 안 계시니 와서 함께 밥도 먹고 탕도 마실 수 없었잖니.”
엽균이 조금 불평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남녀는 유별하고 은정랑은 혼자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시대에 하인은 사람으로 치지 않았으니 여인 혼자 이곳에 살고 있는 셈이 되었다. 자신은 어찌 됐든 외간 사내이니 어떻게 이곳에 자주 들르고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겠는가. 만약 그랬다가는 큰 망신을 당할 터였다.
“정랑의 산약배골탕이 얼마나 그리웠는데요. 드디어 오늘 먹을 수 있게 됐군요.”
엽균은 헤헤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은정랑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을 상자에 넣으며 허서와 눈을 마주쳤다.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던 그녀는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균이 공자, 다음번에 해 드릴게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왜요?”
엽균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은정랑은 대꾸를 하지 않았고 허서도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비밀이라도 감춘 듯한 그 모습에 엽균은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은정랑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정랑, 오늘은 허서가 돌아온 날이잖아요. 아버지도 안 계시니만큼 더더욱 함께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면서 허서의 합격을 축하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한데 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요.”
허서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데 나에게 숨기는 게냐?”
엽균은 수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연유를 더욱 궁금해했다.
“형님께서 무슨 일인지 맞혀 보실래요?”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한 건 아니겠지?”
허서의 웃음기 어린 말에 엽균이 장난 섞인 투로 되물었다.
“맞습니다.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어요.”
이리 답한 은정랑은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엽균은 어리둥절해하더니 기분이 언짢은 척하며 말했다.
“누군데요? 나보다 더 중요해요?”
“네!”
허서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럴 리가.”
엽균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부정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거절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해심 많은 엽균이 이렇게 말했다.
“알겠다. 요 선생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는 거지?”
허서와 은정랑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으세요?”
“그런 것 같기는 뭘. 됐다. 내가 그렇게 상황 파악 못 하는 사람처럼 보이니? 허서 네가 시험에 붙은 건 요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니 제일 먼저 그분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마땅하지.”
허서의 물음에 엽균이 헤헤 웃으며 대꾸했다.
“역시 형님은 사리에 밝은 분이세요.”
“당연한 걸 가지고, 뭘.”
엽균이 허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요 선생과 함께 합격을 축하하며 시간을 보내렴. 난 내일 다시 오마. 왔을 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산약배골탕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엽균은 오늘 바랐던 대로 은정랑 모자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해 조금은 실망했으나 그들이 자신의 배려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성취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이곳을 떠났다.
은정랑은 그가 서재를 나가 정원을 지나치며 진 마마와 인사를 나눈 후 대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그가 대문 밖으로 향하고 나서야 은정랑은 시선을 거두며 코웃음을 쳤다.
“균이 쟤는… 정말 갈수록 우스워 죽겠구나.”
“하하. 그러니까요!”
허서는 입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눈으로는 조롱기 가득한 빛을 번뜩였다.
모자는 방 안에 풀어 놓은 짐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조그만 마차를 타고 일각쯤 가니 도성에서 가장 좋은 요릿집인 ‘회미천하’에 도착했다. 모자가 요릿집으로 들어가 보니 중앙에는 정교하고 우아한 장식물이 진열되어 있었다. 점원이 얼른 다가와 공손한 자세로 물었다.
“두 분, 예약하셨나요?”
회미천하는 거의 매일 손님으로 가득 찼다.
“2층 백로白露 귀빈실로 예약했네.”
“예. 두 분, 이쪽으로 오시죠.”
허서의 대답에 점원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여러 귀빈실을 지나 마침내 끝에서 세 번째에 위치한 귀빈실 앞에 멈춰 섰다. 정교한 꽃무늬가 조각된 나무 문 앞에는 ‘백로 귀빈실’이라고 적힌 녹나무 패자가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점원이 문을 열어 주자 은정랑과 허서가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