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하하하!”
주 백야의 웃음소리가 밖에서 울려 퍼졌다. 주렴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걷어 올려지고, 주 백야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진씨, 강심설 등이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딱딱한 분위기가 느껴지자 미소를 짓고 있던 주 백야도 표정이 굳어졌다.
서자가 잘되니 진씨 등은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기쁘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척 걸어가 탑상 한편에 앉았다.
주 백야는 헛기침을 하더니 얼굴에 띤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셋째가 합격했다는 소식을 다들 들었을 게다, 하하하.”
진씨는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미소지었다.
“네.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둘째가 붙을 거라고 생각했지, 셋째가 붙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운이 정말 좋았네요.”
“오늘 저녁에 일상원에서 연회를 열어 이 경사를 축하할 것이오.”
주 백야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 * *
한편, 궁명헌에서는 엽연채가 나한상 위에 엎드려 화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책 내용에는 관심이 없는 그녀는 여종들에게 이리 물었다.
“얘들아, 공자의 합격 소식을 우리 어머니께 알려야 할까?”
“합격했으니 당연히 이 기쁜 소식을 여러 가문에 알린 다음 집안에서 연회를 베풀어야죠.”
혜연의 대꾸에 엽연채는 고개를 시원하게 끄덕였다.
“그래, 이 희소식을 여기저기 알려야겠지. 다만 집안에서 언제 연회를 베풀지 아직 모르니 시간이 정해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그렇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녹엽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셋째 마님.”
“녹엽아.”
엽연채가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받았다.
“셋째 도련님께서 시험에 합격하셨죠. 축하드립니다, 셋째 마님.”
녹엽이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하자 엽연채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금을 받으러 왔구나?”
그 말을 들은 혜연은 서둘러 침실로 걸어가 은화 한 냥을 들고나와 녹엽의 손에 쥐여 주었다.
“녹엽이 넌 말을 참 예쁘게도 하는구나.”
혜연은 태자부 일을 자신들에게 알려 준 녹엽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금도 통 크게 꺼내 왔다.
녹엽은 금액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며 거절했다.
“이건 은화 한 냥이잖아요. 이걸 어떻게 받아요.”
녹엽의 한 달 품삯이 은화 반 냥밖에 되지 않으니 이 상금은 그녀의 두 달 치 품삯과 맞먹었다.
“받으렴. 이 집안에서 우릴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네준 사람은 네가 유일하단다.”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녹엽은 주운환이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주 백야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단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녀는 차마 엽연채의 흥을 깰 수 없어 머쓱해하며 상금을 받았다.
“셋째 마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상금을 받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백야께서 유시酉時(오후 5시~7시) 이각에 일상원에서 축하연을 열라고 분부를 내리셨어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근데 비 이낭이 밖에서 아무에게나 고래고래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어요.”
녹엽이 조롱 어린 얼굴로 덧붙였다.
“오, 무슨 욕을 하고 있든? 어서 말해 보거라. 재미있겠구나.”
녹엽의 말에 엽연채는 흥미를 보였다. 비 이낭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괜히 법석을 피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 말이다.
“비 이낭이 공명은 둘째 도련님의 것이라면서 자신이 중추절에 둘째 도련님을 보살펴 달라고 기도를 올렸는데, 하늘이 실수를 해서 그 공명이 셋째 도련님의 것이 되었다고 떠들었어요.”
엽연채와 혜연, 추길은 녹엽의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진짜 뭐 이런 괴짜가 다 있어!’
녹엽은 이야기를 전달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아직 일러 엽연채는 화본을 좀 더 보다가, 유시가 되자 주운환을 찾아갔다. 그렇게 부부는 함께 일상원으로 향했다.
일상원 서차간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비 이낭과 주종과를 제외한 모든 상전이 도착해 있었다.
“셋째 도련님과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밖에 있던 여종이 와서 아뢰었다.
그러자 진씨는 어두운 낯빛을 한 채 엽연채 부부가 함께 걸어오는 모습에 눈을 두었다. 장미처럼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엽연채와 정결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운환은 그야말로 한 쌍의 원앙이었다. 진씨는 두 사람의 수려한 용모와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곤 속에서 한층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님, 어머님.”
두 사람이 한입으로 예를 올렸다.
“하하하. 그래, 그래. 한 식구끼리 예는 무슨. 어서 자리에 앉거라.”
주 백야는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기쁘고 흥분된 표정으로 주운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치 한순간이라도 시선을 떼면 거인의 공명이 날아가 버리는 양 말이다.
주운환은 그 불타는 눈길에 입을 삐죽거리며 엽연채와 함께 강심설 옆에 앉았다.
아이를 안고 있던 강심설은 엽연채를 쓱 쳐다보더니 가벼운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셋째 서방님이 주인공이라 이리 늦게 오셨나 보네요.”
