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93화 (193/858)

제193화

엽균은 그 말을 듣고 기쁜 목소리로 대꾸했다.

“붙었는데 어째서 바로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냐? 상주는 며칠이면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고, 또 이미 그곳에서 꽤 오래 머물렀는데.”

“채점을 맡은 관리들끼리 학생들의 등수를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아 합격자 명단을 제때 붙이지 않고 질질 끌었다고 하셨던 거 같아요. 며칠 전에야 결과가 나와 성적을 확인한 뒤 바로 도성으로 서찰을 보내신 거래요.”

“가자꾸나. 어서 가서 정랑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야겠어.”

엽균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잠시만요……. 제… 신발이 떨어진 것 같아요. 가서 갈아 신고 오겠습니다.”

추풍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굽혀 신발을 들어 올렸다.

“너도 참. 어서 가서 갈아 신고 오너라.”

엽균이 성가시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추풍은 헤헤 웃으며 잽싸게 달려갔다.

* * *

그 시각 영귀원.

온씨는 탁자 앞에 몸을 숙인 채 『금강경金剛經』을 필사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둘째 마님.”

이때, 밖에서 염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온씨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형님.”

손씨가 허허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주렴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자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온씨의 모습이 보였다.

손씨는 탁자 위에 펼쳐진 불경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왜 불경을 필사하고 계세요? 지금 안녕당은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요. 저랑 같이 가서 어울리지 그러세요?”

온씨는 허허 웃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요즘 조용한 게 좋더라고.”

“조용한 게 뭐가 좋다고요. 이채가 와 있어요. 박원이가 시험에 합격해 초대장을 가지고 왔죠. 구월 열이레에 연회가 열린다고 하네요. 형님도 꼭 가셔야 돼요.”

손씨가 방정맞게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온씨는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장박원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니 분명 시험에 합격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하늘이 이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천벌을 내려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심하여 장박원은 끝내 시험에 합격했다.

본래라면 자신의 사위가 되었을 그가, 딸과의 혼례식 날 도망을 쳐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도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온씨의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더 분한 건 그녀의 아들은 무능하고 딸은 하잘것없는 집안에 시집갔다는 사실이었다.

온씨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집안에서 누군가 가면 되지 뭐. 굳이 뭐 따질 거 있는가?”

그리 말하고선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필사에 집중했다.

손씨는 의기소침한 온씨의 모습을 보더니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후련했다. 그녀는 이내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필사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해 온씨는 『금강경』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는 손씨가 나가자 누군가가 영귀원 밖에서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자는 다름 아닌 엽균의 뚱뚱한 시동 추풍이었다.

벌건 대낮에 손씨가 떠나고도 영귀원의 대문이 닫히지 않자 추풍은 주머니에서 글씨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꺼내 그것으로 돌멩이를 감싼 다음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그 돌멩이를 창문으로 던진 뒤 꽁무니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

온씨는 갑자기 창문으로 뭔가가 던져지자 깜짝 놀랐다. 정체 모를 그 물건은 탁자를 지나쳐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온씨가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니 뭔가가 종이로 감싸져 있었다.

펼쳐 보니 안에는 돌멩이 하나가 들어 있었고, 그것을 감싼 종이에 글자 몇 자가 적혀 있었다. 온씨는 내용을 확인하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고 가슴은 방망이질했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허서가 거인이 되었다.」

“이런 고얀! 밖에 누구 없느냐?”

온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붓을 내려놓고 밖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뜰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씨는 노여운 감정이 한층 북받쳐 올랐다.

“다 어디로 간 것이냐? 하인들은?”

이 소리에 염교가 본채 옆 작은 방에서 황급히 나왔다.

“마님.”

“하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

온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좌우를 살펴보던 염교는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제 불찰입니다. 어린 여종들이 이곳에 별일이 없어 보여 밖에 나가 놀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서 가서 그것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온씨는 ‘후’ 하고 숨을 내쉬더니 화를 낼 기운조차 없어 이렇게 말했다.

“됐다. 문이나 제대로 잠가 놓아라.”

그리 말한 후 그녀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기다란 탁자 앞에 앉아 붓을 들었지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구월은 정말 사람 속을 뒤집는 달이었다. 향시 합격자를 공표하는 게 대체 뭐라고! 원수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합격했으니 어디 자신이 살 수가 있겠는가!

“마님…….”

밖에서 염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냐?”

온씨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추길이가 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이거라.”

온씨가 어리둥절해한 목소리로 이리 이르자 추길이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난 잘 지내고 있으니 돌아가면 연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거라.”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속으로 탄식했다. 향시 합격자가 발표됐으니 딸도 장박원이 합격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위로하려고 추길을 보냈을 게 분명했다.

“마님, 향시 합격자가 발표됐습니다!”

“그래, 그렇다더구나.”

