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주운환은 푸른색 선장본線裝本(인쇄된 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책장의 가운데를 접고 등 부분을 끈으로 튼튼하게 묶은 책)이 든 상자를 쥔 채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엽연채가 홑옷을 휘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공자.”
엽연채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상자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저희 어머니께서 공자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주운환이 상자를 열어 보니 문방사우가 들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고마워요.”
주운환은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계속해서 상자에 든 책을 꺼내며 물었다.
“제가 뭘 했다고 고마워합니까?”
“공자가 시험에 합격해 저희 어머니께서 기를 펴게 되셨으니 당연히 고맙죠!”
엽연채가 기쁜 목소리를 내자 주운환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마침… 저도 필요해서 시험을 본 것뿐입니다.”
그 말에 빗자루를 품에 안고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여양은 기가 차서 ‘흥’ 소리를 냈다. 필요해서 시험을 봤다? 원래 자신들의 계획은 춘절을 쇤 다음 도성을 떠나 전쟁터로 종군從軍하는 것이었다. 그리 순조롭게 진행했어야 하는데 과거 시험이 웬 말이란 말인가.
시집간 엽이채가 남편과 함께 친정에 인사를 드리러 왔던 날, 주운환은 엽씨 일가 앞에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겠다고 대답했다. 엽연채가 친정집에서 기죽어 지내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던 것이다.
‘그래서 과거 시험을 보러 갔던 거면서. 우리 도련님은 그걸 인정하면 죽기라도 하시나?’
한편,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엽연채는 주운환이 양왕과 상의해 과거 시험을 봤으리라고 생각했다.
“내년 춘시도 자신 있어요?”
“네.”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양왕과 함께 주산과 말타기, 활쏘기는 물론이고 사서오경과 치세治世, 책론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배웠다. 그래서 본래 양왕은 자신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했었다. 하나는 과거 시험을 치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대에 들어가 공명을 떨치는 것이었다.
자신은 일찌감치 두 번째 길을 택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치세와 책론은 반드시 배워야 했다. 그동안 자신이 서원에서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았던 건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류 서원에서 가르치는 삼류 스승의 학식은 자신에게도 못 미쳤으니까.
또 그리 행동해야 자신의 능력을 숨길 수 있었다. 부친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과거 시험을 치르라고 닦달당했을 테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적모와 집안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
주운환은 부친을 완벽하게 피해 갔지만 결국 과거 시험이라는 커다란 구덩이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심지어 스스로 이 구덩이에 뛰어들리라고는 더욱 생각도 못했다.
엽연채는 춘시도 문제없다는 그의 말을 듣고는 더욱 기뻐했다. 그러고는 어수선한 서재를 둘러보더니 침실은 더욱 엉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피곤할 테니 공자는 쉬는 편이 좋겠어요. 혜연과 추길한테 정리하는 걸 도우라고 할게요.”
“괜찮습니다.”
주운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사양했다.
“제 물건은 제가 정리하는 게 편합니다. 습관이거든요.”
엽연채는 그가 자신을 밀어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처량해졌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주운환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상자에 남아 있는 책을 전부 꺼내 품에 안은 다음 책꽂이로 가 하나씩 꼽았다. 그러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저 멀리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치맛자락과 비단결 같은 긴 머리칼이 어딘지 모르게 좀 쓸쓸해 보여 그의 마음도 씁쓸해졌다.
궁명헌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서차간에서 추길과 함께 수를 놓았다. 반 시진쯤 지나자 혜연이 탕이 든 조그만 국그릇을 들고 와 소청의 원탁에 올려놓으며 이리 말했다.
“아가씨, 날씨가 차니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는 게 좋겠어요!”
바늘로 수를 놓는 데 여념이 없던 엽연채가 손을 멈추더니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 그럴 필요 없어. 바로 난죽거로 가져다주렴.”
혜연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좋은 술과 요리를 준비하라고 하셨잖아요. 셋째 도련님을 이리로 모셔와 함께 식사하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내가 언제 그랬어? 공자께서는 공부하느라 바쁘셔. 내년 춘시를 준비하셔야 하거든.”
그 말에 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 이제 막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쉬지도 않나?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지금부터 준비해야죠. 지금부터 공부에 몰두하면 정말로 붙으실지도 모르죠.”
추길은 이리 말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국그릇을 들고 문을 나섰다.
* * *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흘러 곧 있으면 구월 열이레였다. 장박원의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장씨 가문에서 연회를 여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장씨 가문은 이번 연회를 성대하게 치르지 않고 몇몇 친척과 국자감國子監의 친한 벗과 동창, 장박원의 스승 정도만 초대할 생각이었다. 이번에 너무 크게 치르면 사람들이 자랑을 한다고 수군거릴 테니 본격적인 연회는 내년 춘시를 치른 후에 열기로 한 것이다.
