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손씨와 엽이채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비쳤으나, 엽학문의 미움을 살 수는 없으니 모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야생 산삼을 가져가거라. 그것도 70년 정도 묵은 오래된 삼이다! 제대로 보관되어 있지.”
묘씨가 이리 상황을 수습할 때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어머님, 야생 산삼으로 뭘 하시려고요?”
“오, 형님. 오셨군요.”
손씨는 온씨를 보더니 뛸 듯이 기뻐했다. 자신의 사위가 시험에 합격했으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수록 더 좋지 않겠는가. 특히 온씨 앞에서 자랑하는 게 다른 누구 앞에서 할 때보다 큰 즐거움을 주었다.
“어서 앉으세요.”
반면 나씨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온씨를 쳐다봤다.
묘씨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방금까지 해도 엽이채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보니 온씨를 마주하자 다소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큰애가 왔구나.”
“어머님, 방금 뭘 가져오신다고 하셨어요? 오래 묵은 야생 산삼이라고 하셨죠? 저도 하나 주시지요!”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 오래 묵은 야생 산삼은 흔한 게 아닌데 어떻게 거저 달라고 하실 수 있으세요? 그게 무슨 배추인 줄 아십니까?”
손씨가 혀를 끌끌 차며 핀잔했다.
“박원이가 시험에 합격했고 오랫동안 고생했으니 집안에서 선물하는 겁니다. 그러니 삼을 두고 손아랫사람과 다투지 마세요.”
이에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 내가 어찌 삼을 두고 손아랫사람과 다투려고 하겠는가? 내가 먹으려는 게 아니라네. 우리 사위를 몸보신해 주려고 그러는 게지. 어머님, 편애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둘째 손녀사위에게 이렇게 좋은 걸 선물하시니 큰손녀사위에게도 한 뿌리 주셔야 도리에 맞는 거 아니겠습니까?”
묘씨는 얼굴을 굳힌 채 ‘온씨는 낯짝도 참 두껍구나.’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손씨는 좀 전보다 더욱 조롱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형님, 왜 이리 소란을 피우시는 거예요? 우리 박원이는 과거 시험을 치르느라 보름 이상 고생을 했으니 삼을 보내 몸보신해 주려는 거잖아요. 시험 합격을 축하하는 의미도 담겨 있고요.”
“그럼 우리 사위에게도 보내 축하를 하면 되지.”
온씨는 소리 내어 웃으며 묘씨와 엽학문에게 말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네요. 마침 이채가 와 있으니 장씨 가문에 따로 알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방금 전에 연채에게서 초대장이 왔는데 저희 사위도 시험에 합격해 스무날에 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참, 방금 전에 장씨 가문은 며칠에 연회를 연다고 했죠? 아, 열이레라고 했죠! 겹치지 않으니 참 잘됐어요. 장씨 가문에 가서 먹고 즐긴 후에 주씨 가문으로 가면 되겠네요.”
“뭐라? 연채의 남편도 시험에 합격했다는 말이냐?”
묘씨가 깜짝 놀라 물었다. 엽학문도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녀석이 시험에 붙었다는 말인가? 어떻게 합격한 사람이 이리 많은 거지? 하지만 분명 우리 손자의 성적이 제일 뛰어날 것이다.’
“그럴 리가요?”
손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엽이채도 안색이 변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걸 거짓말하겠나? 당연히 사실일세.”
온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보다 동서, 그게 무슨 뜻인가? 박원이는 붙어도 되고 우리 사위는 붙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박원이는 열세 살에 수재로 합격한 천재입니다. 그러니 향시에 합격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 몰락… 주 공자는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인데 어떻게 시험에 붙었냐는 거죠.”
손씨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사위는 견줄 상대가 없는 훌륭한 인재라고 늘 생각해 왔다. 도성에서 손꼽히는 인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친척들 사이에서는 가장 뛰어나니 집안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존재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장박원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향시에 합격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자네가 보고 듣지 못한 학자들이 널려 있다네. 도성에 있는 모든 거인들을 자네가 다 알고 만나 봐야 하나?”
온씨가 비웃듯이 대꾸하자 손씨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이내 우월감을 느끼며 역시 비웃는 목소리로 맞섰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 박원이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소년수재이죠. 조카사위는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고요.”
합격해 봤자 흔하디흔한 거인에 불과하니 어떻게 자신의 사위와 비교가 되겠는가? 자신의 사위는 이미 어릴 때부터 이름을 날린 소년수재였다. 이제 향시에도 합격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돌려 엽이채에게 물었다.
“아 참, 이채야. 박원이가 몇 등으로 합격했느냐?”
그녀가 생각하는 장박원은 수석 합격은 아니더라도 상위권으로 합격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엽이채는 좀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멋쩍은 미소와 함께 얼버무렸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붙었으면 됐죠.”
“그래, 붙었으면 됐지.”
엽승신이 끼어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장씨 가문 연회에 참석했을 때 물어봐야겠구나.”
묘씨는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아 보이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리됐으니 연채의 남편 것도 한 뿌리 준비해야겠구나.”