온씨는 추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채에게 아무 걱정 말라고 전하거라. 정 안되겠으면 연채 큰이모와 함께 다시 별장에 가서 지내면 된다. 그럼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되지.”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거세요?”

추길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겠느냐? 장박원이 합격한 걸 말하는 게지.”

온씨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지만 그 격정을 얼굴에는 드러내진 않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 놓으라고 전하거라.”

“에? 장박원도 붙었습니까?”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 몰랐던 게냐? 그럼 여긴 왜…….”

“향시 때문에 왔죠.”

얼떨떨해하는 온씨에게 추길이 미소와 함께 낭보를 전했다.

“저희 주 공자께서 합격하셨어요!”

“뭐라고?”

온씨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사위도 합격했다는 말이냐?”

“예, 마님!”

추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을 꺼냈고 온씨는 떨리는 손으로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주운환이 향시에 합격했으니 정안후부 사람들이 축하연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말로 합격했느냐?”

온씨는 초대장을 보고 또 보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며 물었다. 믿기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전에 주씨 가문 공자들은 문무에 재능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엽연채가 주운환에게 시집간 뒤 온씨는 돈을 들여 주운환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주씨 가문 셋째 공자인 그는 형제들 중 외모는 가장 뛰어나나 가장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라고 했다. 또 글공부에도 재주가 없어 과거 시험에 붙을 가망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과거 시험을 보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씨는 딸이 그를 몰아붙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일은 당연히 마음에 두지 않았고 주운환에게 조금도 희망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추길이 갑자기 찾아와 그가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온씨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합격하셨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운이 좋아서 붙었겠느냐!”

온씨는 한 사람을 아끼면 그 집 지붕의 까마귀까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향시에 떡하니 합격한 걸 보니 사위는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넌 향시에 합격하는 게 장난인 줄 아느냐? 내 사위도 장래가 창창한 사람이다! 내년에는 진사로 합격하고 장원이 될지도 모른다!”

온씨는 그리 말하더니 자리를 시원하게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전에는 걸을 때마다 몸이 축축 처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가뿐하기 그지없어 날아다닐 것만 같았다.

어둡고 칙칙했던 얼굴도 밝고 화사하게 빛났다. 매일 짙은 안개가 깔려 있는 듯한 자신의 생활에 한 줄기 빛이 들이비치더니 운무를 걷어내고 맑은 하늘을 선사해 준 기분이었다.

“마님…….”

추길이 얼른 온씨를 쫓아왔다. 그녀는 셋째 공자가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뿐일 수도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어쨌든 그는 수업 시간에도 졸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진사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기뻐하는 온씨의 모습을 보자 추길은 차마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온씨는 엽연채가 보낸 초대장을 들고 정신없이 호숫가를 따라 걸어갔다. 그녀는 잠시 후 안녕당에 도착했다. 정원을 지나쳐 낭하에 도착하자 안에서 환성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큰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여종이 발을 걷어 올리며 작게 소리쳤다.

온씨가 방 안으로 들어가니 엽학문과 묘씨는 상석에 앉아 있었고, 둘째 내외와 셋째 내외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엽이채가 배를 두 손으로 받치고 권의에 앉아 한창 이야기 중이어서 사람들은 밖에서 여종이 고한 바를 듣지 못했다.

“연회의 모든 준비를 마쳤어요. 요리는 회미천하燴味天下의 주방장을 초청해 내놓을 거예요.”

엽이채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박원이 시험에 합격하고 집에 돌아오자 장만만의 측비 후보 탈락으로 집안에 드리워져 있던 짙은 안개가 단번에 일소됐고 활기찬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러니 이번 연회를 당연히 제대로 준비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왜 박원이와 함께 오지 않았느냐?”

손씨가 물었다.

“남편이 어제 막 집에 돌아왔잖아요. 하루 종일 마차에 앉아 있었으니 피곤하고 온몸이 쑤셔 집에서 쉬고 있어요.”

“그럼. 건강이 제일 중요하지.”

엽이채의 말에 묘씨가 얼른 미소를 지으며 동조했다.

“아 참, 집안에서 고이 간직해 놓은 혈령삼血靈蔘이 있으니 이따가 집에 돌아갈 때 가져가려무나.”

묘씨의 이 말에 엽이채는 기뻐서 우쭐거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뭐? 혈령삼을…….”

엽학문은 기분이 언짢았다. 허서가 자신의 손자란 사실을 몰랐다면 분명 기꺼이 인정을 베풀며 손자사위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신에게는 허서라는 손자가 생겼고, 그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혈령삼은 그쪽에 내주고 싶었다.

“그 삼은 저번에 내가 선물로 가져갔소.”

엽학문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묘씨는 어리둥절해했다. 그 삼은 분명 아직 집에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들추어낼 수는 없어 묘씨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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