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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96화 (196/858)

제196화

학자를 가장 좋아하는 장찬은 오늘이 장박원의 축하연이 열리는 날임에도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았고, 엽학문이 왔을 때도 그저 사람을 시켜 그를 서재로 부를 뿐이었다.

그런데 주운환이 오자마자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오게 할 줄이야. 장찬이 이럴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건 장박원을 깎아내리고 되레 주운환을 추켜세우는 것 아닌가?

“알겠네.”

주운환은 장굉 등에게 공수하며 예를 차렸다.

“그럼 만생晩生(나이나 기수가 어린 사람이 자기를 낮추어 말하는 1인칭 대명사)은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해 공명을 얻게 되었으니 이런 만남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하하, 그리하세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서생만 보시면 이렇게 서재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신답니다.”

맹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흘깃 보더니 이내 그 여종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장박원은 기분이 몹시도 언짢았다. 평소 할아버지는 저를 엄하게 대했고, 또 최근 몇 년 동안은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이제 시험에 합격해 자신을 증명했는데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저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른 사람을 치켜세워 주었다.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기는 모친도 매한가지였다. 맹씨는 화가 나 냉소를 지으며 빈정댔다.

“그런데 주씨 가문 셋째 공자가 어떻게 시험에 합격했는지 모르겠네요. 평소 수업 시간에 졸기만 하고 수업도 안 들었다고 하던데.”

맹흠은 주운환과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그는 학문에 별로 재능이 없어 삼류 서원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맹씨의 힐난에 온씨와 엽미채는 안색이 확 변했으나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갑자기 맹흠에게 알은체를 했다.

“어머, 여기 계신 맹 공자께서는 저희 부군과 함께 학문을 익히는 분이시죠?”

맹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어리둥절해했다. 그래도 드디어 떳떳하게 엽연채를 쳐다볼 수 있게 됐으니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되물었다.

“절 아십니까?”

그는 엽연채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어도 그녀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

과거 엽연채와 장박원은 어린 나이에 정혼한 사이였다. 맹흠은 장박원의 사촌 형이니 어떻게 엽연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겠는가. 다만 정식으로 소개해서 아는 사이가 아닐 뿐이었다.

엽연채는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 맹흠은 그녀를 볼 때마다 장박원을 몹시도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그러니 장박원이 그녀와의 혼인을 피하기 위해 도망을 칠 것이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쨌든 그 바람에 선녀가 따로 없는 이 절세미녀는 서자의 부인이 되어 버렸는데, 공교롭게도 그 서자는 자신과 같은 서원에서 학문을 익히는 학생이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미녀가 진창에 빠져 버리고 만 셈이었다.

맹흠은 절세가인을 아내로 맞이한 주운환을 시기해 평소 서원에서 그를 적잖이 조롱하곤 했다. 그런데 주운환이 향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자 맹흠은 눈알이 다 튀어나올 뻔했다. 저와 같은 열등생이 보란 듯이 향시에 합격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맹흠이 자신을 알고 있냐는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전에 몇 번 마주쳤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오, 그렇소!”

맹흠은 하하 웃더니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주 부인께서는 전에는 내 사촌 동생인 박원이의 정혼녀였잖소. 그런데… 쯧쯧.”

그 말에 온씨는 화가 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뭣 하러 그 이야기를 또 꺼낸다는 말인가? 다행히도 주운환이 불려 갔으니 망정이지 그가 들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엽이채는 그 말을 듣고 비웃듯이 입꼬리를 쓱 올렸다. 장박원은 엽연채가 아니라 자신을 선택했다.

맹흠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말머리를 틀었다.

“평소 수업을 안 듣고 글솜씨도 형편없었는데 어떻게 향시에 붙은 건지 모르겠군요.”

장박원과 엽이채, 손씨 등은 그 말을 듣고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희 부군께서는 평소 수업을 안 들으셨는데도 향시에 합격하셨어요. 그런데 맹 공자께서는 수업을 성실히 들으셨는데 어째서 떨어지셨을까요?”

맹흠은 말문이 막혔다. 이건 주운환은 능력이 출중해 수업을 안 들어도 제대로 듣는 이보다 더 뛰어나다는 소리 아닌가. 그는 순간 화가 나 아무렇게나 반박했다.

“나도 평소 그다지 수업을 열심히 듣지는 않거든요.”

그러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르게 물어 왔다.

“그럼 공자와 제 부군은 똑같이 수업을 안 들으시는데 어째서 제 부군은 시험에 붙고 공자는 떨어지신 걸까요?”

맹흠은 피를 토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엽연채의 말을 정리하면,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 주운환은 시험에 붙었으니 자신보다 능력 있다는 의미였다.

장박원은 맹흠을 쏘아보며 속으로 말도 못하는 멍청한 놈이라고 그를 욕했다. 그러고는 허허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게 그렇죠. 운이 참 중요하거든요.”

“운이요?”

엽연채가 웃으며 말했다.

“제 부군의 고향인 청주青州에서 백스물네 명의 거인이 나왔는데 제 부군은 37등이었습니다.”

37등이라니!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장박원과 맹흠도 안색이 싹 변했다. 그들은 모두 학문을 익히는 자들이라 정말로 운이 좋았다 하더라도 운만으로 50등 안에 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 진짜 실력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죽어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리라. 보통 좋은 게 아니라 기가 막히게 좋았을 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37등이 그리 대단한 겁니까?”