엽학문은 이 소리에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유월에 지세와 전세田税를 거둬들였지만 이후 묘씨의 생일 축하연을 성대하게 치렀고, 엽영교와 나씨의 혼수도 도로 채워 주었다. 거기다 지난달에는 태자부에서 태자 측비를 맞이해 은화 일천 냥가량의 축의금을 냈기에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또 두 집안에서 거인이 나왔다. 양쪽에 퍼 주면 돈이 또 빠듯해지게 생긴 것이다. 그러잖아도 엽학문은 좋은 게 있으면 그저 허서에게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디 남에게 주며 낭비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묘씨가 이미 말을 뱉었으니 차마 여기서 못 주겠다고 막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여 엽학문은 그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전 마마는 선물을 준비하러 나갔고, 온씨는 기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나씨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을 걸었다.
손씨는 사위가 시험에 합격해 한창 우쭐거리고 있었는데, 주운환도 시험에 합격해 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영광이 절반으로 나눠진 것 같아 기분이 영 언짢았다. 모친 곁에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던 엽이채가 배를 잡으며 일어섰다.
“할아버지, 할머니. 밖에 나온 지 반나절이 지났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 될 거 같아요.”
“그래, 피곤하겠구나. 어서 가 보렴! 벌써 5개월이잖니. 앞으로 소식이나 서찰 같은 걸 전달할 땐 류아를 보내거라.”
손씨가 또 으스대자 엽이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의원이 많이 움직이라고 했어요.”
엽이채는 허리를 짚고 일어서서 엽학문과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한 뒤 류아와 손씨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온씨는 엽이채의 볼록한 배를 보니 한 팔에 쏙 들어올 정도로 홀쭉한 엽연채의 허리가 또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시 후, 온씨는 사위에게 보낼 선물을 들고 영귀원으로 돌아왔다. 이때 소청에서 추길이 염교, 채 마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님, 돌아오셨어요.”
추길은 온씨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씨는 기분이 너무 좋아 당장이라도 정국백부로 달려가 축하 인사를 건네며 어린 딸 부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서자이니 적모가 그의 합격 소식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따로 찾아가 축하 인사를 건네면 진씨의 심기가 매우 언짢아질 테고, 그러면 그녀는 엽연채를 더 미워할 게 뻔했다. 고로 지금은 찾아가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온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채 마마에게 이리 일렀다.
“방에 청주青州산 벼루가 있었지?”
“예.”
채 마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더니 바로 벼루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 귀한 먹 두 개와 호주湖州산 붓 두 필, 호남성湖南省에서 나는 종이도 한 묶음 준비해 상자에 담았다. 그런 다음 야생 산삼을 담은 꽃문양이 조각된 기다란 상자를 그 위에 얹어 추길에게 건네주었다.
추길은 기뻐하며 선물을 받고서는 곧장 정안후부를 떠났다. 그녀는 추씨 가문과 온씨 가문을 차례로 들러 역시 초대장을 전달한 뒤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 * *
추길이 궁명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절반 이상 흐른 후였다. 추길은 선물을 품에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는 서책을 보고 있었다.
“정안후부에서 야생 산삼을 선물하셨어요. 그리고 이 붓과 먹은 마님께서 챙겨 주신 겁니다.”
엽연채는 그것들을 받아 들더니 추길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머니께서는 어때 보였어?”
“처음에 봤을 때는 혈색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 셋째 도련님이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기뻐서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좋아하셨어요.”
추길이 웃으며 답하자 엽연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 정안후부에 막 도착했을 때 보니 이채 아가씨도 있더라고요. 들어 보니 장박원도 합격해서 그 소식을 전하러 왔던 거였어요.”
추길이 입을 삐죽거리며 알렸다. 이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전생의 장박원은 이번 과거 시험에 붙지 못했었다.
그땐 자신이 장씨 가문으로 시집갔기에 장박원은 온종일 엽이채를 그리워하느라 학문에 매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또 장만만 일이 그의 투지를 불타오르게 해 막판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시험에 합격할 수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장박원과 엽이채가 어찌 되든 간에 엽연채는 이미 그들을 상대하기 귀찮아진 후였다. 예전 일을 돌이켜 봐도 그들이 먼저 자신의 혼사를 망쳐 버렸기에 자신도 엽이채의 혼수를 날려 먹게 함으로써 복수했을 뿐이다. 그들이 앞으로 못된 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한마디로 자신을 건들지만 않는다면 자신도 구태여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엽연채가 야생 산삼을 혜연의 손에 건네주며 일렀다.
“가져가서 푹 고아 줘. 그리고 저녁에 좋은 술과 요리를 준비하렴.”
혜연은 주방으로 걸어갔고 엽연채는 문방사우가 든 상자를 들고 난죽거로 향했다.
주운환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 오후에야 막 집에 도착한 그는 긴 여정에 적잖이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전날에는 일상원으로 가서 식사한 뒤 저녁에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날이 밝자마자 양왕부에 들렸기 때문에 이제서야 짬이 난 것이다.
주운환은 서재에서 상자에 든 서책들을 꺼내고, 여한은 침실에서 주운환의 옷가지를 정리했다.
이때, 밖에서 비질하던 여양이 알려 왔다.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