이날 엽연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선물을 준비한 뒤 단장을 마치고 주운환과 함께 장씨 가문으로 갔다. 마차는 삼각을 달린 후 장씨 가문 동쪽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려 보니 적잖은 마차가 그곳에 서 있었다. 보아하니 친척들이 여럿 온 모양이었다.
“아가씨, 저기 저희 가문 마차 아니에요?”
추길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구석을 가리켰다. 그녀가 말한 ‘저희 가문’은 물론 정안후부였다. 엽연채가 그곳을 쳐다보니 커다란 마차 세 대가 세워져 있었다. 모두 정안후부의 마차였다.
“가 보자!”
엽연채 일행이 수화문으로 들어서자 여종 하나가 걸어오더니 그들을 본채로 안내했다.
사실 엽연채는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어 안내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얼마간 걸어가니 본채에 도착했다. 아직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주씨 가문에서 셋째 공자와 셋째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여종이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방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엽연채가 곁눈질로 주위를 훑어보니 맹씨와 장굉이 상석에 앉아 있고 하좌 양쪽으로는 등판과 팔걸이가 없는 의자가 가득 놓여 있었다.
엽씨 가문 사람들은 엽균과 엽영교만 제외하고 모두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장씨 가문의 친척들이었는데, 장씨 가문은 사람이 적어 친척도 별로 없었다. 맹씨의 친정 식구와 장굉의 서출 누이동생이 가족들을 데리고 참석한 게 전부였는데, 모두 엽연채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 장박원과 함께 학문을 닦는 벗과 스승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장박원은 평소 친척들과 왕래하는 걸 몹시 귀찮아했지만, 오늘은 자신이 거인이 되었다고 떵떵대는 날이니 한순간도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내 이곳에 앉아 사람들의 입에 발린 말을 즐기고 있었다.
“칭주秤州는 날씨가 춥고 이곳에서 멀어 보름이나 걸리는데 가는 내내 힘들지는 않았니?”
장박원의 고모가 다정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춥지도 않았고요.”
장박원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제가 이 녀석에게 옷을 몇 벌 더 가져가라고 했는데 기어코 가져가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더니 휘묵이에게 여기저기 다니며 옷을 구하라고 시켰답니다. 이건 질이 별로이고 저건 너무 두껍다며 반나절을 들볶고 나서야 몸에 맞는 옷을 몇 벌 골랐다고 하더군요.”
맹씨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자 방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물결쳤다. 이 바람에 사람들은 밖에서 엽연채와 주운환의 도착을 알리는 여종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가까이 오자 그들을 가장 먼저 본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딸네를 불렀다.
“연채야, 어서 오렴.”
그리 말했지만 온씨의 시선은 주운환을 향해 있었고 그를 보며 그녀는 아주 뿌듯해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장굉과 맹씨를 향해 예를 올렸다.
“장 노야, 장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굉과 맹씨는 순간 멍해졌다. 맹씨가 보니 엽연채는 출가 전보다 더욱 곱고 아름다워져 있었다. 그러자 맹씨는 엽이채가 시집오는 바람에 장만만이 태자 측비 후보에서 탈락한 일이 또 떠올라 속이 몹시 언짢아졌다.
애당초 엽연채가 순리대로 시집왔다면 그렇게 많은 사건이 벌어졌겠는가? 맹씨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엽연채의 배를 쓱 쳐다봤다. 엽이채는 고의인 듯 아닌 듯 엽연채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고 여러 번 그녀를 조롱했다.
이에 요동치던 맹씨의 마음이 조금은 균형을 되찾았다. 어쨌든 그 부분에서만큼은 엽이채가 엽연채보다 능력이 있었다. 바로 회임을 하지 않았는가.
“오,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맹씨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어서 앉거라.”
그리 권하는 맹씨의 시선이 이번에는 주운환에게 향해 있었다. 맹씨는 지금 주운환을 처음 봤는데,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향시에 합격한 인재의 외모는 자기 아들보다도 수려했다. 그 사실에 맹씨는 다시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누군들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오늘은 자기 아들에게 아주 경사스러운 날인데 아들 못지않게 능력 있는 사람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맹씨가 그를 반길 리 만무했다.
장박원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건 당연했다. 반면, 몰락한 가문의 서자인 하찮은 사내가 자신과 함께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니 장박원은 심사가 몹시도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장박원 옆에는 얼굴과 머리통이 둥그런 이십 대 사내가 있었는데 그도 주운환을 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이 사람은 장박원의 사촌 형인 맹흠이었다.
“형님, 이 옥패는 어디에서 사셨습니까?”
장박원은 주운환 부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맹흠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이때, 말끔하게 단장한 여종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했다.
“향시에 합격하신 주 공자께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주인나리께서 주 공자를 찾으십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장박원과 맹씨의 안색이 매우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