손씨는 잔뜩 식식거리며 입을 나불댔다.

“뭐 대단한 거라고 저렇게 우쭐거립니까? 우리 박원이는 그것보다 더 앞설 텐데요. 그렇지?”

손씨는 그리 말하며 장박원을 쳐다봤다. 그녀도 물론 37등이면 대단한 성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몰락한 집안의 서자 따위가 무슨 수로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말인가? 하찮은 종자가 37등을 했으니 자신의 사위는 분명 훨씬 더 뛰어난 성적을 거뒀을 것이 분명했다.

장박원은 손씨의 말을 듣고 낯빛이 확 변했고, 상석에 앉아 있는 맹씨와 장굉의 표정도 한층 어두워졌다. 엽이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한 가족끼리 뭘 그런 걸 따지세요.”

그러나 손씨는 이미 가슴 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디 엽이채와 장씨 가문 사람들의 어두워진 안색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녀는 그저 엽이채가 자신을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온 김에 물어보면 안 되니? 비밀도 아니잖니. 연채가 먼저 저리 나왔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쓸 것 없다.”

“어머니…….”

정신이 아득해진 엽이채가 몰래 손씨를 꽉 꼬집었다.

“아얏!”

손씨가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려 보니 엽이채가 그녀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손씨는 깜짝 놀라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설마 주운환보다 등수가 아래라는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얼른 정신을 다잡고 말을 바꿨다.

“흥, 연채가 상처받을 수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하죠.”

“숙모의 너그러운 마음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네요.”

엽연채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더니 장박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숙모가 이 이야기를 꺼내셔서 그런지 저도 궁금하네요. 제부는 몇 등이에요?”

장박원 쪽에서 뭔가 숨기는 게 있음을 눈치챈 온씨도 순간 눈빛에 냉소를 띠더니 딸의 말을 이어 받았다.

“지난번에 이채가 초대장을 전달하러 왔을 때 동서가 다음번에 박원이에게 몇 등을 했는지 꼭 물어본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으니 지금 물어봐야겠네. 박원아, 넌 몇 등을 했느냐? 겸손해할 필요 없다!”

그러자 장박원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대로 괜찮다는 걸 보니 정말 잘 봤나 봐요? 방금 전 숙모의 말씀을 들어 보니, 제부, 설마 수석 합격이라도 한 거예요?”

엽연채의 말에 장박원의 얼굴은 그야말로 흑색이 됐다. 그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98등이랍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색이 확 변한 장박원이 고개를 들어 보니 서생들이 입는 회백색 도포를 입은 두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장박원과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로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향시에 합격한 장박원은 의기양양해하며 이번 축하연에 자신과 사이가 좋은 벗들을 초대했고, 그렇지 않은 벗들은 더욱더 초대하려고 했다.

어쨌든 자신은 붙었고 그들은 떨어졌으니 말이다. 비록 98등으로 붙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붙었으니 본인의 유능함을 입증한 셈 아니겠는가? 그런데 주운환이 37등으로 붙었고, 심지어 방금 전에 자기 가족이 주운환을 조롱했으니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다.

98등? 손씨와 엽승신은 낯빛이 확 변해 버렸다. 특히 손씨는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럼 주운환보다 훨씬 못 봤다는 거 아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엽승신은 장박원을 도우려고 얼른 이렇게 말했다.

“칭주秤州에 합격자가 많은가 보지? 그럼 98등이…….”

“칭주의 합격자는 총 백네 명이었습니다.”

장박원의 성적을 알려 준 서생이 웃으며 재차 말했다.

“아주 위험했죠. 장 공자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맹씨와 장굉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 모든 구멍에서 불을 뿜어낼 듯한 모양새였다.

장박원 역시 수치심에 잘생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이를 악물고 변명했다.

“칭주는 날씨가 추운데 제가 여벌의 옷을 챙겨가지 않아 병이 났습니다. 병이 난 상태로… 시험장에 들어가 흐리멍덩하고 정신도 맑지 않았죠. 어떻게 끝까지 버텼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박원은 그리 말한 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 새파란 얼굴로 이어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합격을 했던 거죠.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랬지……. 하하.”

맹씨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박원이가… 시험을 보고 난 뒤 열이 났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더라고요. 태의가 지어 준 약을 며칠 먹고 나서야 기운을 차렸답니다.”

“너무 말라서 처음에는 누구인지도 몰라볼 뻔했죠.”

엽이채도 제때 끼어들어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닦았다.

소란을 피운 손씨와 엽승신은 면목이 없어 그저 그들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아픈 몸으로 시험장에 들어갔는데도 이 등수이면 이미 훌륭한 성적을 거둔 건데 몰아붙일 게 뭐 있습니까?”

묘씨와 온씨 등은 입을 삐죽거렸다.

‘누가 누구를 몰아붙였다는 말인가. 자신이 위신이 선다고 생각할 땐 있는 힘껏 남을 짓밟아 놓더니, 이제 자신이 그 사람만 못하다는 걸 알게 되자 몰아붙인다는 말이나 꺼내는 저 작태 좀 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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