잘난 척을 하고 있다고 빈정대는 소리였다. 엽연채가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다.
“형님과 아가씨들은 이곳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시니 몇 걸음만 떼면 곧 도착하시지만, 저흰 서과원에서 지내니 형님만큼 빨리 도착할 수가 없죠. 그리고 유시 이각에 식사를 할 것인데 아직 일각도 되지 않았습니다.”
괜한 트집을 잡던 강심설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낯빛이 어두워진 그녀는 그저 미소만 보이고선 고개를 숙인 채 아이와 놀아 주었다.
이때, 주렴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더니 비 이낭이 새파란 얼굴을 하고 걸어 들어왔다.
“오, 비 이낭도 왔네요?”
주묘서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얄미운 말투로 알은체했다. 그녀는 엽연채와 주운환도 싫어하지만 비 이낭과 주종과도 싫어했다. 주운환이 과거 시험에 합격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종과가 시험에 낙방했으니 그의 불행을 즐기며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오면 안 되나요?”
비 이낭은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쳤다. 그녀는 도저히 주종과가 낙방하고 주운환이 합격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주운환의 합격을 어떻게든 끌어내려야겠단 생각에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더욱이 이곳에 와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주묘서는 콧방귀를 뀌더니 그녀를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비 이낭은 그런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주운환을 쏘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마구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소리쳤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종과 도련님은 품서재의 등 부자께서도 글을 잘 쓴다고 칭찬을 하셨고, 셋째 도련님은 수업 시간에 졸기만 했는데 어떻게 종과 도련님이 떨어집니까? 정말이지 너무 이상합니다!”
주 백야는 그녀가 소란을 피우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됐소, 그걸 어찌 알겠나. 이번에 안 됐으면 다음번에 또 시험을 치면 되지! 다음에는 반드시 붙을 거요.”
그러자 진씨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둘째가 잘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그러나 때론 이런 일이 있기도 하지. 평소 실력은 좋은데 시험에서는 실수를 할 때가 있어. 그에 반해 평소 실력은 형편없는데 운이 좋아 황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 자신이 뭘 적는지도 모르면서 얼떨결에 합격하는 게지.”
비 이낭은 그 말을 듣고서야 속이 좀 풀렸는지 얼른 이렇게 대꾸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 말에 주 백야는 눈꺼풀이 떨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만들 하시오. 둘째도 계속 노력해 다음번에 붙으면 우리 가문에 거인이 둘이나 생길 테니.”
주 백야는 진씨의 말이 귀에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자신도 내심 그녀의 말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셋째는 늘 둘째의 실력에 못 미쳤으니, 과거 시험에 합격한 건 순전히 요행이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좋았다. 어쨌든 집안에서 공명을 떨칠 학자가 나왔으니 말이다.
‘시작이 좋다. 우리 가문이 다시 날아오를 날도 머지않았구나!’
“나리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집안에 거인이 둘이 되겠네요.”
진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거인’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강조했다. 그 말은 내년 회시會試에서 주운환은 필시 낙방할 것이고 주종과와 함께 계속 거인으로, 평생 거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귀에 몹시 거슬리는 말이었지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말에 납득이 가 일제히 엽연채 부부에게 시선을 향했다. 주운환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시고 있었고, 엽연채는 씨앗을 까먹으며 ‘하하’ 실없이 웃고 있었다.
주운환은 사람들과 언쟁하기를 싫어했다. 대신 객관적인 사실로 상대의 체면을 깎기를 원하는 사람이니, 그녀도 나서지 않기로 했다.
“됐으니 다들 식사나 하거라.”
어쨌든 기분이 아주 좋은 주 백야는 이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정면의 대청에서는 이미 여종들이 상을 차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으로 이동했다.
식사를 마친 후 주운환의 축하연이 구월 스무날로 정해지자 사람들은 각자 처소로 흩어졌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초대장을 작성한 뒤 추길과 경인을 시켜 정안후부로 초대장을 보냈다.
정안후부도 즐겁고 경사스러운 분위기였다. 향시가 끝난 후 향시에 참가했던 자제들이 집으로 돌아와 우울한 혹은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안녕당은 초대장을 가져온 엽이채를 맞이하느라 화목하고 유쾌한 분위기였다.
엽균은 잠시간 상황을 지켜보더니 이내 추풍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엽균이 빠르게 걸으며 물었다.
“그게 참말이냐? 허서가 붙었다고?”
“예!”
추풍이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 저더러 송화 골목에 떡을 전해 주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갔더니 마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허서 도련님에게서 서찰이 왔는데 시험해 합격해서 곧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고 하셨대요.”
그가 일컫는 ‘마님’은 당연히 은정랑이었다.